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이 나간 후, 유정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정말 끝장났다. 얼굴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정말 온 몸에 힘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유정아, 진통제 먹을래?"
수민이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괜찮아요. 금방 나을 거예요. 고마워요, 선배."
유정은 컵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수민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근데 저 신 아가씨는 도대체 왜 저렇게 건방진 거야?"
"왜겠어요, 잘나가는 여배우에 신성 그룹 아가씨니까 당연하겠죠..."
그녀는 물티슈를 꺼내 얻어맞아 붉게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무슨 잘나가는 여배우야. 내가 보기엔 한물간 것 같은데. 유 대표님께서 한마디 하셔서 다행이야. 설마 아직도 대표님께 꼬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음..."
유정은 생각에 잠겨 건성으로 대답했다. 냉정하고 무정하기로 소문난 유현우가 설마 자신을 도와줄 줄이야. 설마 어젯밤의 그 일 때문에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수민은 그녀의 붉게 부어오른 뺨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신지윤 말로는 유정이 고등학교 때 쓰레기였다고 했는데... 그럼 둘이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건가? 하지만 눈앞의 이 소녀는 뽀얗고 투명한 피부에 반짝이는 큰 눈, 오뚝한 코와 앵두 같은 입술까지, 어떻게 봐도 학교 퀸카 같았다. 어떻게 쓰레기일 수가 있지? 하지만 그녀가 말이 없으니 수민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유정아, 점심 나가서 마라탕 먹을까? 내가 살게!"
"아뇨, 마라탕은 냄새 너무 심해서 대표님께 저희 쫓겨나면 어떡해요."
수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유정의 말이 맞았다. 그때, 아까부터 회의 중이던 재무부장과 오 비서가 함께 사무실에서 나왔다.
"최 비서, 유 대표님께서 찾으십니다."
"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
현우는 책상에 앉아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이리 와."
유정은 천천히 다가가 공손하게 그의 옆에 섰다.
"내리실 지시라도 있으십니까?"
현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 여자, 왜 이러지? 분명 어젯밤 전까지만 해도 단둘이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왜 그렇게 유혹적으로 굴더니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거지? 어젯밤 일이 무서웠던 걸까? 그는 고개를 들어 유정의 하얀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곳에 있는 새겨진 붉은 손자국과 살짝 피가 맺힌 입술을 보고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홍보팀에 연락해서 실시간 검색어 조작해."
"네, 사장님. 어떤 검색어를 올릴까요?"
"신지윤 폭행."
유정은 깜짝 놀라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닙니다, 대표님. 저 괜찮아요!"
"내가 너 때문에 그런다고 했어?"
"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유현우는 매사에 다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나이에 어떻게 유진 그룹을 줄곧 재계 1위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설마 자신 때문에 굳이 실시간 검색어 조작을 하겠는가.
"또 다른 지시사항은 없으십니까?"
그는 책상에 있는 서류들을 살피며 아무렇지 않은 채 말했다.
"사후피임약은 먹었나?"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유현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걱정 마세요, 대표님. 먹었습니다. 대표님께 폐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현우는 재밌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 나보고 쓰레기 줍는 사람이라고 했지? 그럼 언제 한 번 더 주워 갈까?"
그녀의 하이힐을 신은 발이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두 번째라니? 그는 여자와는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나? 만약 그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면, 그런 그가 무슨 여자를 못 꼬시겠는가? 왜 하필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걸까?
유정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본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그래? 최 비서, 혹시 하룻밤에 백만 달러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나한테 만족하지 못했나?"
유정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너무 만족해서 문제였다. 너무 만족해서 지금 아랫배가 아프고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말했다.
"대표님, 차라리 100만 달러 돌려드릴 테니,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면 안 될까요?"
그의 서늘한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손을 뻗어 유정의 뺨을 꽉 움켜쥐었다.
"너 내 침대가 마음대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아까 맞은 뺨이 아직도 얼얼한데, 이번엔 현우에게 뺨을 잡히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녀의 안쓰러운 모습에 현우의 가슴이 철렁했다. 다음 순간, 그는 손을 놓았다.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는 자신이 이 여자에게 조금 끌린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랫동안 금욕 생활을 해서 폭발이라도 한 건가? 안 돼. 진정해야 해.
"나가."
현우는 차갑게 말했다.
"네, 대표님."
대표실을 나온 유정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꾹 참고 있던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정말이지 너무나 후회했다.
...
그녀가 열한 살 때,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유정은 임씨 집안에 맡겨졌다. 임씨 집안과 최씨 집안은 사업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 집안에는 그녀보다 두 살 많은 아들 임도한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똑똑하고 성적도 좋았으며, 잘생기기까지 해서 양가 부모님들은 일찍부터 농담 삼아 둘을 엮어 주곤 했다. 유정 역시 자신이 커서 도한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가 학교 퀸카 신지윤과 사귀기 시작했고, 지윤은 유정이 항상 도한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이유로 그녀를 싫어하며 괴롭혔다.
도한의 고3 생일날, 유정은 그를 위한 미리 선물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학교 정원 인공 바위 뒤에서 지윤에게 키스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최유정, 걔 너무 촌스럽고 못생겼어. 내가 걔를 좋아할 리가 있겠어?"
그 순간, 그녀는 선물을 내던지고 뒤돌아 뛰쳐나왔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유정은 일찍 집에 돌아왔다가 우연히 침대에서 뒤엉켜 있는 그들을 보게 되었다. 그날이 그녀가 임씨 집안을 나오게 된 날이다.
그 후, 대학교 4학년 때, 그녀는 신인 배우로 떠오른 지윤과 유현우가 어떤 이유인지 함께 대형 쇼핑몰 준공식에 참석한 모습을 보았다. 그는 시종일관 냉담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지윤이 도한과 이미 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지윤이 유진 그룹의 사장, 제일 부자인 유씨 집안의 큰 도련님인 유현우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그래서, 그 작은 복수심을 위해, 유진은 그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지윤도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정은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나는 지금까지 당해왔는데, 한번쯤은 신지윤을 며칠 동안 괴롭히게 해도 괜찮아.'라고 생각 하며.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성공할 거라고. 그날 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거듭 후회하길 반복했다. 그녀는 이런 일로 자신의 몸을 팔고 싶지 않았다. 유정은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와 하고 싶었다. 그녀는 울면서 셀 수도 없이 용서를 빌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이 세상 일이라는 것이, 후회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이제서야 자신이 침몰하는 배에 탔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곳에서 유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