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대리운전

3163 Words
서준은 아직도 게임 중이었다. 저 자식이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그는 왜 진작 몰랐을까? 서준은 몇 판 하고 나니 시시해졌다. 그때 여모델 하나가 술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서준, 혼자 노는 거 너무 외로워 보이는데…" "응?" 서준은 그제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옥 같은 얼굴에 뛰어난 골상, 이런 곳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청량함이 느껴졌다. 여모델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듯한 이 귀공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라 보였다. 여자는 옷을 아주 조금 걸치고 있었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여전히 온화하고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모델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술잔을 들고 뭔가 말하려는 순간, 술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청명은 술을 좀 많이 마셨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술잔을 탁자 위에 떨어뜨려 깨뜨리고 말았다. "안 가봐?" 서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모델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귀공자인데도, 그녀는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을 느꼈다. 여모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순순히 가서 청명을 부축했다. "가자." 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명을 흘끗 보며 말했다. "돌아가자." 청명은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같이 놀던 다른 귀공자들은 그가 가는 것을 보고 부축하려고 했다. 정혁은 방금 전까지 어떤 인플루언서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제야 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잘 가." 누구는 가고 누구는 남았다. 어쨌든 다들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사이였다. 정혁은 성격이 가장 포악해서 마음에 안 들면 주먹부터 나갔지만, 의리 하나는 끝내줬다. 하지만 서준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절대 화를 내는 법이 없었고, 누가 도움을 청하면,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리를 뜨지 않은 몇몇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깝다. 오늘 서준은 영 흥이 안 나 보인다.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모였을 때 서준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뭐든지 다 들어줬을 텐데. 청명은 호텔을 나와 찬바람을 쐬자 정신이 좀 들었다. 서준이 아직도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왜 차 안 가져와? 열쇠 내 주머니에…"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어?" 서준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둘 다 술을 마셔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대리…" "핸드폰 배터리 없어." 청명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얼마 남지 않은 2%의 배터리를 확인하더니, 곧 꺼질 것 같자 외쳤다. "젠장!" 올 때만 해도 배터리가 꽉 차 있었는데, 누가 다 써버린 거지? "네 누나…" 서준이 눈썹을 찌푸렸다. 청명은 술에 취해 웅얼거렸다. "내 누나, 맞아, 소희…" 마지막 남은 2%의 배터리가 다 되기 전에 청명은 소희에게 전화를 걸어 주소를 간단히 알려주고는 핸드폰이 방전되어 자동으로 꺼졌다. 그는 머리가 핑핑 돌았고, 그냥 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그는 술은 약했지만 주사는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셔도 화를 내지 않고 그냥 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그의 발을 툭 찼다. "도로 이용료 내는 거 잊지 마." 청명은 욕을 하려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소희였다. 그녀는 급하게 나온 듯 흰 셔츠에 파란색 청바지 차림이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희는 바람에 날아갈 듯 말랐다. 그 순간, 청명은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왜 자신들은 택시를 타지 않고 어린 여자애를 불러 대리운전을 시키는 걸까. 적어도 자신이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충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희을 부르다니! 하지만 그때 그는 머리가 녹슨 것처럼 멍하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왜 택시 안 불렀어?" 소희가 물었다. 청명은 미친 사람처럼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놓고는 끊어버리고, 주소만 달랑 문자로 보냈다. 그녀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그는 그저 술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청명은 머리가 굳은 듯 멍했다. "후배님께 폐를 끼쳤네." 서준은 청명보다 훨씬 온화해 보였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고, 그녀를 바라볼 때면 눈동자는 빛났으며, 말할 때는 마치 봄바람처럼 따스했다. 그는 물었다. "후배님, 운전면허는 있어?" "이번에 딴 거라서, 운전 못 해요." 소희는 여름 방학 때 면허를 땄는데, 기능 시험을 두 번 만에야 통과했다.도로 주행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괜찮아, 내가 가르쳐 줄게." 서준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검은색 포르쉐를 가리켰다. "긴장하지 마, 후배님." 서준의 다정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운전면허학원에서 배운 대로 하면 돼." 하지만 그녀는 학원에서 배운 것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오랜만에 소희는 긴장했다. "선배, 저는 학원에서 수동 기어를 배웠는데, 이건 자동 기어라 시동 거는 법을 모르겠어요…" "괜찮아." 서준은 조금도 짜증 내는 기색 없이 시동 거는 법을 알려주었고, 차는 무사히 도로 위를 달렸다. 소희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대학교 입학시험 때보다 더 집중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주차할 때 그만 길가에 차를 살짝 긁고 말았다. 차가 갑자기 멈춰 섰고, 관성의 법칙에 따라 소희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하마터면 튕겨 나갈 뻔했다. 소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남의 차를 긁었으니,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도 배상 못 할 것 같았다. "괜찮아, 처음에는 다 그래." 서준은 너무나도 친절하게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손목에 긁힌 상처가 났다. 원래 하얗고 예뻤던 손목에 붉은 자국이 생겨 미관을 해쳤다. "저희끼리 해결할까요?" 소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차를 긁었으니 얼마를 배상해야 할지 몰랐다. 소녀는 얼굴 가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서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안에는 짓궂은 기색이 엿보였다. "내가 미리 **한 도로 이용료라고 생각하지." 소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건 그녀가 청명과 말다툼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때 청명은 길가에 주저앉아 토하기 시작했다. 토를 다 하고 나서야 청명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소희, 개가 너보다 운전 더 잘하겠다!" "그럼 네가 운전할래?" 소희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녀가 중간에 시동 꺼뜨리지 않고 무사히 차를 몰고 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너!" 청명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났다.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소희에게 슈퍼카는 이렇게 모는 거라고 본때를 보여줬을 텐데! 슈퍼카는 이렇게 모는 거라고! 그는 방금 전의 죄책감을 거둬들였다! 소희를 불러서 데려오게 하다니! 청명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길에 여자아이 혼자 자신들을 태우러 왔다가 다시 돌아가게 하는 건 너무 야박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12시가 넘었는데, 기숙사 문 닫았어." 청명은 중요한 말을 잊지 않았다. "너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 서울대에는 밤 10시에 문을 닫는 이상한 규칙이 있었다. 10시 전까지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은 학생은 지도교수에게 보고되어 벌점을 받고 통보되었다. 소희는 괜한 객기를 부리지 않았다. 이 시간에 기숙사에 돌아가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그녀는 서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신세 좀 지겠습니다." "천만에." 서준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네비게이션에 찍힌 주소는 한남 UN빌리지였다. 유명한 고급 빌라촌으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유하거나 명문가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낯설어할까 봐 서준은 잊지 않고 말했다. "난 바로 옆집에 살아.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 "손목은…" 소희는 조심스럽게 그의 하얀 손목을 가리켰다. 상처 부위가 안쪽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서준은 웃었다. 그는 말씨가 고왔고, 교양이 넘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소희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객실로 들어갔다. 객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새것이었다. 그녀는 밤샘을 거의 하지 않았고, 침대에 눕자마자 곧바로 잠들었다. 다음 날 일요일, 소희는 6시에 일어났다. 그녀는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전날 밤 12시가 넘어서 잤는데도, 오늘 아침 6시에 어김없이 눈을 떴다. 소희는 간단히 씻고 청명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나가려고 했다. "너 이서준의 여자야?" 뒤에서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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