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연지가 맥주잔에 맥주를 가득 따른다.
이제 양주가 가득 든 작은 잔이 커다란 맥주 잔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연지의 결정적인 질문에 나도 얼굴이 화들짝 놀라고, 숨이 막히며 가라앉는 것 같다.
뽀글뽀글.
“으응?? 곧 벼 병사 식당으로 옮긴다는 뜻이었어. 내 특기가 짬밥이거든.”
사람이 아무리 누군가를 속이려고 해도,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놀게 된다. 이래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제대로 못하나 보다.
‘내가 아직 군대 안 갔다는 사실과, 독문학 관련인 걸 어떻게 알아낸 걸까? 얘가.’
설마 내가 학군사관, ROTC인 거까지는 모르겠지. 그것도 여자대학교.
“자 그럼 오빠 벌주부터 죽 들이켜~ 안주는 내가 챙겨줄 테니까.”
난 잘 하지도 못한 벌주를 들이켜야 했고, 연지는 좋아라 손뼉을 치고 나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스무고개 게임을 두어 번 하면서 나는 계속 지기만 한다.
폭탄주 세 잔째는 연지가 대신 마셔주어 내가 한 잔 빚을 진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있는데,
“형님. 시간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지 씨는 다른 데서 손님이 급 찾네요.”
카운터남이 들어와 있네.
시간을 더 연장하고 싶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넹.
카드 한도에 걸리면 연지 앞에서 자존심을 구기게 될 것이 뻔하다.
아쉬워도 여기까지만.
“오빠. 잘 가요. 난 또 가봐야 해서.”
연지가 먼저 방을 나선다. 너무 아쉽네.
나는 뒤늦게 노래방을 나온다.
다시 그 골목이다. 이제는 밤이 깊다.
인기척에 뒤돌아 본다.
흰색 긴 점퍼 차림 여자가 아까 그 노래방 입구에서 빠져나온다. 흰색 재규어 차로 들어간다.
뒷좌석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렇다면 여자는 재규어 운전자와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란 뜻이다.
“쟤?”
어둠 속이지만, 측면 거울에 얼핏 떠오른다.
금세 옷을 갈아입었나. 다른 곳으로 막 이동하려는 재규어에 올라탄 여자는, 연지 같다!
그 빠져버릴 듯한 커다란 눈망울과 라면 발 같은 머리카락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규어 안에서 ‘언니들’처럼 화장을 고치고 있다.
‘안녕.’
왜 이리 쓸쓸하지. 즐겁게 놀았으면서. 써버린 돈이야 다시 몸으로 때워 벌면 되는데......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쓸쓸함이네.
거기에다 취기까지 쌓여 나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대화를 이어갈수록 즐거웠었는데.
대화도 너무 잘 되고, 춤을 출 때는 고혹, 섹시, 요염하기까지 한 연지.
그 하룻밤에 빠지고 말았나 보다 나는.
화류계 여자들이 더 마력적으로 보이고, 그녀들에게 오히려 더 맥을 못 추는 이들이 있다더니. 딱 내가 그 짝이잖아.
숙취가 겨우 풀리기 시작한 다음날 아침이다.
수업은 교양밖에 없으니 오늘 학교는 째야겠네.
저녁이 다 되기까지, 침대 속에서 연지만 생각난다.
생각은 다시 잠으로 이어지고, 꿈은 다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형님, 시간 다 되었습니다.’
헐. 이제 카운터남의 목소리까지 환청으로 들리네.
이제 연지에 대한 생각을 끊어야겠다. 어쩌다 남장여가 돼버린 희극 드라마 단역일 뿐이었다고. 어차피 하룻밤 인연일 뿐인걸.
벌써 저녁 여덟 시이네. 내일은 수업이 꽉 차 있다. ROTC 군사훈련 평가 대비, 훈련도 있는 날이다.
나는 맹물만 한 컵 들이켜고 점퍼를 걸치고 저녁 알바 집으로 향한다.
방값을 벌기 위해선 심야 알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안이 비교적 좋은 원룸에서 살기 위해, 잠도 못 자고 힘든 심야 알바를 해야 하다니. 뭔가 이율배반적인 것 같다.
그래도 학교 바로 앞, 오피스텔들에서 자취하는 얘들에 비하면 방값이 싸다. 이삼 십 만 원이라도 싸서 다행이라고 위로한다.
걔들은 부모를 잘 만나 관리비 포함 백만 원 가까운 오피스텔에 살고 있지만, 난 그럴 형편은 못 되잖아.
그래서 내가 거주하는 원룸은 학교가 있는 동네에서 한 길 건너이다. 학교 강의실까지 십 분 거리. 외노자들이나 가난한 외국 유학생들도 많이 사는 구질구질한 구 주택가이다. 재개발지역을 간신히 피한 비탈진 동네이다.
새벽에 편의점 물건을 하차시켜 안으로 들이고 목록을 정리할 때가 제일 힘들다.
이래서 보통 심야 편의점 알바는 남자들이 하는데, 시급이 높아 내가 자원한 것이다.
딸랑!
진한 분 냄새를 풍기며 여자가 들어온다.
척 봐도 사거리 비즈니스 룸에서 근무하는 여자란 걸 알 수 있다.
결국은 꿀 음료 하나 사기 위해 오 분이나 편의점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간다.
‘걔도 저러고 있을까?’
연지 말이다.
연지도 단골손님에게 꿀 음료라도 갖다 주기 위해, 편의점을 들락대고 있을까.
저런 비즈니스 룸에서 근무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진 않을 거야.
그럼,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숙취해소 겸 꿀 음료라도 사먹기 위해 편의점을 기웃거리고 있을까.
새벽 세시 반이다. 그녀는 아직 한참 손님을 받고 있을까.
그렇게 요염하고 귀엽기까지 한 어린 애가, 낯선 남자들 비위나 맞추고 있다고 생각하니 분이 난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누구는 이십 대 초반에 ‘소녀 가장’이 되어 동생들과 어머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접객녀 알바를 해야 하고, 누구는 부모를 잘 만나 이 시간에 공주 침대에서 단꿈을 꾸며 편안한 잠에 빠져 있겠고, 누구는 이런 데서 심야 알바를 하고......
아니지. 적어도 연지, 걔의 처지만큼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고 처음부터 금수저를 달고 나온 게 그들 자신의 선택이나 잘못은 아니잖아.
연지, 걔가 지금 누구와 뭐를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딱 한 번 만나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스무고개를 한 서로 뜨내기들일 뿐인데.
아니, 나 지금 질투하는 건가.
사거리 비즈니스 룸 여자가 오 분을 헤맨 끝에 그래도 하나라도 사서 가니 다행이다.
들어와서는 십 분 정도 매대를 기웃거리다 물건은 하나도 사지 않고, 선발만 어질러 놓고 가는 민폐 유형들에 비하면 괜찮은 축에 속한다.
이 시간에 고프지 않던 배가 고프다.
난 무언가 결핍증에 시달리는 듯하다.
괜시리 달력을 본다.
어제, 아니 열 두 시가 지났으니, 연지란 얘를 만난 지 이틀이 되네.
달력을 보며 이런 걸 계산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달력을 보았더니 또 방값을 내야 하는 날짜에 눈이 박힌다.
아르오티시 전용 기숙사가 있지만, 숨이 막히는 기숙사 생활에 적응 못해 나는 따로 방을 얻어 나온 것이다.
쳇. 방값을 내야하는, 이런 날은 늘 빨리 돌아온다.
하지만 이번 주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날이다.
이틀 전, 하룻밤에 삼십만 원이나 써버려 카드현금대출로라도 방값을 낼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정 힘들면 결국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게 된다. 하지만 용돈과 방값만큼은 부모님께 짐을 지워드리긴 싫다.
아직은 건강한 몸으로 스스로 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