다음 날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아이들이 장난 반으로 몸 담고 있던 '고독한 청운남고' 카톡방에서 시험지가 유출이 됐기 때문이었다.
새벽 2시에 잠깐 올라왔다가 2시 3분쯤에 삭제가 됐지만, 그 시간에 깨어 있던 아이들은 재빠르게 시험지를 저장 했다.
게다가 이솜이 담당하고 있던 시험문제만 유출이 되어서 사안이 중대 해졌다.
교무 회의의 주제는 시험지 유출이었다. 이솜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시 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 좀 해 주시죠."
부장 선생님의 엄숙한 말에 아무도 말을 섣불리 꺼내지 않았다. 그 때, 지은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유출 된 시험지로 시험을 볼 수는 없잖아요. 당장 다음 주가 시험이니까요."
지은의 말에 많은 선생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 일 내로 새롭게 문제를 내시던지, 아니면……."
말을 아끼는 지은의 말에 모두가 이목이 집중 됐다. 아니면? 아니면 어쩌자고?
"생활과 윤리 시험을 없애던 지요."
시험 유출이 됐다는 이유로 시험을 없애면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의 등쌀까지 이겨내야 한다. 그 상황을 감당 할 수 없는 선생님들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답은 3일 내로 문제를 새로 만드는 방법 밖에 없었다.
부장 선생님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솜을 바라봤다.
"이솜 선생. 3일 내로 수정 할 수 있겠어?“
"……네, 해 보겠습니다.“
"해 보는 게 아니야. 해 내야 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시험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게 왜 자네 탓인가. 앞으로 조심 하면 돼. 다른 선생님들도 시험지 관리 잘 하세요."
부장 선생님은 이솜을 다독여줬다.
이솜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꽉 물었다. 울지 않기 위해 힘을 줬더니 몸이 살짝 떨렸다.
긴급하게 회의를 마치고 난 뒤, 이솜은 자리로 돌아가 출석부를 챙겼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조퇴하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솜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솜이 들어가기 전까지 왁자지껄 했던 교실은 이솜이 발을 내딛자마자 찬물을 부은 듯 조용해 졌다. 평소와 같이 찾아오는 조용함이 아니었다.
이솜이 교탁 앞에 서자 아이들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이솜을 바라봤다. 그 사이에 도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좋은 아침.“
"쌤…….“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니까 죽을 상 짓지 마. 아무튼 이번 일로 오늘 이후부터 시험 끝날 때 까지 교무실 절대 출입 금지야. 근처 얼씬거리다가 혼나지 말고 교무실 쪽으로는 아예 오지 마."
이솜은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다.
괜찮아 보이는 이솜의 표정에 아이들도 덩달아 밝아졌다.
다만, 도준만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솜이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이 낸 시험 문제를 시험 일주일 전에 유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시험 문제가 유출이 됐다.
게다가 다른 시험 문제는 하나도 유출 되지 않았는데, 오직 이솜의 시험 문제만 유출이 된 것이다. 분명 이솜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막 부임 한 신입 교사에게 누가 원한을 가지겠는가?
도준은 이솜의 수업에 집중 하지 못하고 공책에 자신이 추리한 것들을 끼적였다.
"김도준. 78페이지 세 번째 단 읽어.”
"네? 아, 아."
도준은 허겁지겁 교과서를 펼쳤다.
아이들은 도준의 처음 보는 모습에 얼떨떨하게 시선을 주었다.
수혁의 도움으로 읽을 곳을 찾은 도준은 차분하게 글을 읽었다.
이솜은 눈을 얇게 뜨고 도준을 바라보다가 곧 수업 내용을 칠판에 적었다.
"그래서 생명과 여러 가지 윤리들이 서로 상호 보완하며 존재하는 거야. 예를 들어……."
이솜은 여러 가지 예화를 들며 수업을 풀어나갔지만 어리 속은 시험 때문에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었다.
수업을 어떻게든 마친 이솜은 재빠르게 교무실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시험 문제를 최대한 많이 뽑아내야 했다.
결국 기출 문제 사이트가 정답인가 싶어 기웃거렸지만 이솜의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다.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2, 3학년의 문제를 다 뽑아야 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했다.
하루 종일 붙들고 있어야 겨우 20문제 남짓인데, 게다가 그 문제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여러 번 수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솜은 시험지를 퍼뜨린 유포자를 당장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정작 이솜이 할 수 있는 것은 분을 삭이는 것뿐이었다.
괜히 씩씩대며 유출 된 문제 중 흔들려서 문제는커녕 정답도 잘 보이지 않는 시험 문제들을 다시 수정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솜 쌤. 도준이가 상담 좀 받고 싶다는데?“
"지금요?“
"응. 일단 상담실로 가라고 했어.“
"아, 네. 감사합니다."
이솜은 은지의 부름에 저장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껐다.
바쁜데 왜 하필 지금 상담을 요청하는 건지.
재빠르게 상담실로 향하자, 도준이 긴 다리를 뻗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솜의 등장에 도준이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무슨 상담? 아까 수업 시간에 집중 못한 거랑 연관 있는 거야?“
"아……. 네.“
"무슨 일인데?"
도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그- 시험지 유포 한 사람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 있으신가 해서요."
도준의 조심스러운 말에 이솜은 생각에 잠겼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어서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문득 한 명이 이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저 자신을 싫어하는 것 일뿐,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 침묵을 지켰다.
도준은 그런 이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원하시면 CCTV 열람 가능하게 해 드릴게요.“
"뭐?“
"교무실에 CCTV 설치 됐을 거예요.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아니, 도준아. 괜찮아. 이미 유포 됐는데 범인 잡아 봤자 뭐 하겠어. 마음만 받을게.“
"그래도.“
"진짜 괜찮아."
사실 이솜은 당장이라도 CCTV를 확인해서 잘난 범인의 낯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마따나 이미 일이 일어난 시점에 들춰 봤자 하등 좋을 것이 없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도준은 약지 못한 이솜을 보고 답답했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나중에 필요하면 말 해주세요.“
"그래, 고마워.“
"저 먼저 가볼게요.“
"응. 수업 잘 듣고.“
"네."
도준이 먼저 자리를 떴다.
이솜은 상담실에 혼자 앉아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차라리 CCTV를 보고 범인을 마음껏 욕을 할 것인지, 그냥 덮고 지나갈 것인지.
범인을 밝히면 아마 그 사람은 더 이상 이 학교에 남을 수 없을 것이고, 그냥 덮고 지나가자니 두 발 뻗고 편히 잠들 범인을 생각하면 배알이 꼴렸다.
어떻게 해도 이솜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결정이었다. 차라리 도준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지도 몰랐다.
아까보다 더 복잡한 마음으로 교무실에 들어선 이솜은 퀭한 눈으로 컴퓨터를 다시 들여다봤다.
"그러다가 피부 다 상하겠어, 이솜 선생님.“
"아- 그러게요……."
일에 얼마나 열중을 하고 있었는지, 거북목이 되도록,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목이 아파오는 것을 알지도 못할 정도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솜이 진우의 말에 잠시 휴식을 가졌다.
블루라이트를 막지 못한 눈은 뻐근함을 토로하고 있었고, 한껏 내밀었던 고개는 우드득 소리를 냈다.
가장 문제는 손목이었다. 여기저기 좋은 문제들을 수정하고 대입하느라 고생을 했는지, 슬슬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이솜은 컵을 가지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어, 문제 다 만들었어요?"
탕비실엔 지은이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솜을 울상을 지으며 아니요, 라고 대답하고 컵에 유자차를 담았다.
얼음과 함께 마시면 부글부글 끓어 오른 속이 조금 가라앉으리라.
"문제도 안 만들고 뭐 하는 거람-"
뒤에서 들려오는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이솜이 티스푼으로 유자차와 얼음물을 섞던 손을 멈췄다.
이솜이 천천히 몸을 돌려 지은을 바라봤다.
지은은 이솜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솜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게요. 누구 덕분에 개고생을 하고 있네요.“
"왜 눈을 그렇게 떠? 꼭 내가 유포자라도 되는 것 마냥 바라보네?"
지은이 그냥 바라본 이솜을 예민하게 받아 쳤다.
이솜은 기가 찼다.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왜, 방구 뀐 놈이 성낸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본 적 없습니다."
이솜은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할 말을 다 하다간 저 성격도 감당이 되지 않을 뿐더러, 1년 동안은 꼭 마주보며 생활해야하기 때문에 껄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는 이솜을 째려본 지은은 벌떡 일어나 나가면서 탕비실 문을 쾅 닫았다.
"눈 이상하게 뜬 건 본인이면서……."
이솜은 다시 유자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솜에게 뿜어져 나온 열기 때문인지, 얼음이 녹고 있었다.
씩씩대면서 자리에 앉은 지은은 기분이 상했다.
이솜에게 엿을 주고 싶었는데 왜 본인이 더 화를 내고 감정적으로 나가는지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혼자서 화를 삭히고 있는데, 이솜이 탕비실에서 천천히 나왔다.
그 걸음마저 꼴도 보기 싫은 지은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청운고섹시남 [대박ㅋㅋㅋㅋ저거 어디서 남? 원본 다시 올려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운고는들어라 [유출문제 올린 사람 들키면 잣댐 ㅋㅋㅋㅋㅋㅋㅋㅋ]
잇힝잇힝 [이대로 시험 문제 났으면 좋겠당 희희]
허정희쓰레기임 [이대로 나올리가 있나;; 고친다에 내 손목건다ㅋ]
익명으로 운영 되고 있는 '고독한 청운남고' 카톡방은 새벽에 지워진 시험지를 가지고 아직도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
지은은 그 흐뭇하게 내용을 지켜보다가 누가 볼 새라 재빠르게 카톡방을 나왔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나오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의 일만 들키지 않는다면 지은은 이솜에게 아주 큰 엿을 날려주는 셈이었다.
아까 탕비실에서 일었던 짜증은 카톡 내용으로 인해 사르르 녹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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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5월 XX일
열심히 중간고사 문제를 만들었는데 누군가가 유출을 시켜버렸다. 도준이가 CCTV 열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는데, 지금 들추면 뭐 하나. 어차피 문제 만들어야 하는 건 똑같은데. 우울하다.. 범인은 누구일까?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ㅠ_ㅠ]
*
이솜은 한숨을 푹 쉬었다. 주말 저녁, 부장선생님에게 온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이솜 선생. CCTV 확인 해서 . 범인을 잡을 수 있는데 . 아무래도 . 안 보는게 좋을 . 것 같네 . 왜 그런 . 지 . 잘 알지?]
"왜 그런지 너무 잘 알죠. 너무 잘 알아서 문제입니다, 쌤."
사건이 공론화가 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 들 것이 눈 감아도 뻔히 보였다.
조용히 문제를 뽑고 있던 이솜은 신경질적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자를 보낸 부장 선생님이 괜히 미워졌다.
'누굴 미워하면 안 되는 거야.'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에 이솜은 손을 멈췄다.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득 채워도 범인이 미워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 상태로는 제대로 된 문제를 뽑을 수 없었다.
이솜은 휴대폰과 지갑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태는 술이 매우 필요했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한 캔을 챙긴 이솜은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밖에 있는 의자에 시원한 맥주를 올려 두었다.
벌컥벌컥 마시면 속이 뻥 뚫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맥주 뚜껑을 따고 입 안으로 밀어 넣으니 거품과 함께 맥주가 목 너머로 술술 들어갔다.
"크하- 으, 진짜 맛없어……."
입가를 닦은 이솜은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맛있지도 않는데 왜 이런 걸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 입만 마시고 버리기엔 돈과 시간과 짜증나는 마음이 아까운 이솜은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넘김은 부드러웠지만 맛은 영 이솜의 취향이 아니었다.
"과자라도 살까……."
입맛을 쩝쩝 다시며 편의점 입구를 바라 본 이솜은 살짝 고민했다.
안주가 없어서 맛이 없는 건가 생각을 했지만 안주가 있던 없던 어쨌든 술은 맛이 없었다.
한 캔을 다 비운 이솜은 살짝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취하지는 않았지만 마냥 나빴던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아이스크림 먹어야징."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에 놓인 냉동고 안을 살펴봤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딸기 맛 아이스크림은 팔고 있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냉동고에 계속 매달려 있었다.
한참을 살펴봐도 보이지 않자, 포기하고 몸을 돌렸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지나갔다.
이솜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번쩍 들었다.
"김도준!"
이솜의 목소리를 들은 도준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저 앞에서 편한 차림의 이솜이 신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도준은 한 걸음에 이솜에게 다가갔다.
"저를 다 부르시고, 웬일이에요?"
"아- 그냐앙.“
"……쌤 술 마셨어요?“
"티나?“
"그냥 조금."
도준은 평소와 다르게 풀어진 모습의 이솜을 보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솜은 힘이 빠지는 다리 때문에 냉동고에 엉덩이를 기대고 있었다.
도준이 이솜을 데리고 편의점 앞 의자에 앉혔고 도준은 그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아래에서 이솜을 올려다보니, 이솜은 입을 꾹 다물고 도준을 내려다 봤다.
"술은 왜 마셨어요? 쌤 술 안 마시지 않나."
"어! 내가 술 마시는지, 안 마시는지 어떻게 알아?"
"……그냥 어디서 들었어요."
부장 선생님이 이사장인 할아버지에게 보고 할 때, 옆에서 몇 개 주워 들은 도준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이솜의 시선을 피했다.
이솜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도준을 뚫어지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