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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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여자는 손이 차다. 그리고 엷게 살이 비치는 슬립 원피스도 차갑다. 나는 얘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연습해둔 남자 말투로 말할 작정이다. “이제 출근했나 보네?” 나는 얼굴을 들지 않고 양주를 한 잔 따라 그녀에게 밀며 묻는다. “네. 방금 병원에 있다 왔거든요.” “어디 아파?” “아뇨. 아프면 이런 데 못 나오죠. 제 남친이 중환자실에 있거든요.” “남친이 중환자실에?” “말기라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서 요즘은 매일 병원에서 사다시피 하거든요. 휴~” “착한 아가씨네. 남친이 시한부인가 보네요?” “도사시네요. 길어야 한 달이래요. 흠.” 약간 울먹이듯 시작하는 말투. 얘, 손님에게 동정심을 일으켜 앵벌이를 시작하려나 보다. “남친은 어떻게 만났는데?” “같은 보육원 출신이에요. 의지할 데가 없어, 형제자매처럼 의지하며 세상을 이겨냈죠. 하지만 보육원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잖아요? 나이 제한이 있으니까요. 막상 나와서 자립해야 했을 때가 힘들더라고요. 늘 보호만 받던 울타리에 이미 익숙해졌어요. 둘 다 사회 경험이 없었죠.” “알에서 갓 깨어나 세상에 버려진 새들처럼?” 나는 독문학과가 아니더라도 다 아는 헤르만 헤세의 ‘알’의 존재론까지 들먹인다. “네. 보육원 졸업생들 자립프로그램이 있다지만, 늘 보호막 같은 곳에 살다가 나와,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세상에 적응하기가 그리 쉽지 않거든요. 정신적 공황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해요. 처음에 전 광장 공포증 같은 것도 생겨서 힘들었고요.” “광장 공포증까지... 이런 밀실은 어떠세요?” “밀실 공포증은 없어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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