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쌤. 담배 피웠어요?“
"응? 아- 냄새 많이 나?“
"조금요."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수혁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태범은 머쓱한지 머리를 털었다. 가게 앞에선 아이들이 모여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형. 우리 코노 가자. 노래하는 남자 신곡 나왔어. 겁나 좋음."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
“넌 물어볼 필요도 없어서. 어차피 올거잖아.”
“인정.”
도준은 모두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고 초코맛 아이스크림과 딸기맛 아이스크림 두개를 남겼다. 어떤 걸 더 좋아할까,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며 환하게 웃음 짓는 이솜을 생각하니 가슴에 몽글몽글한 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 때, 이솜이 멍한 표정으로 식당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자신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뜬다. 아, 저런 모습마저도 너무 귀엽다. 단단히 콩깍지가 씌인 도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
어쩌다 보니 수혁과 이솜. 둘이 함께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수혁은 학교에 놓고 온 것이 있어 가야 했고 이솜은 학교 근처에 살고 있으니. 그 것 뿐이었다.
"학교생활은 어때?"
이솜이 매-우 선생님 같은 질문을 던지니 수혁은 잠시 고민 했다.
도준이 형 덕분에 학교 다닐 맛이 나요 라고 대답하기엔 도준이 무슨 일을 하느냐 물어 볼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고 3 생활이 힘들다고 말하기엔 방금까지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왔다. 고뇌에 빠진 수혁의 표정을 본 이솜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노래방에 가자고 했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괜히 눈시울을 붉혔다.
"그냥 그래요."
결국 좋은 대답을 찾지 못한 수혁은 정말 중2병스러운 대답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크큭- 내 오른손엔 흑염룡이 살고 있으니, 어이 선생- 당신 앞가림이나 잘 하시지?' 하며 이죽대야만 할 것 같았다. 이솜은 자기도 모르게 재생되는 수혁의 중2병 모습에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아까 밥값 얼마 나왔어? 네가 샀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학생한테 얻어먹는 선생님이 어디 있어?“
"아……."
수혁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거 제가 낸 거 아닌데요. 라고 말 할 뻔 했다. 슬쩍 이솜을 보니 수혁에게 대답을 듣지 않으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수혁은 뒷목에 손을 가져가 댔다.
"저 돈 많아요."
…….
음, 정말 중2병이 맞나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생각한 이솜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찰나를 캐치한 수혁은 선생님에게 내가 쌓아온 개구쟁이 같은 이미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런데.“
"저한테 돈 안 주셔도 돼요."
왜냐면 도준이 형이 냈거든요. 뒷말을 삼킨 수혁은 재빨리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도준과 이솜의 연결점이 더 추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수혁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답답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수혁은 자신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이는 이솜의 눈을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사실.“
"응?“
"밥 값 제가 낸 거 아니에요.“
"뭐?!"
이솜은 놀랐다. 분명 종업원은 누군가가 계산을 했다고 하고 나와서 물어보니 태범이 낸 것도, 그나마 가능성이 있던 도준이 낸 것도 아니고 수혁이 냈다고 해서 안심하고 이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녔는데……. '먹튀'라는 생각이 들자 저번에 갔던 파출소가 생생히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 뉴스에 '학생들과 식당에서 먹튀 한 선생 검거' 라는 헤드라인으로 대서특필이 되는 장면이 하나씩 떠올랐다. 해괴망측한 상상으로 점점 굳어지는 이솜의 표정에 수혁은 결국 실토했다.
"도준이 형이 냈어요, 밥 값.“
"……응?“
"하- 그러니까. 음-"
수혁은 어떻게 말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냥 직구로 '김도준이 한이솜 당신을 좋아합니다.' 라고 말 하면 '하하하하 학생이 어딜 선생님을 넘보니?'라며 홈런으로 받아 칠 것만 같았다. 한참을 끙끙대며 고민하던 수혁은 걸음을 멈추고 이솜을 내려다봤다. 모 아니면 도. 어차피 내 연애사도 아닌데 뭐 어때 라는 심각하게 이기적인 마음이 튀어나왔다.
"도준이 형이 그렇게 말 하라고 시켰어요. 이유는 몰라요."
하지만 하루 종일 우울해 하면서 제가 물어보는 모든 말들을 씹어 삼킬 도준을 생각하니 오한이 서려 직구 계획을 물리고 커브로 돌렸다. 수혁은 이솜이 눈치 채 주길 살짝 기대했다. 하지만 이솜은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유를 몰라?“
"네.“
"흠-"
이솜은 혼자 팔짱까지 끼며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도준과 많이 가까워지긴 했다. 선생님에게 많이 칭찬도 받고, 제 할 일도 척척 하고. 공부도 잘 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다가 완벽한 얼굴과 피지컬. 그런데 이 정도 이유로 밥값을 대신 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것도 선생님에게!
"정말 몰라?“
"아니, 네……."
수혁은 순간 '아니요' 라며 모든 것을 떠벌릴 뻔 했다. 자신이 입이 싼 사람이 아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솜이 들어갈 골목 쯤에 다다르자 수혁은 내일 보자며 잽싸게 학교를 향해 뛰었다.
이솜은 골목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를 정말 모른다고? 이솜은 의심스러운 마음을 간직한 채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몸이 녹아드는 것 같은 느낌에 밥값의 생각은 지우기로 했다. 어차피 누구에게 물어봐도 진실을 듣긴 어려울 것이기에.
-
[20XX년 4월 XX일 날씨 맑음
이태범의 첫 수업 시연. 나도 잘 하는 건 아니지만 태범이의 수업은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도 집중을 잘 하는 것을 보니 몰입감도 있는 듯.
근데 김도준이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딴 짓을 했다. 메롱 까지 해서 꿀밤을 주고 싶었지만 귀여워서 머리카락만 살짝 잡아 당겼다. 귀여워? 그래, 귀엽지. 우리 반 애들.]
*
수혁과 이솜이 함께 학교로 돌아가고 도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학교에 뭔가를 놓고 온 사람이 수혁이 아니라 자신이었어야만 했다. 빼앗고 빼앗길 관계도 아닌데 뺏긴 느낌이 들었다. 한터와 재하는 살 것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고, 도준, 기찬과 태범이 코인 노래방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태범은 어색한 자리에 집으로 가고 싶었으나, 나름 교생으로서 아이들이 탈선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얘들아, 또 어디 갈 거야?“
"글쎄요. 딱히 할 건 없으니까 집에 갈까 생각중이에요."
태범의 질문에 기찬이 먼 곳을 바라보며 대충 대답했다. 정말 할 게 없었다. 특히 태범이 함께 있는 이상 도준과 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태범은 기찬의 말에 숨이 한 층 트였다. 이제 도준만 집에 가겠다고 하면 아무 걱정 없이 집에 돌아 갈 수 있으니! 하지만 태범의 기대와 달리 도준은 아무 말도 없었다. 기찬은 태범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도준을 툭 치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도준은 오도카니 서서 제 앞에 있는 태범을 바라봤다.
"도준이 너는 집에 안가?"
도준은 제발 집에 가라, 하는 태범의 눈빛을 읽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도준은 입꼬리를 올려 매력적으로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뭔가 싸한 느낌을 받은 태범은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도준이 한 발 빨랐다.
"저 쌤한테 상담 할 게 있어요.“
"사, 상담? 상담은 나보다는 솜 쌤이 더…….“
"아니요. 꼭 선생님한테 상담 받고 싶어요.“
"……그래? 그래, 그럼 가까운 카페라도 가서 얘기하자.“
"네, 쌤."
잘생긴 청년 둘이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태범은 그 시선을 느껴서 최대한 빨리 걸었지만, 도준은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태범을 따라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서 음료를 주문하고 트레이에 받아 온 태범은 도준이 앉은 자리로 갔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도준과 태범의 앞에 하나씩 놓였다. 태범은 속이 타는지 아메리카노를 국밥 마시듯이 시원하게 들이켰다. 도준은 컵 안에 들어 있는 빨대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그리고 속내를 툭 내 뱉었다.
"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컥, 쿨럭- 뭐, 뭐? 남고잖아!“
브레이크 따위 없는 매우 돌발적인 도준의 말에 태범의 식도로 넘어가던 아메리카노가 기도로 역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준은 그 모습을 보고 질린다는 표정으로 냅킨을 건네주었다. 냅킨을 받으며 입 주변을 닦은 태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잘생긴 학생이.. 그렇고 그런..? 태범은 혼란스러웠다. 태범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귀를 쫑긋하며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 덕분에 살짝 소란스러웠던 카페 내부는 정적을 찾았다.
카페에선 카페 점장이 최애하는 '내 이름은 김삼순'의 타이틀 곡이자 커밍아웃 곡으로도 유명한 She is 가사 중 [숨겨 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 네게 줄게]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준은 지독하게도 어그로 장인이 되어버린 태범을 한대 갈기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상황에서 사실을 말 한다 한들, 수습이 될까 생각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사실을 말 하긴 해야 했다.
"좋아하는 사람 여자에요."
저 잘생긴 사람이 앞에 앉은 귀여워 보이는 남자 좋아 하나봐. 어머, 선생님이랑 학생 관계인가? 쑥덕거리던 소리는 도준의 낮은 목소리에 아쉽다는 듯,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 아- 아, 진짜 미안. 오해 했다……."
태범은 아메리카노가 묻은 턱을 닦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스산하게 말 하는 폼이 제대로 화가 난 듯 했다. 아메리카노 말고 파르페로 살 걸 그랬나. 태범은 눈치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궁금증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런데 좋아하는 여자애가 왜?”
“여자애……?”
“여자애지. 학생일 거 아니야. 어디 학교?”
도준은 태범의 1차원적인 생각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나름 계획이 있던 탓에 그 기분을 감추고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수줍게 웃었다.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거짓이었지만. 태범은 도준의 웃음에 제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저렇게 잘 생긴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으니 여자애를 어지간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태범은 괜히 흐뭇해져 아빠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있는데요.”
“응, 있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 같아요.”
“헐, 진짜?”
태범은 경악했다. 아니, 얼마나 예쁘길래 인기가 많은거지? 순간 생각나는 얼굴에 홍조가 올라올 뻔 했지만 도준에게 집중을 한 태범은 혀를 쯧쯧 찼다. 도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여자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의 이마에 딱밤을 날려주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표현을 많이 못했는데, 뺏길까 봐 불안해요.”
“그럼 표현을 많이 해야지!”
“그 사람은 저를 남자로 안 보거든요.”
“저런……. 아, 그러면 그 여자애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을 견제하는 건 어때?”
“……, 어떻게요?”
도준은 태범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태범은 도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반짝이며 말 했다.
"음, 나였으면 그 남자한테 붙어서 서로 만날 접점을 안 만들 것 같아."
도준은 콧소리를 내며 아메리카노를 한번 쭉 들이켰다.
"내가 그 남자였다면 기분 겁나 나쁠 것 같거든. 그리고 더럽고 치사해서 포기하겠지."
태범은 어깨를 으쓱이고 반 이상은 사라진 아메리카노를 바라봤다. 도준은 태범의 여유로운 말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요?”
“그럼.”
“그럼 그렇게 해도 돼요?”
“왜 나한테 물어봐? 그 남자애한테 본때를 보여줘. '이 여자는 내가 먼저 찜한 여자다!' 이렇게.”
건투를 빈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범을 보고 도준은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와하하- 웃는 소리에 카페 안에서 도준과 태범을 힐끔거리며 몰래 쳐다보고 있던 여자들은 아예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켰다.마냥 냉하게 생긴 미남인 줄로만 알았는데, 웃는 모습을 보니 햇살처럼 따뜻했다. 왜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는지 직접 보니까 알 것 같았다. 아, 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있다고 말 안 했으면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번호를 땄을 텐데- 한 마음으로 아쉬워하는 여자들 틈에서 용기 있는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라는 결심으로.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는 곧바로 도준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하- 네?”
도준은 옆에서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웃음을 가까스로 멈추고 그 여자를 올려다봤다. 여자는 도준의 눈길에 순간 숨을 멈췄다. 바로 목표를 상기시키고 정신을 차린 여자는 눈을 예쁘게 한껏 접으며 도준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번호 좀 주세요, 제 스타일이시라서요."
여자는 앞으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수줍게 넘기며 말 했다. 주변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여자 엄청 예쁜데 좋아하는 사람 있어도 번호는 주지 않을까?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겠지.
웅성거리는 소리에 태범이 인상을 찌푸렸고, 도준은 여자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때 태범이 여자에게 말 했다.
“저기요, 앞에 있는 이 분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