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휠체어를 탄 여자

2950 Words
다시 집에서 일요일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개학 날짜가 성큼 다가왔다. 학교에서 이틀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 주가 되자 모두 서준의 지도 아래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원래 서울대 신입생 군사 훈련은 군부대와 따로 연계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무슨 이유에선지 학생회 소속으로 바뀌었다. 학생회에서 훈련을 맡게 되었지만, 이들은 훈련에 투입되기 전 학교 측에서 군부대에 보내져 따로 훈련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입생들을 훈련시키는 강도가 그렇게 세지는 않았다. 앞서 이진이 휴가를 내면서 대리 교관에게 이틀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 이제 그녀가 돌아오자 옆 반 교관은 어느새 이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진은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했다. 옆 반에서 한 학생이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동작을 틀리는 바람에, 반 전체가 오전 내내 차렷 자세로 벌을 서야 했다. 어렵사리 점심시간이 되어 학생들이 해산하자마자, 이진은 서준을 불러 세웠다. "서준..." 이진은 그를 불러 세우고는 뭔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망설였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준의 얼굴에는 조금도 화난 기색이 없었고, 다만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옅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무슨 일이야?"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고, 이진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 몸이 좀 안 좋은데, 같이 의무실에 가 줄 수 있겠어?" 아빠에게서 오는 압박감이 너무 컸지만, 그녀는 서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의 속내를 떠보기로 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도 일이 있어서. 다른 친구에게 부탁해 봐." 서준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고, 변함없이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진이 어렵게 낸 용기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운동장에 남아 있던 다른 학생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박이진 선배 왜 저래? 전에 서준선배랑 깨진 거 아니었어?" "맞아! 무슨 충격이라도 받았나? 지난 금요일에 옷을 되게 야하게 입고 왔는데, 문신까지 했더라! 나 진짜 못 알아볼 뻔했어!" "맨날 학교에서 여신이라고 불리는 애가, 저러는 거 자기 스타일 아닌 것 같은데..." ... 다른 학생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졌고, 특히 여학생들은 평소 이진을 아니꼽게 보던 터라 서준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져가자, 이진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쯧쯧..." 서유는 옆에서 말을 얹었다. "쟤, 학생회 부회장까지 된 거 보면 능력은 있는 애 같은데. 왜 굳이 이서준한테 목을 매는 거야?" 이서준이 잘생기긴 했지만, 성격 좋고 그런 남자는 드라마에나 나오지. 설령 현실에 존재한다고 해도, 이미 임자가 있는 법이다. 남신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왜 굳이 가지려고 하는 걸까? "글쎄,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걸 원하는 법이잖아?" 소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 그저 제삼자일 뿐이었고, 그 주제는 금세 잊혀졌다. 청명이 훈련하는 반은 그들과 조금 떨어져 있었고, 운동장에 학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갈 때쯤에서야 느긋하게 나타났다. "들었냐?" 청명은 건들거리며 말했다. "누가 너보고 '것'이래." 그는 소희와 서유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아직 멀리 가지 않은 상태였다. 서준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온화하고 점잖은 얼굴에는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이마를 살짝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싸늘하고 위험해 보였다.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소희는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기에 단번에 눈에 띄었다. 오늘 그녀는 머리를 모두 묶어 올렸고, 군복 차림에도 불구하고 잘록한 허리와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너도 올 거 아니냐?" 청명의 목소리에는 놀리는 투가 섞여 있었다. "며칠 뒤에 준우가 파티 연다고 했다." 서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소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몇몇 남학생들이 소희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건넸지만, 이내 실망한 듯 자리를 떴다. "가서, 죽여 버려!" 청명은 지난번 일을 떠올리며 화를 냈다. "그때 가서 날 말리지 마!" 서준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널 말려서 뭐 하게? 죽이고 싶으면 죽여. 뒷수습은 내가 해 줄게." "흥!" 두 사람은 느긋하게 식당으로 걸어갔다. "네 그 불륜녀 아직 안 죽였냐?" 그는 서준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뒤에 가서 볼 거야." 서준은 가볍게 비웃었다. ***** 소희는 학교 남학생들의 인스타 맞팔 요청을 다 거절하고 나서야 겨우 식당에 도착했다. 서유가 옆에서 계속 거절해 준 덕분이었다.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뭐랬어. 너처럼 여리고 사랑스러운 애는, 나 같은 여자가 봐도 심쿵하는데, 하물며 남자애들은 오죽하면! " 서유는 평소 털털한 성격으로 예쁜 여자애들을 좋아했다. 소희는 성격이 온순하고, 여리고 사랑스러워서 그녀가 무척 아끼는 동생이었다. 소희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 화요일에 일이 있어서, 누구한테 말씀드려야 해?" 그녀는 요즘 귀에서 자꾸 이명이 들려서 병원에 가 볼 생각이었다. "조교 선생님께 말씀드려야지." 서유가 대답했다. "서준이 교관이긴 하지만, 휴가를 허락할 권한은 없을 거야." 다행히 조교 선생님은 꽤 말이 잘 통하는 분이었다. 소희는 성적도 우수하고, 수능 만점으로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게다가 성격도 온순하고 착하기까지 해서, 조교 선생님은 흔쾌히 휴가를 허락했다. 어느새 화요일이 되었다. 소희는 서울대 제1부속병원에서 의사와 진료 예약을 했다. 도씨 성을 가진 의사는 보기 드문 의학 천재로, 이제 겨우 스물 몇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내과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평소 진료 예약이 꽉 차 있었는데, 이번에는 소희가 어렵게 예약을 한 것이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안에 있는 의사는 너무 젊어서 놀랄 지경이었다. 스물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가운을 열어 보니 그 안으로 멋진 쇄골이 드러났다. 의사 가운을 입었지만, 오히려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그 얼굴은 너무나 잘생겼다. 그는 방금 전화를 끊은 참이었고,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소희?" 소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거두었다. "진료 기록 주세요." 그는 진료 기록을 훑어보더니 바로 결론을 내렸다. "환자분의 난청은 후천적으로 열이 났을 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서 생긴 겁니다. 수술은 불가능하고, 보청기를 착용하는 것을 권합니다." 예상했던 결과였기 때문에, 소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하고, 소희가 바로 진료실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안에서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요일에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올 거지?" 소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왜 저 의사는 진료 시간에 사생활 얘기를 하는 걸까? 관종인가? 신고할 수도 없고... 소희가 병원을 나서려는데, 옆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근처에서 몇몇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휠체어를 탄 중년 여성이 있었다. 아니, '여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마치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화가 난 듯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웅얼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희가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곳은 사립병원이었고,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래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서준 몸을 굽혀 중년 여성의 무릎 앞에 앉았고, 손에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제가 이틀 동안 못 왔다고 또 이러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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