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늦도록 어딜 갔다가 이제 오니!”
어머니께서는 늦은 밤 힘없이 들어온 나에게 꾸지람을 하신다.
“아버지 몹시 화나셨다. 어서 안방에 들어가 봐. 밥은 먹은… 얘! 희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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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떴을 땐, 머리 위엔 젖은 수건이 얹어져 있었고 걱정스런 눈빛을 하고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이제 정신이 좀 드니? 대체 어딜 다녀왔기에 이리 심한 감기가 들어 돌아왔어. 응?”
어머니께선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시고, 아버진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향하신다.
“아버지께서 잠도 안 주무시고 네 물수건을 갈아주셨다.”
“죄송해요.”
“일어나, 죽 좀 먹고 자거라. 어디? 이마에 열은 좀 떨어졌구나. 아까는 아주 불덩이 같더니. 으이그 쯧쯧쯧..”
걱정 섞인 핀잔을 하며 머리를 짚어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이 너무나 따스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나를 어떤 식으로든 믿고 계실 그 분들께 죄송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선 손수 죽을 떠 먹여주시고는 이불을 덮어주시며 자거라 말씀하셨다.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도 열이 심하게 올랐기에 학교를 가지 못했다. 방과 후, 걱정하며 날 찾아 온 수경과 친구들의 방문에도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열은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난 수경을 생각했다. 많이 걱정하고 있을 그녀를.. 그렇게 사랑의 열병이 한 차례 여린 마음을 스쳐갈 무렵 난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마음조차 다스릴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이라면, 그저 그 앨 위해 조용히 내 사랑을 묻어 두진 말자고.
단 한 번 그 애를 향해 뒤돌아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새 수경인 나에게 있어 지울 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스스로 말없이 인정해 버린 내 사랑의 방식을 조용히 지켜 가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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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여름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나의 마음은 더욱 수경을 향하고 있었지만 숨죽인 채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수경은 민우 오빠와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가끔씩 나에게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 수경을 가만히 바라보면, 행복한 그 애의 눈 속에 꼭 그만큼의 행복을 찾고 있는 내가 있다. 수경은 내게 있어 신앙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그녀가 날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런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난 충분히 견뎌 낼 수 있었다.
그녀가 사귀고 있다는 민우 오빠는 나보다 한 살 위로 우리 마을 이장님 댁 장남이었다. 성실하고 공부를 잘 하기로 유명해 동네 어른들의 애정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다.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는 민우 오빠는 작은 마을의 커다란 자랑거리기도 했다. 수경이 그런 착실한 사람과 교제하기에 조금 마음이 놓인다.
수경의 첫사랑과 첫 키스의 추억 안에 슬픈 눈으로 그들의 사랑을 가만히 지켜보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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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 시내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뒷산에 올라갔다. 하늘과 가까웠던 그 곳에서 크게 숨을 들이키며 자그마해진 마을을 바라보면 조금은 위로가 되기에 내가 즐겨 찾는 곳이다. 오늘도 가장 좋아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기대어 수경을 떠올린다.
그때였다.
“아악! 이러지 마세요. 오빠 도와줘!”
그것은 분명 익숙하다 못해 그리운 수경의 목소리였다.
“어이, 여자애가 도와달라잖아, 킥킥. 이봐, 이 자식은 널 도울 것 같지 않은데? 어때 우리랑 같이 놀자~”
“싫어! 흐흑, 오빠~ 도와줘!”
나는 키득거리는 여러 사내들의 소리와 수경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엔 동네에서도 질 나쁘기로 유명한 영민과 그의 패거리들이 싫다는 수경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 앞엔 녀석들에게 어깨를 잡힌 민우 오빠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수경은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
실랑이 끝에 대 여섯 명의 사내들에게 몸이 감긴 채 실컷 두들겨 맞고 있던 민우 오빠는 영민의 패거리가 수경에게 관심을 보이는 동안 산 아래로 달아나 버렸다.
“야! 참, 저것도 사내라고. 동네 꼰대 들이 하도 칭찬하길래 난 뭐 다른 줄 알았지. 야! 너 저걸 남자라고 만나고 있었냐?”
영민은 어이없다는 듯 민우 오빠가 사라진 곳을 향해 혀를 차며 말하고는 재빨리 수경에게 다가가 무력으로 그녈 위협했다.
“야, 영민아, 저 새끼 저거 마을사람들 데려오는 거 아냐? 빨랑 해 치우고 뜨자!”
“쳇!”
영민과 그의 패거리들은 수경에게 덤비며 그녀를 겁탈하려 했다.
“뭐 하는 거야, 이 나쁜 자식들아!”
나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녀석을 향해 주먹을 날리며 뛰어들었다. 저 만치 나자빠지는 영민을 본 다른 놈들은 어느새 내게 몰려왔다. 숨 가쁘게 녀석들을 향해 육탄전을 벌이던 나는, 그만 뒤 돌아 몰래 공격해오던 영민의 주먹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흐흑, 희윤아!”
어지러이 흔들리는 시선 사이로 날 보며 우는 수경의 모습이 보였다. 영민은 녀석들에게 나를 일으키라고 시켰고 우악스런 놈들에게 끌려 힘없이 일어난 순간,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나의 뺨에 작렬했다.
“이년은 뭐야!”
“씨발! 이거 아랫동네 잘난 부잣집 외동딸년이잖아, 크큭. 잘 됐네. 두 년 다 손 봐주자!”
“안 돼! 차… 차라리 나만… 나만 해! 수경일… 놔줘. 제발…….”
다급해진 나는 그들을 향해 놀라운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만큼 고통스러운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수경이만은 안 된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야, 대장! 시간 없어 어쩔 거야?”
한 녀석이 초조한 듯 말하자 영민은 고민하는 듯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차라리’를 연발하며 녀석들에게 두 팔을 잡힌 채 영민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년도 얼굴은 반반한니 반항하는 년 보다는 낫겠지. 어쩔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오기 전에 해치운다!”
영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녀석에게 수경을 못 가게 꼭 잡고 있으라고 시킨 뒤 나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노려보는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호기심 있는 얼굴로 다가오는 녀석을 향해 이를 갈았지만 수경을 위해서라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희윤아! 안 돼! 흑,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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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이 울부짖음이 귓가를 맴돌았고 어느새 나는 풀 숲 위에 누워있었다. 온 몸이 떨린다. 그리고 너무나 추웠다. 찢겨진 옷과 싸늘해진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터진 입술을 꽉 깨물자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누워서 본 하늘에 별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만월 때문일 거야.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야. 수경이만 아무 일 없으면 그럼 된 거야.‘
스스로를 그렇게 달래보지만 눈물은 이미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싫어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리자 나를 보며 울고 있는 수경이 보인다. 수경은 오열을 터트리며 나를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바보 같은 나는 그게 또 안타까워, 그녀를 향해 괜찮다는 듯 웃음 지어준다. 너무나 가슴 아픈 사랑의 노예가 된 나는 지금 겪고 있는 끔찍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그녀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여러 차례 되풀이 되는 시간. 얼마나 지났을까.. 영민이 수경에게 다가가 그 앨 위협했다.
“너 누구한테 말하면 죽을 줄 알아! 경찰한테 신고하면 그 다음은 너일 테니까! 저년이 대신 하겠다고 한 거니까 합의하에 한 거야, 알겠지? 친구 잘 둬서 다행인줄 알아.”
그는 쓰러진 채 울고 있는 수경을 향해 매서운 눈빛으로 협박하곤 나를 돌아봤다.
“야! 너. 오늘 일 그냥 네가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라! 그리고 그 깡 맘에 든다. 훗! 쉽지 않은 우정이야. 애들아 가자!”
키득대는 웃음을 흘리며 그들은 떠났다. 나는 여전히 풀숲에 누워있다. 그들이 떠난 뒤, 수경은 내게 달려와 나를 일으켜 끌어안고는 미친 듯이 울어댔다.
“수경아, 난 괜찮아.. 괜찮아... 별이 오늘따라 예쁘다. 너처럼..”
나는 옷을 여민 뒤, 내 목을 끌어안고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울음을 토해내는 수경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미안, 미안해, 희윤아! 흑, 나… 나 때문에. 흐흑… 어헝.”
“네가 괜찮아서 다행이야.”
그녀를 토닥이며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다. 이대로는 수경의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녀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워 나도 모르게 울먹이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입을 맞췄다. 안심이 되었기 때문일까?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놀라 입술을 떼어내려 했지만 내 입술을 받아들인 수경이 흐느끼며 말했다.
“사… 사실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흑...”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렀다.
'알고… 있다니?'
갑작스러운 수경의 얘기에 놀라 멈칫대는 날 향해 그녀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이젠 널 혼자 두지 않을게. 네 마음, 이제 외면하지 않을게. 그 동안 널 힘들게 해서 미안. 흑,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날 용서해줘. 으흐흑…
커다랗고 하얀 보름달이 너무나 밝게 떠있던 만월의 밤. 끔찍했지만 그녀의 고백을 들었던 이 밤.. 그 동안 삼켜왔던 눈물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내렸다. 내 마음을 애써 억눌러왔던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너무 슬퍼서.. 그렇게 그녀와 나는 오랫동안을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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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뒤,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불을 밝히고 마을 어른들이 우릴 찾으러 온 것이다. 어머니가 저 멀리서 달음질 해 오신다.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안고 너무나 서럽게 우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내가 당했던 끔찍한 기억들이 하나 둘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말없이 바라만 보시던 아버지께선 떨리는 눈으로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나를 외투로 감싸 업으셨다. 그렇게 산을 내려와 병원으로 향했고, 그 뒤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그 일이 있던 뒤로 아버진 못 하시던 약주와 담배가 느셨고, 어머닌 가끔씩 날 보며 우셨다. 동네를 지날 때면 아주머니들이 뒤에서 수근 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수경의 어머니께선 날 보면 연신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 외엔 머릿속이 비어버린 듯, 한 부분의 기억을 잊은 채 살아갔다. 아마도 영원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그 날의 기억을 내 무의식이 없애버린 것은 아닐까..
그 뒤, 수경이 민우 오빠와의 교제를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무렵, 영민과 그의 패거리들이 경찰에 붙잡혀가고 마을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