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 (2)

4244 Words
그는 PD가 내민 무슨 중요한 서류를 훑다가 노트북 위에 내려놓았다. 무슨 서류이길래 그다지 좋은 기색을 나타냈는가. “확실해?” 예상과 달리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예 감독님. 안타깝게도, 감독님의 영상에 투자하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는데요.” 그는 PD에게 짧게 시선을 준 후 말을 이어서 무뚝뚝하게 내던졌다. “정말 뻔뻔한 씨발새끼네, 분명히 투자하겠거니 했는데...” “그리고 하나 더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정적이 흐르는 동안 인내심을 잃은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 뭐냐고!!” “김애희 배우께서 출,출연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럼, 유아인은? 유아인 영화 할 거냐 안 할 거냐!!” PD의 입술에서 뱉은 말에 그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PD님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안 하겠대요. 아무리 설득한들 영화에 출연할 리가 만무한 듯합니다.” “뭐라고?!?” 분노에 휩쓸리던 그는 벽에 유리장을 던졌던 그때였다. 그가 하는 짓에 PD님의 가슴이 아려왔다. 막상 나한테 던지는 듯이 동시에 파닥파닥 뛰는 내 가슴이 뭉클하기 짝이 없었다. “감독님, 지,진정하세요. 달리 밥법은 있겠죠” “나 대한민국의 1등 감독이잖아!! 어떻-...아니... 이제 어떡할 거냐고! 6개월 동안 세부 전략을 세웠고, 리허설했고, 필름 포스터까지 작업을 했건만 이제 와서 영화 안하겠다고 날리야!! 그게 말이 돼!?” 그는 결국 분노로 응혈이 져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주먹으로 책상을 쾅하고 내리치고서야 말았다. “최 감독님... 제가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시-” “됐어... 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야. 일단 가렴.” PD가 아무런 말 없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후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들킬까 봐 걱정되는지, 내가 도망치듯 잽싸게 내 방으로 향했다. 들어가고는 조용히 문을 닫는 순간에 누군가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세게 내밀었다. 지은의 얼굴을 마주한 내가 흠칫 놀라며 눈이 커졌다. “뭐하고 그렇게 놀라?” ‘역시 들켰다.’ 생각이 들었던 두려움에 휩싸여 나의 몸이 돌같이 굳어졌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해하면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사촌의 물음에 빨리 답장하기에. “나, 그냥…” “그냥?...” 나를 긴장하려는 그냐가 성큼 발걸음 옮기면서 한쪽 눈썹을 찡긋 추켜세우다 피식, 웃었다. “왜 그리 긴장해? 어서 내려와. 저녁 식사 모두 준비됐으니.” “으,응” “아니...먼저 짐 정리해놓고 와.” “으,응...” 문을 닫기를 기다리자 내 속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함은 오래되지 않았다. 복도 쪽에서 삐걱거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듯, 내 문쪽을 응시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줄곧 단추를 끌린 와이셔츠에 짙은 남색의 바지를 입은 최시완이 들어왔다. “박하늘, 맞아요?” “네,네...” “반가워요. 최시완 감독입니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 오른쪽 주머니에 하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눈과 마주치면서 악수를 받아들였다. “내가 알기로는 하늘이 목포에서 온 거죠?” “네, 맞아요.” “아내한테 목포에서 필름 학과를 전공하는 중이라 들었는데?” “네, 그것도 맞, 맞아요”. 이게 무슨 상황인가.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나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이 분위기가 너무 어색한 너머지 쪽팔려 죽고 싶었단 말이다. 잠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어색하고 무거운 정적이 흐르더니 이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까 싶은 내가 헛기침하기만 했다. “...” “...” 계속 흐르는 어색한 정적. “그럼, 우리 식사할까요?” 먼저 입을 벌었던 시완은 내게 물었다. “네...” 이때, 그와 같이 주방으로 내려갔다. 내가 아닌 시완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서 의자를 깔고 앉았다. 나는 그를 따라와 맞은편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다들 뭐했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밥은 식힌 것 같애...” “미안해, 해야 할이 있어서 늦게 내려왔지.” “건강은 우선이잖아...” 지은한테 혼냈다. 시완은 쥔 포크에 카르보나라 파사트를 감아서 먹으며 그녀에게 시선을 주기만 했다. 게다가 그는 짜증을 감출 수가 없어 보였다. “있잖아 여보, 하늘이 영화 학과를 전공하는 중이거든. 내일 하늘하고 같이 촬영장으로 데리러 가면 얼마나 좋겠지?” “응...” “뭐, 일단 하늘이 졸업하고서 영화감독 되고 싶어해가지고-” “알았어...” 시완은 딱히 관심이 없는 어투였다. 누가 보면 둘이 서로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부부인 줄 알 것이다. 아내의 목소리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해서인지 그의 말소리에는 지침이 묻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쉽게 눈치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무거운 분위기를 풀 수 있을까. 그의 작품에 관련 얘기할까. 아니다…. 차라리 가만히 앉고 파스타 먹는 것이 더 낫다. 그저 내 앞에 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불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쓸 수밖에. “아이씨...우리 맨날 파스타라든가 스테이크 같은 것만 먹느냐?” 정적 흐른 후 그는 날카롭게 물었다. 짜증 날 때마다 시완의 버릇이었다. “왜? 파스타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는 게 자주 먹고 싶은 게 아니잖아. 이제 파스타에 질렸어. 내일 한식 먹자” “싫으면 먹지 말든가” 짜증을 내는 시온의 말에 지은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지은이는 스테이크라든가 파스타와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웬만큼 더 화려하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이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은 나는 조심스레 그릇들을 정리하다, 아이랜드의 커다란 싱크대에 놔두었다. 지은하고 감독에게 한 번 더 인사를 건넨 후 잘 먹겠다고 말하며 내 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방 안에 들어온 나는 문을 살짝 닫고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만 있고 다른 데로 이사 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무 졸린 내가 나슨해 드러눕자마자 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 피로감이 몰려왔으니 슬랙스의 주머니에 꺼낸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틀었다 무거운 두 눈을 감았다. 드디어 나를 힐링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방해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더불어,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잠시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만의 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즐겨 들을 때면 조금이라도 나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어떤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때 나는 눈을 감고 노래의 멜로디에 귀 기울일수록 음색이 더욱더 명랑해지는 순간. 내 안의 붉은 가슴이 이러히 빨리 뛰노는 듯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데다가 희열감까지 느낀다. 가사의 흐름을 따라 상상이 선명해질 대로 선명해지는 찰나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주로 꿈을 꾸기 시작할 때였다. “오늘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고생 많았다. 늘아...” 나 자신을 위로하며 중얼중얼 말했다. 밤 9시밖에 안 되건만 나도 모르게 노래를 들으면서 깊은 잠이 들었다. 아침 7시 34분이었다. 비몽사몽간에 지금 몇 시인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듯, 주변을 돌리는 도중에 무거운 눈꺼풀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상한 자세로 눕더니 뻣뻣 해버리던 몸을 일깨고자 스트레칭을 하다,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내 외투 주머니 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서 문 채 방에서 떠오르는 해를 마주 보고 있는 베란다로 통하는 여닫이문을 펄떡 열어젖뜨리며 나갔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전경이 괜찮다뿐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밀실 공포증을 느끼게 하는 주변의 경관이었을 뿐. 담배를 서너 번이나 연거푸 뻐끔거리며 남색과 주광색으로 섞인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인지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아주 높은 즐비한 고층 빌딩들의 그림자 뒤편으로 붉은 기 섞인 붉디붉은 빛의 편광프리즘이 나타났다. 오렌지색과 다홍색으로 동녘이 희읍스름히 밝아오고 있으면서 동시에 솟아오르는 해에서 퍼져나온 황금빛이 깊은 잠에서 서울을 깨웠다. 햇살이 눈 부시고 찬란하게 내 얼굴에 비추어서 앞에 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린 것을 보였다. 내 온몸의 살갗에 일렁거리는 뜨거운 불길이 닿는 모양이었다. 이내 베란다 밑의 여닫이문 소리를 들려왔다. 그였다. 최시완. 고동색의 목욕가운을 입은 그는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보며 다른 한 손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온 캐러멜마키아토를 담긴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나는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의자에 앉은 그가 목욕가운의 주머니에서 꺼낸 신문을 펴고는 각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랬다. 신문을 읽고 있는 동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가. 또 한 모금... 머그잔에 그가 매우 관능적인 입술을 갖다 대는 것을 보았다. 또 페이지를 넘기고 한 모금 마시고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한번 더 모금 마시고. 이렇듯 샅샅이 신문을 읽는 것은 섹시한 것이었다. ‘뇌섹남같이 보이네...’ 생각이 든 나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담벼락에 내박치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고 내려가는 길에 정원에서 들어오는 그와 시선을 마주친 그때였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는 그를 보자마자 급격하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안,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하면서 그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네, 하늘은?” “네...” 내 답에 그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서 부엌에 입장했다. 내가 뭘 잘 못 한 걸까? 아무렇지 않은 척, 나도 부엌에 입장하려던 찰나에. “남의 집에서 그런 더러운 짓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 그는 다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나의 반응에 그의 미간이 찌푸렸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작게 만드는 그의 낯빛에 내가 고개를 조아려 입을 다물기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란다에 담배를 피우는 짓이란 말이야.” 머그잔에 남은 마키아토를 싱크대에 따라 내며 죄절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나에게 분명해 말했다. “아...어떻-” “정원에서 그런 더러운 냄새를 맡았으니.” 나는 부끄러운 기색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죄...죄송합니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이상 날카롭지 않은 부드러운 언성으로 부탁했다. 내 입에서 또 나온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네’. 시간을 확인하자 위층으로 향해 떠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강한 성질이 있는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뒤미처 현관문 쪽에서 문을 열리고 맑고 생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박자박, 가벼운 발걸음의 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때, 지은임을 깨달았던 내가 문 뒤로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왔어요?” “어..왔어. 언제 일어났어?” 그녀의 몸매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검은색 레깅스와 흰 브라톱을 입은 지은이 내게로 다가온 채 물었다. “지은이 어디 갔다 왔어?” “응. 조깅하러 갔다 왔지.” 분명하지 않으냐 하는 듯, 지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그렇구나.” “아침 먹었어?” 남편의 머그잔을 씻으며 또 물었다. “아직이요.” “빨리 뭐 먹고 샤워하든가 해, 우리 남편은 널 데리러 갈 테니까.” “네?!” 무슨 촬영장인 건가. 왜 거기까지 나를 데리러 갈 건가. “온종일 집에서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청소하는 아줌마 불편하실까 봐. 늘이 필름 학과 전공한다고 안 그랬어? 너무 긴장하지 말고 경력을 쌓이는 것이나 생각해. 잘하면 우리 자기는 늘이 위해 추천서 써줄 거래.” 그 당시에 생각해보니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의미가 있는 경험이겠거니 했거니와 영화계에서 가장 훌륭한 감독 밑에 배울 기회가 생겨서 행복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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