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안녕, 헬레네

2058 Words
안녕, 헬레네.   엄마는 마치 친구와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듯 그렇게 말하고 나를 떠났다. 하늘로 갔는지 땅으로 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원하는 대로 가버리라지. 엄마의 죽음으로 내가 얻은 것은 왕립학교 ‘트리니카’의 입학권, 그리고 아주 조금의 재산이었다. 엄마가 그립지는 않았지만 가끔 생각은 났다. 하는 것 없이 놀고 먹느라 재산이 동이 났을 때라든지, 명문 트리니카에 입학하는데도 배웅을 와준 사람이 없을 때였다. 내 불행 같지도 않은 불행이 날 집어삼키기 전에 새 학교에서 열심히 친구들을 사귀었다. 아비게일, 알레샤, 카터… 그리고 데일. 그리고 그 모두를 잃었다. 아비게일은 절벽 위에서 구른 바위에 깔려 죽었고, 알레샤와 카터는 그 모습을 보고 심장마비로, 아리따운 데일은 하늘을 보고 목놓아 울다가 수분이 다해 말라죽었다. 그는 죽기 직전 나를 향해 핏발 선 눈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너의 곁엔 평생 아무도 없을 거야. 안녕, 헬레네.”   아침 햇살에 반투명한 커튼이 나풀거렸다. 그 끝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통해 미간을 찡그리던 헬레네가 반짝 눈을 떴다. “또 이런 꿈.” 헬레네의 꿈 내용은 대부분이 같은 내용이었다. 장소와 시간만 다를 뿐 그는 언제나 친구들을 전부 잃고 마지막에 데일의 저주를 받으며 잠에서 깼다. 꿈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무의식의 반영이었나? 헬레네는 고개를 갸웃 하다가 그대로 목을 돌려 스트레칭을 했다. 뻐근했던 관절이 물렁하게 펴지는 느낌이 헬레네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이곳은 왕립 트리니카 고등학교의 여자 기숙사. 헬레네의 방은 4층 높이에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한 몇몇 학생이 사복 차림으로 아침운동을 즐겼고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밥을 찾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평화롭게 울렸다. 자신의 것이 아닌 평화에 기대어 헬레네는 한껏 아침 공기를 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하품을 하고 나서 서랍으로 가 주섬주섬 목욕 바구니를 챙겼다. 오이 향이 나는 비누. 4층의 욕실에서는 유일하게 헬레네만 쓰는 제품이었다. 오전 수업이 시작될 무렵, 헬레네는 식당에서 나와 본관 건물로 향했다. 말끔한 교복 차림과는 달리 민들레 홀씨 같은 짧은 곱슬머리는 사방을 모르고 뻗쳤다. 툭, 누군가 어깨를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긴 머리가 비단같은 아비게일이었다. “안녕? 오늘도 머리 이상하네.” 헬레네는 그를 향해 평범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비게일. 좋은 꿈 꿨니?” 아비게일이 눈을 맞추며 미소지었다. “재수 없게. 내 이름은 언제 안 거야?”     -     데일은 맨 뒷자리에 앉은 헬레네를 흘끔 쳐다보았다. 헬레네는 한 번을 지각한 적도 숙제를 빼놓은 적도 없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선생들은 그를 문제아로 점찍어 놓은 모양이었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헬레네를 조금만 관찰하면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반격 의지가 없었다. 카터가 준비물을 훔쳐가도, 알레샤가 죄없는 헬레네를 ‘떠든 사람’목록에 집어넣어도, 아비게일이 매일같이 잡다한 방법으로 그를 골탕먹여도, 헬레네는 큰 두 눈동자에 무기력함을 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야, 헬레네. 등에 뭐 붙었다.” “으악! 엄청 큰 투구벌레야!” 알레샤와 카터였다. 그들이 손 감옥 안에 소중히 모셔 온 투구벌레를 헬레네의 등에 올려놓는 장면을 데일은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헬레네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헬레네. 벌레라니까? 벌레 안 싫어하냐?” “쯧… 카터, 됐어.” 표독하게 얼굴을 구긴 알레샤가 한 손으로 투구벌레를 집었다. 그리고 헬레네의 정면으로 돌아 그의 얼굴에 벌레를 세차게 던졌다. 헬레네의 무릎 위에 뒤집어져 잠시 기절했던 투구벌레가 곧 정신을 차리고 웅장한 날개를 폈다. 이윽고 비상한 투구벌레가 온 교실을 휩쓸며 날아다녔다. 꺄아아악- 으아악-! 교실이 난장판이 되고 몇몇 아이들은 알레샤와 카터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미친 놈들아 적당히 좀 해!”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담임선생은 막대기로 교탁을 내리쳐 교실을 잠재우고는 곧장 헬레네를 불러세웠다. “또 너니? 흉측한 벌레가 날아다니는데 혼자 평화롭게 책이나 읽던 꼴을 보니 확실하구나. 기숙사로 돌아가라. 오늘 너에게 가르칠 것은 없으니.” 헬레네가 가방에 책을 넣고 교실 뒷문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아무도 그의 해명을 대신해주지 않았다. 범인이 알레샤와 카터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지만 성질이 벌레보다 흉측한 담임선생 앞에서 본인도 하지 않는 변명을 대신해줄 만큼 그와 친한 아이는 없었다. 헬레네는 그만큼, 친구를 사귈 줄 모르는 애 같았다. 데일의 눈에 그는 괴롭힘을 당할 때가 아니면 언제나 혼자였고, 주위의 아이들이 떠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칠판을 열심히 쳐다보고 쉬는 시간에는 책을 보았다. 그게 다였다. “데일. …야, 데일!” 앤서니가 생각에 빠져있던 데일의 주의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야.” 앤서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귀여운 빨간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깐 진짜 걔네 심하지 않았냐? 교실에 벌레를 들고 오다니. 그리고 헬레네도 말야. 아니라고 반 애들한테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우리가 본 대로 말했을텐데. 한 마디 없이 기숙사로 가더라.” “그러게…” 데일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사람을 안 믿는 애일까? 헬레네는.” 그러자 앤서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알 게 뭐야? 자기가 그러고 싶나 보지.” 상냥하던 친구의 냉랭한 말에 데일은 가슴 한 구석이 쓰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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