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영은 임안이 그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몸이 움찔했다.
잠깐의 정적 후,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응." 하고 대답했다.
임안도 그가 순순히 인정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나 열 안 나는데?"라고 말하지 않나?
그러면 상대방이 손으로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 "어, 뜨겁네, 열이 있는 것 같은데? 나랑 병원 가자!" 같은 말들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음, 박찬영은 이상한 애야.'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임안은 쓰레기통 옆에 놓인 빗자루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물었다.
"그럼 약은 샀어?"
"…… 샀어."
박찬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
임안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였다.
구시가지는 신시가지처럼 번화하지 않아 많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그녀가 사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안의 가로등은 항상 꺼져 있었다.
가방 끈을 꽉 움켜쥐고, 걸음을 재촉하며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났다.
집까지 10미터 정도 남았을 때, 그녀는 임현철이 아파트 현관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발로 문을 받치고 있어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임안이 다가오자 손짓하며 말했다.
"빨리 와! 이러다 길고양이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겠다."
임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임현철의 어깨에 걸어주며 히죽 웃었다.
"우리 아빠가 나 마중 나왔네!"
"누가 너 마중 나왔냐, 나 그냥 소화시킬 겸 산책 나온 거야. 너무 배불러서."
"아, 배불러서 나오셨구나."
"쯧, 어떻게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하냐."
부녀가 나란히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골목 모퉁이의 소년은 그제야 천천히 몸을 돌려 떠났다.
임안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 케이스를 발견했다.
과거 우재영을 쫓아다니느라 아빠에게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며 공부에 필요하다고 거짓말까지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우재영을 쫓아다니지도 않는데?
핸드폰 사달라는 말도 안 했는데.
"아빠! 이 핸드폰 누구 거야?"
임안이 물었다.
임현철은 현관 수납장 위에 열쇠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누구 거긴 누구 거겠냐, 우리 집에 딴 사람이라도 사냐?"
"저번에 네가 자동차 정비소에 나 찾으러 왔다가 PC방까지 찾아갔다며. 다음에 또 나 찾으려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니지 말라고 핸드폰 있으면 편하잖아!"
임안은 뒤에서 양손으로 임현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아빠!"
"맞다."
임현철은 그녀의 손을 토 토닥이며 말했다.
"저번에 네가 신시가지에 집 구하는 거 물어봤었지? 소식이 있어."
"응?"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 집은 절대 구하면 안 되는데!
임안은 그를 소파에 앉히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생각해 봤는데, 우리 집 구하는 거 그만두는 게 좋겠어."
임현철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왜? 저번에 네가 학교 가깝고, 친구들도 다 거기 살고, 주말에 같이 공부할 수 있다고 했잖아."
임안은 말했다.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집 구하는 게 별로 안 남는 장사 같아. 그리고 여기에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고."
임현철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네가 저번에는 그런 소리 안 했잖아!"
"아빠~"
임안은 그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말했다.
"혹시 재개발 아세요?"
'재개발'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자 임현철은 들고 있던 찻잔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소리야? 설마 우리 집이 재개발된다는 거야?"
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해. 생각해 봐, 요즘 강해시 주택난이니 뭐니 하면서 재개발할 거라고 뉴스에서들 말하잖아! 그럼 우리 동네 같은 구시가지도 개발해야 할 거 아냐. 개발하려면 땅이 필요할 테고!"
임현철은 두 손뼉을 짝 치며 기뻐했다.
"말 되네! 내가 어떻게 그 생각을 못 했지! 안 돼! 절대 팔면 안 돼! 우리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해!"
임현철은 임안에게서 자기 집이 재개발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얼굴에 화색이 돌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사장님의 행복 지수가 수직 상승한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실수했다고 혼냈을 텐데 혼도 나지 않았다.
PC방에서 알바하는 친구들은 누구에게 들었는지 자동차 정비소 사장님이 요즘 온화해지셨다는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정비소에 취직 문의를 했다.
뜻밖에도 몇몇 친구들이 취업에 성공했다.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우리 사장님을 이렇게 기쁘게 해 드린 거야! 나중에 꼭 은혜를 갚아야겠어!"
임안은 교실에 앉아 재채기를 크게 한 번 했다.
그녀는 옆을 돌아보며 제대로 닫히지 않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당겨 보았다.
역시,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저 창문 제대로 안 닫혀."
그녀의 뒷자리에 앉은 김명오가 말했다.
"아, 그래."
임안은 다시 문제 풀이에 집중했다.
그때 최수아가 그녀의 팔꿈치를 쿡 찌르며 말했다.
"너 우리 반 단톡방에 초대했어."
"알았어."
수업 시작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틈을 타 임안은 서랍 속에서 새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10반 단톡방은 얼마 전에 만들어졌다. 때문에 아직 많은 아이들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단톡방에 들어가자마자 김명오가 올린 메시지를 확인했다.
【강수혁: 야, 박씨 그놈 절대 초대하지 마라. 누구든 걔 초대하면 바로 강퇴시킨다!】
박씨? 박찬영?
임안은 대수롭지 않게 화면을 아래로 내리며 이전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강수혁: 이번 주 일요일은 하루 종일 쉰다! 다들 농구장 와서 경기 보자!】
【왕여민: 우재영도 나와? 걔 나오면 우리도 갈게!】
【김명오: 야, 우리 반 남자애들은 눈에 안 차냐?】
【이두리: 누가 그래? 우리 반 남자애들 다 괜찮은 애들이거든! 그래서 우재영 농구 경기 나오냐고?】
【황매화: 이두리, 너 지금 그 말은 좀 아니지 않냐? 우리 반에서 박씨 그놈 빼고 다 괜찮은 남자애들이지】
【왕여민: ㅇㅈ】
【김수선: ㅇㅈ222】
【강수혁: 야, 박씨 그놈 절대 초대하지 마라. 누구든 걔 초대하면 바로 강퇴시킨다!】
대화 내용을 모두 확인한 임안은 순간 단톡방을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텅 빈 뒷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박씨는 벌써 이틀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임안은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하늘을 가로지르는 번개가 번쩍이자, 그녀는 그제야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임안은 고개를 돌려 최수아에게 물었다.
"너 우산 가져왔어? 비 올 것 같은데."
그녀가 말하는 순간,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안 가져왔는데. 우재영한테 가져왔는지 물어보고 같이 가야겠다."
최수아는 이 말을 하면서 임안의 눈치를 살폈다.
임안은 그녀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다음 다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최수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우재영 안 좋아하게 된 건가?'
임안은 창밖으로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창문 틈 사이로 들어와 박찬영의 책상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박찬영의 책을 안쪽으로 조금 옮겨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뻗는 순간, 지난번 그에게서 느꼈던 위압적인 분이기현이 떠올랐다.
'내 물건 함부로 만지지 마.'
그는 그렇게 경고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노트를 꺼내 창문 틈에 끼워 빗물을 막았다.
【띠링! 임무 알림: 박찬영의 집에 가서 그를 문병 가세요.】
뭐! 걔 아직도 아픈 거야?
【이번 임무를 완료하면 특별 보상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보상이라는 말에 임안은 천둥번개가 치는 날씨 때문에 이번 임무를 포기하려던 마음을 바로 접었다.
좋아, 해 보자!
음, 그런데 걔 집이 어디지?
솔직히 말해서 박찬영에 관한 온갖 소문들을 제외하면, 그녀는 같은 반 친구인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5포인트로 정보 쿠폰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너무 비싸잖아! 내 포인트를 써야 한다고?
【직접 정보를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직접 찾으라고? 담임 선생님은 걔 집 어딘지 아시겠지?
임안은 종례가 끝날 때까지 교실에 있다가 교무실로 가서 담임 선생님께 박찬영이네 집 주소를 여쭤보고, 집에 다녀오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박찬영의 집 아래 서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이 아파트는….?
그의 집은 다름 아닌! 그녀의 집! 윗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