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와 관절 1

4994 Words
며칠 전, 지용의 등장으로 한껏 예민해진 서현은 다시 한동안 보이지 않는 지용의 모습에 불쑥 짜증으로 치솟았던 마음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한테 들켰으니 이제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어젯밤이었다. 잊을 만하면 불쑥 나타나고, 잊을 만하면 불쑥 생각이 나는 그의 모습에 서현은 신경질이 났다.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사건 중에 '마약'이 포함이 되면 이 망할 전 남친 새끼가 엮이는지. 풀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러다가 마약쟁이랑 우리 팀이랑 은밀하게 물건이라도 주고받는 줄 알겠다. 오늘도 도망갈 생각 따위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서현은 인상을 찌푸렸고, 의는 다른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자연스럽게 지용의 손을 옭아매고 있던 수갑을 풀어줬다. 여유롭게 손목을 돌리고 있는 지용을 보자 속이 울컥 터지는 것 같아, 지용에게 총구를 겨눈 서현이 의에게 말했다. "티스, 그냥 구치소에 처넣자. 안 되겠어." "뭐?" "와우, 못 본 사이에 화끈해졌는데? 그렇게 나를 곁에 두고 보고 싶어하는 줄 몰랐어." "다시 수갑 채워" 그렇게 채우고 싶으면 네가 채워……. 손에 든 수갑을 쥐고 있는 의가 조심스럽게 서현에게 수갑을 건넸다. 의의 손에서 수갑을 건네받자마자 그가 갑자기 맥없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눈에 물음표를 가득 담고 있는 서현의 시선에 쓰러진 의 뒤로 서 있는 지용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서 등지면 어떡해." "제-발 나한테 작작 좀 들켜요. 강력팀이 나만 있는 줄 알아?" "걱정 마." "걱정이 아니라 이러다가 우리 팀, 당신이랑 마약 거래하는 줄 알겠어! 그리고 내 파트너 이렇게 기절시키면 누가 옮겨요! 힘 빠진 사람이 얼마나 무거운데!" 지용은 생글생글 웃으며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서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서현은 가까이 다가오는 지용을 눈치채고 경계의 눈으로 지용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용을 향해 겨눴던 총구는 아래로 내려왔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오면 명치에 주먹을 꽂아 버릴 테다. 서현의 눈빛을 읽었는지, 지용은 더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팔을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재회의 뜨거운 포옹도 안 했다. 그렇지?" "……사람이 왜 이렇게 뻔뻔해요?" "나라도 뻔뻔해야지." 한숨을 푹 쉰 서현은 3년 전처럼 장난스럽게 말하는 지용의 목소리에 결국 그 품에 안겨버렸다. 물론 1초 만에 후회하고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지용의 포박이 더 빨랐다. 밀어낼까, 아니면 쓰러져 있는 쓸모없는 파트너를 발로 차서 깨울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지용의 음성이 들렸다. "내가 필요할 거야." "……개뿔. 퍽이나 필요하겠네요." "믿고 싶은 대로 믿어.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왜 상관없는데?" 서현의 물음에 지용은 서현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서현의 어깨를 잡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3년 전, 마지막 날 그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그를 전부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서현은 지용이 여전히 속을 참 알 수 없는 사람인 것을 느꼈다. 지금 마주치고 있는 지용의 눈동자가 정말 지용인지, 거짓으로 만든 지용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던 눈이 휘어지자 금세 따뜻한 온도로 변해버린다. 이래서 내가 알 수 없다고 말 한 게 분명해. 서현은 생각했다. "나한테 또 빠질 게 분명하거든." "……뭐래." "그럼 난 간다. 우리 보스께서는 내 귀가가 늦어지면 예민해지시셔서." 지용은 서현의 이마에 입술을 꾹 찍고는 길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어떤 보스를 말하는 거야. 서현은 지용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벅벅 문지르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의를 발로 툭툭 쳤다. "일어났으면 가자." "헤헤, 눈치챘어?" 의는 서현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갑자기 픽 쓰러졌지만 얕게 때린 건지, 날바닥에 누워 있던 의는 차가운 기운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분위기가 영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자리 그대로 누워 있었지만 엄청난 식스센스를 가진 제 파트너는 자신이 일어난 것을 진즉에 눈치챈 것 같았다.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던 의가 먼저 빠져나는 서현을 따라나섰다. 서현이 운전석에 앉자 의는 재빠르게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웬일이야, 운전도 다 하고?" "오늘 기분이 안 좋거든." 서현의 말에 의는 사색이 되어 재빠르게 벨트를 매고 옆에 있는 안전 바를 잡았다. 오늘 두 번 쓰러지게 생겼다. 소란스러운 그의 행동에 서현은 픽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오늘 죽-었어. 어찌어찌 서로 돌아온 의는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며 건물로 들어섰다. 그의 모습에 오늘 서현의 기분이 좋지 않구나, 느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할 일을 했다. 지금 저 미친개에게 걸리면 광견병에 걸릴 것이 분명했다. 운전으로 스트레스를 조금, 아주 조금 푼 서현은 팀 방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소파에 누우니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만 같다. 뒤이어 종이 인형처럼 살랑거림을 보여주던 의도 들어와 제 자리에 앉았다. 세진이 의에게 찬물을 한 잔 주었고, 의는 반짝이는 눈으로 세진을 보고 컵을 받아들었다. "AG 브로커는 잡았나?" "잡아도 돼요?" "그럼."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인 세진에 서현은 눈을 반짝였다. “진짜, 진짜로 잡아도 돼요?” 세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어요! 아, 녹음이라도 해야 하나?”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진 서현은 신나게 일어나 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 그동안 티스가 찡찡대며 부탁한 것들도 처리해 줄까? 마음에 여유가 생긴 서현의 말에 의가 재빠르게 서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열심히 주물렀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세진은 티스가 옛날에 태어났다면 감언이설을 잘 하는 간신배의 역할이 적당했을 것이다,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팀 방에 화기애애한 웃음이 흘러넘쳤다. 제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여러 사건 파일을 정리하던 세진이 한 파일을 보더니 두 사람을 불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던 두 사람이 미소를 유지하며 제 팀장을 바라봤다. 세진은 환한 얼굴과 대비 되는 말을 내뱉었다. "살인 사건이야." "아아- 우리 3분 전에 들어왔어요!" "알고 있어. 3분 뒤에 살인 사건 일어난다고 해도 엉덩이붙이고 앉아 있을 건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세진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겨우겨우 세진에게서 사건 파일을 건네받았다.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종이를 사용해. 투덜거리며 의가 파일을 열자 해괴망측하게 뒤틀어진 시체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툭- 툭- 떨어졌다. 비위가 약한 의가 우욱- 하며 고개를 돌리자 서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제 파트너를 바라보고 시체 사진을 들었다. 쟤는 비위도 약하면서 왜 강력팀이야. 시체를 유심히 들여다본 서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음. 이건 좀 심한데? 시체의 관절들은 살아 있다면 절대 꺾이지 않을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고, 얼굴은 고전 영화 '조커'에 나오는 조커처럼 기괴하게 화장이 되어 있었다. "사건번호, 4931-2 조커와 관절." "진짜, 네이밍 센스……." 지용의 AG 활동명(판타지)도 분명 저 사람이 지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든 서현은 사진을 의에게 넘기고 파일을 건네받았다. 사진 속 시체를 제대로 본 의는 욱욱 거리며 결국 사진을 내던져 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본 서현은 사진을 주워 사건 파일에 끼워 넣고 세진을 바라보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윈드, 저 파트너 바꿔주세요." 세진은 서현의 필살 애교 웃음에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돼." 그럼 그렇지. 서현은 언제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개정색을 하고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안에서 속을 게워내고 있는 제 파트너와 함께 사건 현장으로 곧 떠날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파트너를 기다리던 서현은 결국 10초 내로 나오지 않을 시 흑역사를 까발린다는 큰 소리를 내자, 창백한 얼굴로 뛰쳐나오는 의를 데리고 차로 향했다.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1분 1초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 쳐넣어야만 했다. 망할 살인자 새끼. 차를 타고 조금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자, 미식 거리는 속을 물로 잠재운 의와 초지일관 무표정으로 운전한 서현이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폴리스라인을 지키고 있는 경찰 두 명에게 경찰 배지를 보여주며 관등성명을 했다. "강력팀에서 나온 퀸, 티스입니다." "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사건 현장이 훼손되지 않게 장갑과 장화를 착용한 두 사람은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왔다. 사진에서 보던 시체는 부검실로 옮겨졌는지, 시체가 있음을 알리는 흰 데드라인 만이 존재했고, 그 외에 증거품으로 보이는 것들엔 숫자로 된 작은 팻말들이 옆에 세워졌다. 물로 속을 겨우 잠재운 의는 시체도 없는 현장을 보자 사진 속 시체가 생각이 났는지 간간히 우욱거렸지만 옆구리를 푹 찌르는 서현의 손길 덕분에 울렁거리던 속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참을 꼼꼼하게 현장을 둘러보던 두 사람은 수사대가 발견한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현장을 빠져나왔다. "족적만 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어." "그러게. 이번 살인자 완전 사이코패스야." "살인하는 새끼들은 원래 사이코패스야." "인정." 고개를 끄덕인 의는 앞 골목에서 갑자기 사라진 검은 물체를 봤다. 고개를 돌리자 서현도 같은 눈빛으로 의를 바라봤다. 의는 내가 옆 골목으로 빠질 테니까, 네가 앞으로 가. 라는 사인을 주었고, 두 사람의 포지션이 확실해지자 동시에 우다다- 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골목 안에 있던 그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검은 물체는 우왕좌왕하다가 양옆으로 포위하는 두 사람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너, 이 새끼!" "아악!!" "야야, 티스. 잠깐만!" "잉?" 의는 생각보다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는 것에 놀라며 재빨리 손목을 잡고 몸 위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짓눌린 얼굴을 보아하니 이제 막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헉, 내가 이런 작은 아이를 위에서 짓누르다니! 괜한 죄책감이 든 의는 잡고있는 손목은 그대로 두고 제 머리를 콩콩 때렸다. 서현은 그런 파트너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의에게 손이 잡힌 채, 울먹이는 남자아이를 향해 말했다. "왜 훔쳐본 거야?" "안 훔쳐봤어!" "어디서 반말이야." 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먹으로 아이의 머리를 내려쳤다. 악 소리도 내지 않은 아이는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서현을 노려보던 눈을 아래로 깔고 찌질 하게 말했다. "..요!" "그럼 왜 도망갔는데?" "……." 묵비권을 행사하는 남자아이가 영 수상한 서현이 체포- 라고 말하자마자 아이가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에 당황한 의가 손목을 놓자, 아이는 이제 엎드려서 제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계속해서 울었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본 서현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지(파트너의 구토 덕분에 항상 들고 다닌다.)를 아이에게 건네주며 따뜻한 손길과는 다른 목소리로 의에게 말했다. "체포해." 단호한 서현의 목소리에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일단 아이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녀의 상황 판단력은 항상 옳았으니, 이번에도 옳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서럽게 엉엉 울면서, 손목에 수감이 채워지면서도 서현이 건네준 휴지로 눈물을 벅벅 닦았다. 의와 서현이 차로 연행하면서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아이의 눈물은 마를 줄 몰랐다. 그 울음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은 의는 월급이 들어오는 즉시로 귀마개를 사야겠다며 단단히 결심했다. 일단 심문실로 가게 된 아이는 TV나 영화에서나 보던 곳에 들어오자, 놀랐는지 울음을 멈추고 딸꾹질을 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본 서현이 앞에 앉으며 픽 웃었다. "누가 시키든?" "네?" "어떤 새끼가 너한테 우리 훔쳐보라고 시켰냐고." "……." 아이는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고 수갑 찬 손을 들여다봤다. 쩔그렁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수갑을 보니 새삼, 이제는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울컥 눈물이 차오르려는데,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우리가 도와줄게. 말 해줘. 수갑 채운 건 진짜 범인이 근처에 있을까 봐 한 거니까 곧 풀어줄게."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 할 수 없다며 더듬더듬 내뱉었다. 그 말에 서현은 버튼을 누르고 뭐라 뭐라 말하자, 곧 심문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의가 들어왔다. 테이블에 컵을 놓고 두 사람이 사라졌다. 심문실 밖에 있던 세진에게 다가간 서현은 스트레칭을 가볍게 했다. 의는 서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의문을 가졌지만, 제 파트너가 헛으로 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옆에 앉았다. "저 아이가 범인인가?" "윈드는 쟤가 사람 죽인 것 같아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세진을 본 서현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은 얼굴만 보고 누가 범인인지 대충 알면서 나한테 괜히 물어보네. 옆에서 또 괜히 소외감을 느끼는 의가 불퉁하게 볼을 부풀렸다. 왜 나만 몰라! 그러자 서현이 의를 바라봤다. "내가 왜 체포했는지 알 것 같아?" "헉- 설마 쟤가 범인이야?" "너는 저 손목 직접 잡아 보고도 모르겠냐." 으음. 분명 시체를 꺾을 정도로 단단한 손목은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한 의는 설마, 하는 경악 가득한 표정으로 서현을 바라봤다. 그 표정의 뜻을 읽은 서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빙고." 저 아이는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생존자였다. 목격자이자 생존자임을 알게 된 의는 당장 저 아이에게 증언을 받자며 난리였고, 대충 아이의 상태를 눈치채고 있는 서현은 안 된다며 의를 막았다. 의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당장 다음 피해자가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데 좋은 방법을 두고 왜 돌아 가자는지, 서현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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