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못 본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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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진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그는 소파에 앉아 셔츠 깃을 풀어헤친 채였다. 드러난 속살이 햇살에 비쳐 광을 냈다. 품에는 갓 들어온 듯한 여자 모델을 안고 있었다. 무리 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노는 것은 언제나 재진이었다. 유학 가기 전, 재진은 여자 친구를 일주일마다 갈아치웠다. 심지어 자신조차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금의환향한 그는 예전보다 수완이 더 좋아졌고, 더 화려하게 놀고 있었다. "칫!" 청명은 비웃으며 눈을 흘겼다.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 도재진 선생님께서 몸값이 몇 배나 뛰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진료를 받으려면 나도 줄을 서야 할 판이야." 키가 크고 다리가 긴 그는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이미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여자 모델 하나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꺼져!" 청명은 눈꺼풀을 치켜뜨며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차라리 이서진 그 자식이 그리운 지경이었다. 비록 속은 시커멓지만, 여자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눈여겨볼 만한 여자는 애초에 없었다. 도재진처럼 여자 친구를 옷 갈아입듯 하는 놈과는 달랐다. 모델들은 하나같이 눈치가 빨라 청명과 재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간파했다. 여기서 노는 도련님들 중에 권력과 재력이 없는 집안은 없었다. 아무 남자나 함부로 대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었다. 몇몇 모델들은 마지못해 재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료받을 일이 좀 있긴 하지." 재진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항상 나른해 보였고, 무엇에도 의욕이 없는 듯했다. "이서준 그 자식은?" 재진은 마침내 용건을 떠올린 듯했다. "내 아버지를 찾는 이유가 뭐야?" 청명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아직 설날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아버지께 세배라도 드리려고?" 옆에 있던 이안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청명이 형,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화가 났어?" 그는 허둥지둥 귤 하나를 그의 입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진정해!" "진정은 무슨!" 청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주혁, 지난번에 네가 떠나기 전에 나한테 일을 잔뜩 떠맡겼잖아. 너는 좋았겠지. 혼자 쏙 빠져나가 버리고!" "무슨 소리야?" 재진의 얼굴에 마침내 정색하는 기색이 어렸다. "이서준 그 위선자 녀석이 설마 그런 간단한 일 하나 처리 못 했겠어?" "내 탓으로 돌리지 마! 내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청명은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며칠 전에 학교에서 얻어맞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재진은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남은 듯한 말투였다. "내가 말했잖아. 모범생 노릇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너무 오래 하면 진짜 고양이가 된다고." "오?" 문 앞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원래 고양이였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고양이로 보는 거겠지." 단정한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눈부셨다. 특히 그의 외모는 재진보다 몇 배는 더 빛났다. 재진의 얼굴이 다소 공격적인 날카로움을 지녔다면, 서준의 용모는 노란 달이 선명히 비칠듯한 맑은 호수처럼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보여 사람들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오만함을 드러내는 재진과 달리 그의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여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달려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슴이 설레더라도, 이 남자는 외모와 달리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재진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아이고, 다들 오랜만인데 너무 싸우지 마!" "맞아, 맞아! 재진, 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이잖아. 아직도 학생처럼 유치하게 굴지 마!" "그리고 너, 서준. 평소에 학교에서 얼마나 바쁜데, 너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워! 재진이 돌아오니까 바로 나왔잖아! 너희 둘이 진짜 사랑 아니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맞아! 서준, 너랑 재진이랑 한잔해!" …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앞다퉈 중재에 나섰다. 순간 조용해졌으나, 순식간에 방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서준은 옆에 있던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온화하고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청명은 코웃음을 쳤다. 재진과 서준, 둘 다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진은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랐다. 그는 어디에 있든 항상 주목받는 존재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얼굴에 드러내고 심하면 주먹까지 날렸다. 반면 서준은 완전히 달랐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비교되는 모범생이었고, 성적은 항상 전교 1등, 예의 바르고 공손해서,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그의 흠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문제였다. 그는 독사였다. 언제 어디서든 물어뜯을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청명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지난번에 수진이에 대해서 왜 물어봤어?" 그가 수진이와 유일하게 만난 것은 어린 시절, 그가 지원을 따라 고향에 내려갔을 때였다. 그때의 수진이는 작고 꾀죄죄한 아이였고, 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더욱 아름답고 우아하게 자랐다. 학교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까. "그냥." 서준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했다. 전체적으로 나른한 모습이었고,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을 걸었다. "이서준, 우리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잖아. 너랑 재진이 무슨 큰 원한이 있다고 그래? 이제 술 마셨으니 웃으면서 풀자!" "맞아, 맞아." 윤성은 재진에게 아첨하듯 다가갔다. "형, 우리 중에서 형이 제일 나이도 많고, 지금은 서울대 제1 부속병원에서 특별 초빙한 천재 의사라는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잖아! 빛나는 스펙을 가진 사람이라고!" "예전에 서진이 형이랑 얼마나 친했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한판 붙고 나면 다 풀릴 거야!" 아직 고등학생인 윤성은 나이가 가장 어렸고, 눈치도 가장 빨랐다. 그가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해 보였다. 재진은 여전히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윤성이 따라준 술을 받아 서진에게 보여주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윤성은 다시 서진에게 아첨하듯 다가갔다. 서진은 항상 온화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고, 그에게서 다른 감정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걸로 일단락된 셈이었다. 윤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몰래 닦았다. 다행히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 그는 혹시라도 둘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고 또다시 피바람이 불까 봐 걱정했었다. 이제 방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고, 청명도 어쩔 수 없이 합류했다. 그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딱히 잔소리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술에 약한 주량에도 불구하고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매번 술자리에 나가면 항상 가장 적게 마시고 가장 빨리 취하는 사람이었다. 서준은 학생회 회식 자리에서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술을 못 마시는 줄 알았지만, 청명은 그 녀석이 누구보다 술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는 왜 그러는지, 청명이 은근히 눈치를 줘도 못 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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