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돈이 많으니까

2669 Words
임서훈의 머릿속에 문득 유영이 슈퍼마켓에서 "돌아가셨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에게나 말하기 어려운 비밀이 있는 법이다. 서훈은 두부 한 조각을 집어 창민의 식판에 놓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아, 왜 나한테 두부를 줘? 나 이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창민은 투덜거리며 두부를 다시 서훈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젓가락이 서훈의 식판에 닿으려는 순간, 서훈의 눈빛에 움찔하며 멈췄다. 창민은 하는 수 없이 손을 거두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서훈아, 나 진짜 네 두부 먹기 싫어." "풋." 유영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창민과 서훈은 동시에 유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기침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 배불러서 그만 먹을게. 너희들끼리 먹어." 서훈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창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뒤늦게 자신의 말이 어린 애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방금 한 말, 좀 유치원생같이 했나…?"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으니까 입 다물어. 창민은 마침내 조용해졌다. 서훈도 거의 다 먹었는지, 휴대폰을 꺼내 쇼핑몰에서 우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유영에게 똑같은 우산을 사서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창민은 서훈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더니, 화면에 표시된 가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우산인데 300만원이나 해? 뭐, 금으로 만들었대?" 그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황동이라고? 황동이 금보다 더 비싼거야?" 서훈은 구매 후기를 보려고 댓글 창을 눌렀다. "어떤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가치를 따지지 않아." "그럼 뭘 보고 사는데?" "돈이 많으니까." 창민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 하루 종일 유영은 고등학교 3학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그녀를 둘려쌌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이 되어 그녀는 교실로 돌아왔고, 서훈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지는 유영이 고개를 돌려 유영이 서훈의 자리를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했다. "서훈이은 원래 학교에서 야자 안 해." "아, 그렇구나." 유영은 그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수지가 워낙 친절하게 설명해 주니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야자는 8시에 끝났고, 통학하는 학생들은 문제지를 집에 가져가서 풀 수 있었다. 8시 정각, 유영은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차민정 선생과 마주쳤다. "차 선생님." "집에 가니?" 차 선생은 유영을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며 말했다. "배 안 고프니? 같이 야식 먹으러 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배 안 고파서요." 유영은 허리를 곧게 펴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겉보기에는 아주 얌전한 소녀였다. 선생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 전학 와서 첫날인데 어땠니?" "좋았어요." 유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문제지 다 못 풀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유리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히 가렴." 강유영은 뒤돌아서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흔적도 없이 지웠다. 담임이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은 모두 윤희정 때문이었다. 유영은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그녀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녀의 그늘 아래 있고 싶지 않았다. ***** 며칠 동안 유영은 계속 길을 익혔고, 황각로 주변의 거리는 이제 모두 외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손님으로 가득 찬 식당을 골라 야식을 먹으러 들어갔다. 그녀는 제육덮밥을 주문했다. 식당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선풍기까지 함께 틀어놓아 시끌벅적하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였다. 유영은 사진을 찍어 민서에게 보냈다. 민서는 금방 답장을 보냈다. 이민서: [와, 사람 진짜 많다! 저런 작은 식당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강유영: [좀 있다 먹어 봐야 알겠지.] 유영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며 민서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누군가 커다란 손으로 제육덮밥을 들고 그녀 앞에 놓는 순간까지. 그녀의 시선은 그 손에 사로잡혔다. 뼈마디가 균형 잡히고 예뻤으며, 손가락은 길었다. 꽤 보기 좋았다. 유영은 손가락을 따라 위쪽을 올려다보았고,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임서훈이었다.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이곳의 종업원이었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도 그를 마주치더니, 야식을 먹으러 와서도 그를 마주치다니. 그는 도대체 아르바이트를 몇 개나 하는 걸까? 그는 유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가만히 두었다가,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이거 좀 매운데 먹을 수 있겠어?" 그는 혹여나 유영이 매워서 먹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유영은 앞에 놓인 선명한 붉은색의 제육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얇지도 그렇다고 두껍지도 않는 돼지고기와 붉은 고춧가루가 섞인 양념이 잘 버무려져 있어 보였다. 보기에도 꽤 매워 보였다. 가게에 들어왔을 때 다들 이 요리를 먹고 있길래 일부러 주문한 것이었다. 서훈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민하는 줄 알았다. "아직 젓가락 안 댔으면 다른 걸로 바꿔 줄까?" "음식 나온 걸 바꿀 수 있어?" 유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음식 남기는 게 아까워서 그래." "아, 저 매운 거 잘 먹어요." 서훈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여기 처음 온 손님들 열에 아홉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 유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서훈은 말을 마치자마자 유영에게 반박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흥! 허세 부리긴. 유영은 젓가락을 집어 들어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맛을 보았다. 그렇게까지 맵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역시 맵다! 자존심 상하게도.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물컵을 집어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 한 컵을 다 비우고 나서야 매운맛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물컵을 내려놓자, 앞에 요구르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유영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서훈이 옆 테이블에서 손님 주문을 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서훈은 잘생겼지만 까칠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손님 주문을 받을 때 허리를 살짝 굽히고 미소를 짓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태도는 상대방에게 정성껏 응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임서훈은 그녀가 이전까지 알던 또래들과는 달랐다. 분명 힘들게 살고 있을 텐데도, 그의 모습에서는 삶에 찌든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유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영은 입술을 촉촉하게 적신 후 테이블 위의 요구르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보여 주었고, 그의 시선 속에서 요구르트 뚜껑을 열어 마셨다. 결국 그녀는 제육덮밥을 다 먹었다. 이미 자존심이 상했으니, 남김없이 먹어야 했다. 그래야 서훈에게 음식을 남긴다는 잔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거의 제육 한 입에 물 한 모금을 마셨기 때문에, 식사 속도가 매우 더뎠다. 그녀가 다 먹었을 때쯤, 만석이었던 식당 안에는 손님이 서너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 계산이요." 다가온 사람은 임서훈이었다. 그는 이미 앞치마를 벗었고, 손은 리더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8500원이요." 유영은 이미 결제 앱을 켜 스캔하려다 말했다. "요구르트 값은?" 서훈은 못 들은 척하며 그녀를 재촉했다. "나 퇴근해야 하니까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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