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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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6-1. 할리메 6-2. 샤흐라자드 7. 스피타만 8. 파리사티스 6-1. 할리메 _ 할리메 여사는 궁인들의 우두머리이자 여왕폐하를 지척에서 모시는 내궁시녀장이다. 여왕께서 갓 태어났을적, 할리메는 궁전에 하급궁녀로 들어왔다. 가난한 평민집안에서는 한명이라도 입을 줄이기 위해 딸을 노예로 팔아버린다. 하그리아는 여자들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나라지만, 그건 상류층 여성들에게만 개방된 문이었다. 하층민 여성들은 학교에 다니거나 글을 읽고 쓰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그나마 할리메는 운이 좋았다. 사창가에 팔린게 아니라 궁전에 팔려갔으니까. 하급궁녀에서 궁녀로, 그리고 상급궁녀로, 그리고 내궁시녀장으로 천천히 계단을 밟으며 문턱을 넘었다. 자신을 노예시장이 아니라 궁전에 팔아치워 준 부모에게 아주 약간의 감사한 마음이 있다. 덕분에 지금같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부모가 찾아와서 성공했으니 금 1두캇(금 100달란트)만 빌려달라고 구걸한다면, 당장 시종들을 시켜서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을 하고 밖으로 쫒아낼 것이다. 5살이던 할리메는 고작 5데나룻(은 50달란트)에 팔렸다. 그것도 여자 노예치곤 후하게 값을 쳐줬다며 부모는 만족하며 돌아갔다. 당장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평민에게 5데나룻은 아주 큰돈이다. 하지만 할리메에게 5데나룻 따위는 간식으로 먹는 과자값보다 못했다. 할리메는 100세켈 은화(은6000달란트)를 쟁반에 가득 쌓아놓고, 왕궁에 찾아온 방물장수들에게 오늘 가져온 목걸이 중에서 제일 비싼것을 살테니 내놓으라고 명령할 수 있다. 내궁시녀장이라는 지위는 궁전에선 재상의 권세와 맞먹었다. 할리메는 침실에서 곤히 자고 있는 여왕폐하께 시선이갔다. 할리메가 10살이었을 때 5살이던 샤흐라자드 공주를 처음으로 뵙게되었다. 말썽꾸러기인 공주님을 돌보기는 여간 힘든일이었다. 10살 이하의 어린 궁녀들 중 용모가 단정한 소녀들이 공주님의 놀이상대로 뽑혔다. 할리메도 놀이상대 중 한명이었다. 샤라 공주님(그 당시엔 '샤라'라는 애칭으로 불렸다)은 엄청난 왈가닥이셨다. 아버지이신 루스탐 왕자 전하와 다른 왕손들께 장난을 많이치셨다. 할리메는 샤라 공주의 곁에 붙은 놀이상대 중에 가장 오랫동안 붙어있었다. 라지한 왕이 즉위하고 루스탐 왕자와 그의 자손들이 모조리 숙청당할때, 할리메는 어린 샤라를 데리고 몰래 북쪽 땅으로 도망쳤다. 왕족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라지한 왕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선 공주님이었던 샤라를 평민 아이처럼 키워야했다. 처음엔 가족도 시종도 없는 삶에 적응을 못했었지만, 금새 시골 소녀들처럼 걱실걱실하게 자랐다. 8살의 샤라는 눈 덮인 산에서 약초를 캐오고, 건넛 부락에서 소금을 얻어오고, 이웃의 가축을 돌봐주었다. 이 시기의 할리메와 샤라는 언니와 여동생이였다. 알록달록한 자수를 새긴 저고리와 치마를 끈으로 동여매고, 양털로 짠 외투와 모자를 걸쳤다. 가정의 정령 끼끼모라를 위해 향초에 불을 붙였고 만신전에 가면 산양의 가죽과 내장을 제물로 바치며 뻬룬 신께는 천둥번개에 맞아죽지 않게 해달라 기도드렸고, 모꼬시 신께는 가축들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혹한의 계절을 무사히 넘기기를 기도드렸다. 할리메가 기억하기론 적어도 샤라는 14살까지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다. 군을 이끌고 죽은 아버지와 형제들의 복수를 하겠노라며 폭풍같은 여전사로 성장하게 된 것은, 샤라가 16세 탄생일을 맞이한 뒤였다. 어느날 갑자기 샤라는 물의 정령 루살까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만신전에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러 갈 때 두 눈을 감고 양손으로 두 귀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 했다. 운명의 여신들과 불새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고, 마술을 부리는 노파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문을 건다고 말했다. 할리메는 약초 다루는 집에도 데려가보고, 신통한 마술사에게 찾아가 보기도 하였다. 구불구불한 동물 내장으로 점을 치는 사제들에게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고, 만신전에 찾아가 수많은 신들과 정령들의 석상 아래에서 촛불이 녹아없어질 때까지 기도를 드렸다. 당근 죽을 쑤어서 떠먹여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하루종일 누워있거나 발작을 했다. 샤라는 무려 여덟 달 동안이나 앓았다. 달거리는 뚝 끊겼다. 이웃들은 애가 산것도 죽은것도 아닌 상태라면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렇게 앓기만 하던 샤라는 16살을 앞두고 멀쩡하게 일어났다. 인생이란 운명의 여신들이 실타래를 굴려서 짜는 베틀이라고 하였던가? 샤라는 음식도 잘먹고, 가축도 잘 돌보고, 양털로 조끼를 짰다. 삼백일 동안 드린 기도가 드디어 통한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온 것이었을까? 할리메는 알 수 없었다. 일전에 여덟달이나 앓아 누우셨던 시절이 기억나냐며 여왕께 넌지시 여쭈어 보기도 했다. 여왕폐하께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다만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궁으로 돌아와 왕관을 쓰게 되신 것은 여왕께서 20살이 되셨을 때 일이었다. 쫒겨난 선대 라지한 왕은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6-2. 샤흐라자드 _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렁거린다. 커다란 불새가 날아들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불새는 날개를 화르륵 펴며 날아올랐다. 이윽고 공허한 세계가 붉게 타올랐다. 금성처럼 빛나는 불새의 눈은 샤라를 보고있었다. 샤라는 불새를 만져보려고 손끝을 가까이 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불꽃같은 깃털들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컴컴한 어둠만 남긴채 불새는 사라져버렸다. 샤라는 꿈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하얀색 침의를 입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꿈이었다. 샤라가 반복적으로 꾸던 꿈이었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내궁시녀장 할리메가 절을 한뒤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샤흐라자드 폐하께선 하그리아 왕국의 강인한 여왕이지만, 요 며칠동안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불꽃에 뒤덮인 새가 춤추다가 사라지는 환영은 너무나도 생경한 꿈이었다. 대부분의 꿈들은 잠에서 깨어나면 금방 휘발되지만,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꿈에서는 팔다리는 물론 정신기능마저 서로 조응되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일부러 지치게 하려고 했다. 공무를 더 많이 처리하거나 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거나, 남자들과 자주 관계를 갖는 방식으로, 심신을 혹사시키면 피로함 때문이라도 꿈의 잔상은 잦아들었다. 샤라는 강력한 왕국을 다스리는 여왕이었으므로 육신에 무리가 간다면 그것은 왕국의 존립과도 연결되었다. 젊은시절에는 괜찮았지만 이제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똑똑한 학자들과 유능한 관료들이 왕국을 받쳐주고 있지만, 안정적인 세습을 위해서는 후계자를 정하는 게 옳았다. 샤라도 알고는 있었다. 자신에게 아들이 셋이나 되었고, 세 명 모두 왕위계승자로서 심각한 결격사유는 없었다.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더라도 무난하고 안정적으로 통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고민되었다. 왕자들은 서로 사이가 좋은 형제였지만, 그 아비들은 달랐다. 무난하게 장남에게 물려주더라도 나쁜 선택은 아닐것이지만 똑똑하고 총명한 차남과 삼남이 있으므로, 흉심을 품은 자들로 인해 왕국이 분열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샤라는 장남인 아르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않았다. 건국시조 루스탐이나 자신의 아버지 '영웅' 루스탐처럼 강하고 능력있는 자를 왕좌에 앉혀주어야 지당한 것이다. 선량한 성품따위야 자비왕 아르샨 1세 시절에서나 통용될 뿐, 드넓은 왕국의 신민들을 다스려야 하는 통치자에겐 필요없다. 아르샨이 왕이 된다면 필시 그 아비인 아이라만 재상이나 아내인 파리사티스가 섭정할 것이 자명했다. 외척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는 것은 왕권을 약화시키는 지름길이다. 샤라는 마음같아서는 차남인 이스카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2왕자 이스카는 8살때 서부 속령에 장기적인 조세 운반수단으로 바닷길을 이용하라는 조언과 함께 운반산업에 대해 100장이 넘는 보고서를 제출했었고, 13살이 되었을 때 자신과 함께 국경의 성읍을 침범하는 팔랑카르 족을 소탕하는 원정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었다. 16살 성인이 된 모습은 자신의 아버지 루스탐을 연상시켰다. 절반이 천한 혈통이란 점도 같았다. 하지만 이스카는 어머니인 샤라에게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16세에 성년식을 치루자마자 연회에서 춤을 추던 무희와 덜컥 결혼을 해버렸다. 차라리 왕이 되고 싶은 욕망도 있으면서 적당히 능력도 있는 셋째 아들 스피타만을 후계자로 삼는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남을 왕으로 세울 경우, 위로 멀쩡한 형이 둘이나 있는데 막내 아들을 왕위에 올리냐면서 정치적으로 큰 국란이 초래될 것이었다. 후계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샤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샤라는 스스로 생각하기로서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무를 수행하느라 어미로서 아이들을 보살피지 못했고 왕실유모와 신하들에 손에 맡겨놓았지만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할 정도의 애정은 있었다. 왕자들이 성장하는 동안 샤라는 여왕으로서 통치를 하느라 자잘한 것까지 챙겨주진 못했지만, 왕자들은 사랑으로 잉태한 아이들이었다. 후계문제는 고민해야 할 중대사였지만 샤라는 좀 더 미래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녀들이 떠온 물그릇에 발을 담그며 여유롭게 족욕을 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국정을 돌보고 나면 내궁에서 휴식을 취했다. 새로 들어온 궁정학자가 해준 조언대로 행한 것이였다. 왕궁도서관에서 오래된 토판을 들여다보길래 학자인가 싶어서 샤라는 자신의 꿈풀이를 해달라고 청했다. 반듯하게 생긴 궁정학자가 말하길, 해몽에 관한 오래된 토판의 기록에서 불새나 정령,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는 꿈을 통해 계시를 내린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3년전 마누셰흐르 대학교의 바야르 교수가 집필한 정신의학서에서 따르면 꿈이란 과거의 기억이나 무의식의 표출이라 하였다. 궁전에서 격무에 시달리다보면 몸이 지치고 힘들 수 있으니, 업무를 마치면 처소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조언이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적절한 숙면을 취하라고 했다. 샤라가 누구인지 못알아본 것만 빼면, 굉장히 가치있는 조언이었다. 샤라는 잘 알았다며 그가 하는데로 행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리고 못보던 얼굴인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신참 궁정학자는 자신에 이름은 이사야인데 귀인께선 존함이 어찌되시냐고 물었다. 샤라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여왕폐하를 모시는 궁녀라고 대답했다.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쯤이면 여왕폐하의 새로운 남총**이라며 온 궁전에서 주시하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었다. 근래엔 정무 외에 시간엔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어서 남자들을 찾지 않았다. 시녀들이 물그릇을 치우고 샤라의 옷시중을 들었다. 침의를 벗고 시무복으로 갈아입은 뒤 신발과 반지를 끼웠다. 단장을 마치자 수석시종이 들어와 오늘의 일정을 알렸다. 예배당에서 정오기도를 드린 뒤 어전회의를 하고, 관료들의 알현을 받고, 각 지역에서 바친 공물을 받고, 정례보고를 받는 것이었다. 샤라는 수석시종을 빤히 쳐다보며 무심하게 듣다가, 문뜩 이사야가 생각이 났다. 정오기도가 끝나면 뭐하고 있을지 궁금증이 생겼다. 아직 신참이라서 사람들 얼굴도 다 못외운것 같은데 여왕의 남총으로 소문이 나면 선배 궁정학자들에게 괴롭힘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라는 수석시종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다. 여왕폐하의 수석시종 하킴은 정중하게 궁정식 절을 한 뒤, 무릎을 꿇어 앉은채로 존귀 존엄하신 폐하께서 원하시는 데로 하명을 하시라 읍하였다. 여왕께선 오늘 밤 같이 책을 읽고 싶으니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를 침소에 들라 전하라고 하명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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