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엄마! 내가 말한 걔야.”
주방에서 아줌마와 팬케이크를 만들던 은솔은 딸의 목소리에 현관 쪽을 뒤돌아봤다.
보예가 친구를 데리고 왔다.
“안녕하세요?”
긴 단발을 한 아이였다. 끝을 바깥쪽으로 살짝 만 단발은 다시 보니 참 잘 어울렸다.
백육십이 될까 말까 한 키에 전체적으로 말라 보였다. 굳이 네 가지 체형 중 하나로 요약하자면, ‘X, I, A, O’ 중 I형에 속하는 체형이다. 과일 체형으로 말할 때는 바나나, 도형 모양 체형으로 분류할 때는 긴 직사각형 모양(lean column)이었다.
은솔은 수많은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라서 체형으로 많은 정보를 읽어내곤 한다. 저 아인 잔병치레는 많지 않지만, 한번 아프면 크게 아플 유형이다. 마음이나 몸 모두.
“어서 와. 보예에게 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세리는 쑥스러워하며 은솔을 살짝 쳐다볼 뿐이었다. 눈치를 많이 보는 소심한 아이 같았다. 이렇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애를 우리 딸은 왜 좋아하나 모르겠다.
처음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겐 시간이 갈수록 신비하고 묘한 매력이 있다고, 은솔은 깨달았다.
외부에 무관심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만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한, 풋풋하고 은근한 과일 향 같은 매력으로 주위 사람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선이 짙고 긴 눈은 슬퍼 보이면서도 비밀을 감춘 듯한 모습이다. 긴 눈썹 가장자리에서 엷게 퍼져나가는 눈가의 홍조가 묘한 매력이 있는 애였다. 눈두덩이는 봉우리를 막 벌리려 하는 메리로즈 꽃잎 같다.
저런 묘한 눈빛은 수술로도 불가능하다.
자신을 이모저모 살피는 걸 아는 것처럼, 그 눈빛으로 세리가 은솔을 말똥히 쳐다보았다.
왜 그랬을까. 은솔은 눈에 레이저를 맞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밝은 빛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아. 이런 느낌은 얼마 만이더라. 의대 신입생 환영회 때, 그 남자 선배. 하얀 가운에 은테 안경 낀 첫사랑 선배를 처음 봤을 때 그 느낌 같달까.’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니? 어디 살아?”
은솔이 세리에게 묻는다.
“엄만 구닥다리처럼 그런 걸 왜 물어? 내가 남친이라도 소개하는 중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나도 이제 쿨맘은 아닌가 봐?”
“엄만 드라마 절대 안 보잖아. 그걸 묻는 이 순간부터 엄만 구식 아줌마가 돼 버린 거라고. 다 먹었거든요. 우리 내 방으로 갈까?”
딸이 친구의 손을 잡고 제 방으로 가버리려고 하네. 요게 벌써부터 ‘노인네’랑은 어울리기 싫다는 것이지.
“아빠는 사업하시고, 저 강 맞은편 아파트에 살아요.”
세리가 대답했다. 눈치가 빠른 아이네. 상황 파악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도 알고.
친구의 대답에 딸은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내리고 남은 팬케이크 조각을 께적거렸다.
강 건너 북쪽 강가 동네는 여기 남쪽 강가 동네만큼이나 비싼 동네이다. 아니 강을 남향으로 보고 있어 여기보다 비쌀지도 모른다.
보예네 집은 북향이지만 강이 가장 가깝게 붙어 있는 집들 중 하나이다. 거실과 안방에서 바로 강기슭의 나무들과 넓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빌라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제 엄마에 대해서는 왜 말 안 하는 걸까.
“엄마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텔레파시라도 통한 걸까. 상대방의 마음도 세심하게 헤아리는 재주까지 있다.
“저런.”
세리에게선 가끔 숨길 수 없는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그게 결손가정에서 자란 환경 탓일까. 은솔은 생각했다.
“와, 이런 칙칙한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엄마 계실 때 온 건 아닌데.”
“괜찮아. 이렇게 세련되고 우아한 ‘엄마’는 처음이거든.”
세리가 오히려 보예를 타일렀다. 그런데 세리는 왜 ‘엄마’라고 했을까. ‘선생님’이나 ‘아줌마’도 있는데. 하지만 이곳은 병원이 아니니 ‘선생님’은 이상하고, 남의 엄마를 ‘아줌마’라고 하기도 이상하잖아. 그냥 친구 엄마나 타인의 엄마를 ‘어머니’라고 친근하게 높여 부를 때처럼 그런 의미일까.
“어머! 예쁘다는 말보다 훨씬 감동인걸.”
“예쁘다는 말은 이미 귀가 닳도록 들어봤을 테니까요.”
세리가 또 대답했다.
“나 빼놓고 두 사람이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구나.”
보예가 말한다.
“호호호.”
“하하하.”
엄마와 친구가 서로 박장대소한다.
보예는 살짝 질투가 났다. 엄마와 친구가 또 다른 대화로 즐거워지기 전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야겠다.
“엄마, 세리 얘, 아랫배가 가끔 콕콕 쑤시듯 따끔거린대요. 맹장인가?”
보예가 엄마에게 말했다.
“그래? 왼쪽 오른쪽?”
“오른쪽이요.”
세리가 대답했다.
“심하진 않니?”
엄마가 세리에게 다시 물었다.
“아뇨. 아주 가끔 엄지손톱만 한 통증이 있을 뿐이에요.”
“그럼 언제 한번 우리 병원에 와 보겠니? 아 참, 명함 여기 있구나. 자.”
“고맙습니다.”
세리가 엄마가 건네준 명함을 받아들었을 때,
띵동!
벨이 울렸다.
“아빠다!”
보예가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고 우리 딸! 이거 받아라. 누가 왔나 보네?”
“친구가 왔어요. 으아, 내가 말한 그 파티 드레스이네.”
기다란 선물 상자를 받으며 보예가 대답했다.
세련된 양복 차림 중년 남자가 연한 노란빛이 감도는 나리꽃 한 다발과 함께 나타났다.
세리도 현관의 인기척에 뒤돌아보았다.
건강한 핏기가 도는 선홍색 얼굴에 중키, 패션 감각이 뛰어난 중년 남자가 나리꽃을 들고 들어왔다.
보라와 분홍의 중간쯤 되는 옅은 빛 셔츠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중년 남자가 나리꽃을 든 모습이라니.
“안녕하세요.”
“안녕. 친구인가 보구나. 자.”
대답하며 나리꽃을 아내에게 바친다.
“어머. 예뻐라. 오늘 무슨 날이에요?”
“자기가 가장 예쁜 날이지. 당신은 지금 그 어떤 전날들보다 더 예쁘니깐.”
“으이그. 그 멘트는 영 아니다.”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아이 몰라. 밥이나 먹어.”
엄마는 그렇게 대답하지만, 행복한 모습은 감출 수 없다. 세리는 알 수 있었다.
친구는 주방 식탁으로 달려와 드레스를 꺼내 세리 앞에 대고 있다.
“세리야 어때?”
금요일 밤에 입고 갈 순백의 파티 드레스였다. 흠잡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화려하지 않고 별다른 무늬 없이도 모든 남자들의, 아니 여자들까지 부러운 시선을 끌만 한.
‘저런 거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겠지? 아빠가 직접 주문해 주고 직접 찾아서 가지고 온 거니까.’
세리는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물론 금요일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가 세리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예처럼 아빠가 직접 맞춰다 주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