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흐흐. 아빠는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어요. 흑.”
“어머. 초등학교 사학년이었겠다. 아빠한테 한참 사랑 받을 나이잖아.”
“흑흑. 여자애는 혼자라서 절 동생들보다 예뻐하셨는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환까지 겹치시고,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 병은 악화만 되셨죠. 전 초등학교인 그때부터 알바를 했어요. 살기가 좀 팍팍해야죠. 흐흑.”
이런 데 나와서 돈을 벌어야 하는 연지가 이해가 된다.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아야했을까.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구나. 연지야.”
“그러게요 오빠. 흐흑. 하지만 전 한 번도 세상을 원망한 적은 없어요.”
‘이런 곳에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뒷바라지해야 하는데요?’
나는 속으로 묻고 있다. 하지만 직업적인 질문은 할 수가 없다.
나는 또 지갑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동생들하고 맛있는 거 사먹어라.”
“헛 오빠. 오천 원, 아니 오만 원이네. 이러지 않아도 돼요. 오빠. 초이스 해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받아 둬. 다시 들어간다.”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오빠 서비스로 노래 하나 불러줄까?”
“그래? 근데 난 취향이 구려서. 노래 아는 것도 별로 없거든.”
난 음치에다 몸치이다.
“오빠, 블랙핑크가 좋아해?”
“좋아는 하는데... 혹시 마마무 거 부를 줄 알아.”
“마마무를 **하는 오빠는 오빠가 처음이야.”
오빠들이 좀 많나?
하기야 노래주점 도우미라면, 대부분 남자손님들만 상대하겠지.
슬쩍 질투심이 인다.
연지가 일어나서 마마무를 부른다.
저 간들거리는 머리카락과 가슴과 허리의 유연한 곡선, 넓지 않지만 단단히 잘 모아진 엉덩이, 그리고 우윳빛으로 탐스럽게 빠진 두 다리.
노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 채 그녀의 뒤태에만 넋이 나가 있다.
연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양주를 홀짝인다.
눈이 돌고 머리가 핑핑 돈다.
내가 왜 이러지?
연지에게 취해 버린 걸까, 양주에 취해 버린 걸까?
시선을 의식했을까.
연지가 돌아서서 나의 손을 잡고 일으킨다.
“오빠 멋대로 골라,
입술 가슴 모두 히입.”
가사 바꿔 부르기까지?
연지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며, 내 앞에서 요염하게 머리와 가슴, 허리를 흔든다.
연지는 마성적인 요부처럼 변해 유혹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녀의 유혹을 이길 수는 없다.
나는 연지의 뒤로 가서 연지의 허리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인다.
“가만.”
연지는 피하는 척 하다 그대로 있다.
난 몸치이지만 연지는 클럽 댄서 같다. 이렇게 리듬을 잘 타다니. 노래는 물론, 춤도 수준급이다. 난 음치, 몸치지만 얘는 음악적으로 선천적 재능이 있나 보다.
“오빠 여기까지만.”
노래가 끝나고도 내가 계속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자, 연지가 내 손을 잡아 살짝 치운다.
내 손에 남아 있는 부드럽고 파도처럼 매끄러운, 연지의 살결 느낌.
손에 불이 난 것 같다.
“어 그렇지.”
“우리 게임해요.”
연지가 나를 두 손으로 잡아 자리에 앉힌다.
“무슨 게임할까?”
“오빠에 대해 알아맞히기 게임.”
자꾸 오빠라고 하는 게 거슬리지만, 이제 그냥 언니라고 알아듣자.
“조, 좋아.”
“스무 고개인데, 내가 오빠가 뭐하는 사람인지, 세 번째 이내에 알아맞히면, 오빠가 폭탄주 한 잔, 못 맞히면 내가 한 잔. 어때?”
“좋아. 여기 캔맥주도 서비스로 들어와 있네. 하지만 난 폭탄주 잘 못하는데?”
“안 돼. 이 방에선 내가 규칙을 정할거야 호호.”
아니, 넌 서서히 내 마음을 사로잡더니 이제 주인이고 법인걸.
“아, 알았어.”
“무조건 시작한다. 오빠 나이부터. 스물다섯이지?”
“아니. 그보다 쬐끔 아래... 한 살 아래.”
사실은 스물 셋이다.
“그래? 생각보다 어린데 능력자네. 이런 데 와서 혼자 술을 다 먹고. 집이 부자인가?”
“우리 집 부자랑은 아주 거리가 멀어. 평범하기 그지없어. 그것도 질문에 해당돼?”
“아니. 그럼 두 번째 질문. 군대 안 갔다 왔지?”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곧 갈 건데.”
스물 넷 남자라면 대부분 군대에 가 있거나, 갔다 온 경우가 더 많을 텐데? 갔다 왔다고 맞히기가 더 쉬웠을 텐데. 왜 이렇게 물었을까?
뜨끔하다.
어쩌다 남장 여자가 돼 버린 상황에서 얘에게 여자로 들통이 날까봐.
여자가 여자 도우미를 불러 술을 마시고 애정 행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니. 얘가 알면, 이 집에서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겠네.
얘를 다시 만나고 싶은데 말이야.
이런 데서 만난 여자를 어떻게 다시 만나?
이게 마지막이겠지.
“그런 게 있어. 내가 손님들을 많이 만나 봐서. 관상을 좀 볼 줄 알거든.”
그러며 내 얼굴로 커다란 눈을 바짝 들이대고 뜯어본다.
개구쟁이 같은 눈빛이다.
어떻게든 폭탄주를 먹이고 말겠다는 심보이다.
얘의 목에서 풋풋한 초여름의 과일향이 난다. 이 냄새 뭐더라... 미치겠다. 얘의 입술을 먹고 싶다.
나 떨린다고, 저리 얼굴 좀 치워.
만질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난 그날 밤 네게 포획되어 버린다.
“자기, 벌써 두 번째 질문은 통과했어. 마지막 한 번이면 끝난다고. 음...”
이젠 자기?
연지는 무슨 결정적인 질문으로 나를 넉다운 시킬까 고민하는 모습이다. 넘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다.
“자기, 손을 줘봐.”
나는 손을 살짝 내밀었다.
“자기, 아직 학생이지? 그것도 독일어 관련 대학생이고 군대를 가야 하는.”
어, 어떻게 알았지?
얘가 신통하네. 난 놀라 뒤로 넘어질 것 같다.
난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뺀다.
나 독어독문학 전공이다.
“아 아냐. 난 대학 구내식당 영양사야. 음식을 많이 만들어 손이 좀 거칠지. 하지만 대학에서 일하고 군대를 가야 하니까... 맞춘 걸로 해줄게.”
“맞춘 걸로 해주다니, ‘맞힌 거지.’”
내가 맞춤법이 틀렸음을 지적하는 걸까. 어문학을 전공하는 주제에, 대학 문턱도 못 가봤다는 요 알바보다 맞춤법을 모르다니.
얘, 세상물정 몰라 뵈는 도우미치곤 꽤 유식하네.
연지가 맥주병을 들고 흔든다.
“자 그럼 벌주 들어가시겠습니다. 자기야, 근데 왜 군대를 가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