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러지…’
다시 생각에 빠진 그 때, 앤서니가 왜인지 새파래져서 데일을 또 불러댔다.
“아이 참, 또 왜 그러는데?”
“너… 네 어깨에…”
데일은 어깨까지 오는 금발의 끄트머리를 무언가가 툭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담임이 교실에 들어왔다 간 동안 어딘가에 사라져 있던 투구벌레가 운 나쁘게도 데일의 어깨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데일은 벌레의 코끝이 뺨에 닿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앤서니 이거 어떻게 좀 해 줘!”
그러나 앤서니와 주변 학생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좀 기다려 봐, 이거… 아악! 너무 커서 못 만지겠어!”
“제발 앤서니! 우린 친구잖아!”
“친구가 왜 나와! 나도 무섭단 말야!”
벌레가 발 끝으로 데일의 하얀 목을 어루만졌다. 데일은 경기를 일으키다가 벌레가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일까봐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
“데일, 가만히 있어.”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살짝 차가운 손등이 데일의 뺨에 닿았다가 투구벌레를 조심스레 쥐고 떨어졌다.
아직 얼어있던 데일은 뒤에 서 있는 학생이 아무 말 없이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홱 고개를 돌렸다. 두 손을 위아래로 투구벌레를 잡은 헬레네가 교실 뒷 문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헬레네……?”
데일이 어벙벙한 얼굴로 텅 빈 뒷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켜보던 학생 하나가 떠들었다.
“야, 쟤 벌레 그냥 잡는 거 봤지? 강하다. 알레샤랑 카터 급이야.”
“그러게. 근데 왜 아깐 가만히 있었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헬레네는 정말 알 수 없는 소녀였다.
“데일… 괜찮아?”
데일은 그제야 앤서니를 돌아보고 살짝 웃어보였다.
“미안. 나 벌레 진짜 무서워해서. 근데 헬레네 좀 다시 봤다?”
친구의 말에 잠자코 있던 데일이 수줍게 한마디했다.
“나도.”
학교의 뒤뜰은 숲이 이어져 있었다. 학교 근처는 돌길과 표지판으로 꾸며졌지만 깊은 숲으로 들어갈수록 키큰 나무들만이 울창했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 헬레네는 숲길의 끄트머리에서 살며시 두 손을 열었다. 손바닥만한 투구벌레가 지친 듯 한동안 움직임이 없다가 이윽고 숲의 냄새를 맡았다.
파르르르-
투명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투구벌레가 숲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헬레네는 미련 없이 기숙사로 향했다. 갈수록 좁아지는 숲길을 거쳐 오느라 말끔하던 교복에 풀씨와 물기가 묻어버렸다.
“세탁실로 가야겠네.”
헬레네가 아수라장인 교실로 되돌아간 이유는 그저 투구벌레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아는 데일은 누구보다도 벌레를 무서워했다. 그렇지만 타이밍이 그리도 좋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근사하게 벌레를 떼어줬으니 조금은 호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헬레네는 생각했다.
꿈 속에 나오는 아이들이 어째서 그들인지는 헬레네도 알지 못했다. 다만 입학 첫날부터, 동급생들의 얼굴을 다 알지도 못하던 때부터 시작된 꿈이기에 헬레네는 그들과의 접점에 의미를 두는 짓을 그만두지 못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 서서, 헬레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점심은 카페에서 먹어야지.”
결론을 내리고 점심시간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는 기숙실로 돌아갔다. 헬레네의 방이 있는 4층은 꼭대기층이었다. 한 층만 더 올라가면 옥상인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난 주, 옥상이 지저분해진다는 이유로 잠기기 전까지는 그랬다.
401호 앞에 다다른 헬레네는 기숙실 문 손잡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눌러서 여는 손잡이는 조금 헐거운지 가끔 눌려진 채로 멈춰있기도 했다. 헬레네는 그것을 수평으로 맞추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늘 손잡이는 아주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아비게일.”
헬레네가 중얼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기숙실은 마치 푸르렀다 황폐해진 초원 같았다. 벽면과 바닥에 검정색 마카가 칠해져 있었고 서랍 안의 내용물은 바닥에, 이불과 베개는 베란다 난간에 걸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방 가운데로 들어선 헬레네는 자신이 옆방 리세아처럼 햄스터를 키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비게일이 헬레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이로써 잘 알 수 있었다. 작은 동물의 피를 보는 끔찍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헬레네는 조금 마음을 고쳐먹었다. 학교나 식당에서 음식물을 포함한 것들을 뒤집어쓰는 것까진 관대하게 참았지만 자신만의 공간에 침범하는 행위만은 그로 하여금 불쾌감에 휩싸이게 했다.
난간에 걸쳐 간당간당한 이불을 걷는 순간 땅 위에서 올려다보는 아비게일이 보였다. 그 재밌어 죽는 얼굴이 헬레네는 아직도 밉지 않았다. 다만 자신만의 공간에 침입한 것에 대해 답은 해주어야만 했다.
헬레나는 방 가운데로 돌아가 널브러져 있는 것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아침을 깨워주곤 하던 노오란 탁상시계였다. 헬레네가 다시 베란다로 나왔을 때 아비게일은 그가 아예 들어갔다고 여겼는지 돌아서 있었다. 그 뒤통수를 향해 헬레네가 탁상시계를 힘껏 던졌다.
콰앙-!
탁상시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아비게일의 머리칼에서부터 얼굴로 흥건하게 피가 흘렀다. 붉어진 얼굴 사이에서 눈을 부릅뜨고 아비게일이 헬레네를 올려다보았다.
벨렐렐렐렐레-
쉬는 시간의 종이 학교 전체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