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778 Words
1975년3월2일. 내일부터 난 고등학생이 된다. 우리 옆집에 이사 온 그 작은 아이의 이름은 이수경. 이래선 안 되는데 점점 그 아이가 좋아진다. 뽀얀 피부와 가느다란 손가락.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난 어김없이 하늘 속에 잠긴다. “저, 수경아, 내일 학교 같이 갈래?” “그래! 마침 잘됐다. 난 여기 지리도 잘 모르고, 아직 친구도 많이 못 사귀었는데.” “우리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응! 희윤아, 잘 지내보자.” - 드디어 그 애와 친구가 됐다. 내일은 여러모로 가슴이 설레는 날이다. 잘 다려둔 교복을 입고 새 친구들과 새로운 환경들. 그리고 수경이 나와 함께 한다. 아침부터 수선을 떨며 일찌감치 수경이네 집으로 향했다. “잘 잤니?” “응. 그런데 희윤아, 지금 가면 너무 이르지 않을까?” 수경이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고 묻자, 조금이라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대충 얼버무렸다. “아냐 그렇진 않을 거야. 이래봬도 학교 가는 길이 제법 멀어.” “그래? 그럼 빨리 가자!” 환하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오는 수경이 아름답다. - 학교로 향하는 길, 그 애가 내 팔을 꼭 잡아주었다. 내 친구들 중에도 내게 팔짱을 끼는 애들이 있긴 했지만 보통의 친구들과는 다른, 설레는 소풍 날 같은 그런 느낌이 전해졌다. 수경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고 했다. 아직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낯설어서인지 나를 많이 따른다. 난 그런 수경을 지켜주고 싶다. - 우린 운 좋게 한 반이 되었다. 난 그 애의 웃음이 좋았고, 그 흔적들이 좋았지만, 잘 내색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 사이의 우정’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뿐이라 해도 그 애 곁에서 함께할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난 운동을 좋아한다. 넉넉한 집안 형편 덕분에 원하는 운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있는 구기 종목 외에도 이미 태권도와 검도는 어느 정도 상급의 단수를 가지고 있었다. 아들이 없던 부모님은 항상 내게서 아들의 모습을 찾길 원하셨고, 그런 이유로 난 어릴 적부터 남자아이처럼 자라왔다. 하지만 나 역시 그렇게 거부하거나 싫진 않았다. 그저 이런 모습이 편하고 익숙할 뿐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알게 됐을 무렵, 난 조금 혼란스러워 해야 했다. -- 수경은 익숙하지 않았던 이곳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고, 이젠 나 아닌 다른 친구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그런 수경이 대견하다. 여름이 오고 겨울이 가고, 그리고 봄이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또 다시 우린 같은 반이 되었다. 수경과 또 한 반이 될 수 있다니. 예상치 못했던 일에 감사했다. “야! 희윤아, 나가봐. 누가 기다려!” “응? 알았어.” 1학년 후배들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따라다니던 애들이었다. “저기, 희윤 언니. 이거요.” “이제 이런 거 안 줘도 돼. 하지만 고맙다.” “네, 언니!” “응?” 그때였다. 후배 녀석이 볼에 입맞춤을 하곤 달아나 버렸다. “꺄.” 붉어진 얼굴에 당황스러워 하던 내게 친구들은 함성을 질렀다. “야! 역시~ 희윤이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네.” “근데 쟤, 좀 너무 하는 거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냐. 원래 저런 장난들을 많이 치는 애들이라...” 그 뒤로도 많은 후배 혹은 친구들에게 편지나 선물 받았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수경에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인 것 같다. 예전엔 친구들과 후배들의 호의를 그저 고맙게만 생각했던 나였지만, 수경이 함께 하고부터는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혹시라도 나를 이상한 아이로 생각해 멀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도 후배들의 호의가 계속되자, 수경 역시 이런 분위기가 당연한 모습이 되어버린 듯 그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치. 넌 내껀데 그렇게 함부로 당해도 되는 거야?” “아, 난…….” 수경은 가끔 내게 '내꺼' 라는 표현을 썼다. 수경이 혹시 질투를 하고 있는 걸까? 그게 비록 친구 사이에서의 질투일 지라도 왠지 기분이 좋다. -- 새 학기가 어느 정도 익숙해 갈 무렵, 수경은 읍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 그 애가 이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아이들과도 많이 친해졌기에 수경의 안에 내가 있던 자리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그녀가 이런 생활에 적응해 가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애는 그 또래의 여학생처럼 남학생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다른 친구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했으며, 나름대로 문학의 세계에 빠져 그것을 숭배하는 내가 아는 다른 여자 아이들과 같은 보통의 여학생이었다. 가끔씩 나에게 “희윤인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니?”라는 질문을 하며 날 곤란케 하기도 했지만, 난 그런 수경마저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남자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없었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간혹 시원스레 웃고 있는 수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 그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하굣길, 제 작년 생일날 아버지께 받은 자전거 뒤편에 수경을 태우고 조용히 페달을 밟아나간다. 오늘도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은 그 애 쪽이었다. “희윤아! 너 혹시 민우 오빠라고 알아?” “이장님 댁 아들?” “응. 저, 그 오빠 어때?” “뭐가?”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물었다. “아니… 저기… 민우 오빠가 나랑 같은 교회엘 다니는데, 자기랑 교제하자는 편지를 주더라고.” -끼익!-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걸어버렸다. “아야.”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수경이 당황한 듯 말했다. “희윤아! 왜 그래?” “아, 아니.”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던 나는 말을 얼버무린다. “아, 쓰라려.” 수경은 오른쪽 종아리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린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바퀴에 스쳤나 봐.” “괜찮아?”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수경을 안아 들고는 근처의 풀밭 위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곤 손수건을 꺼내어 그 애의 상처부위를 감싸며 사과했다. “미안.” 수경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나로 하여금 다치게 된 것에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우린 그대로 잠시 풀밭에 앉아있다. “잘 됐다. 안 그래도 너랑 그 애길 좀 하고 싶었는데. 나 어떻게 하지?” 너무도 즐거워 보이는 수경에게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애가 즐거우면 나도 즐거울 거라 믿어왔던 내가, 수경의 그 한마디에 알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나 사실 민우 오빠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는데, 오빠 편지 받고 잠도 잘 안 왔어. 나 바보 같지?” “아니.” “오빤 이제 내년이면 대학생이 될 텐데 내가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그게 걱정이야. 뭐, 워낙 공부를 잘해서 의대를 목표로 하는 오빠지만. 오빠랑 교제해도 괜찮을까? 넌 나한테 있어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희윤이 네 의견도 듣고 싶어.” 소중한 친구……. 마음이 아팠다. “네가 그 사람이 좋으면 된 거야. 잘 됐다.” “정말? 나도 니가 그렇게 생각해줄 거라 믿었어. 고마워. 넌 역시 좋은 친구야!” 내 목에 손을 두르며 수경은 마냥 즐거워했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귓가엔 '좋은 친구'라는 수경의 목소리가 한참을 맴돌았다. '나. 그 앨 정말 좋아하고 있는 걸까?' 나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해오던 지난 몇 년이 수경을 향한 가슴앓이를 통해 조금씩 명확해져 왔다. '힘들게 나를 찾았는데..' '내가 원한 건 너의 친구 따위가 아닌데...' - 마음이 답답하면 언제나 찾곤 했던 뒷산에 올라가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그 애의 행복을 웃으며 빌어주지 못 하는, 아니 그 앨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 하는 내 처지가 한 없이 서럽고 서러워 눈이 붓도록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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