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4

2934 Words
목차 5. 아이라만 6. 샤흐라자드 아이라만 _ 재상.  지상에서 두번째로 높은 자리. 지고의 여인의 바로 아래. _ 궁정의 포도주는 항상 맛이 좋다. 궁정의 진상되는 향신료와 보석은 항상 상등품 뿐이다. 궁정은 풍요로운 왕국에 신민들이 진상한 가장 좋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백단향을 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구며 아이라만은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아이라만은 하그리아 왕국의 재상이다. 강대한 왕국은 13명의 왕들이 일구어 놓았다. 그중에선 왕국의 해를 끼치는 암군이나 폭군도 있었으나 지금의 왕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셨다. 왕국의 동, 서, 남 속령은 영웅 루스탐께서 생전에 복속하셨고, 영웅 루스탐의 외동딸인 여왕폐하께서 북부를 복속하고 몇개의 군현을 손에 넣어 자치령으로 삼으셨다. 거대해진 왕국을 다스리게 되니 군인과 관료와 학자들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 나의 여왕께서는 언제나 기대에 부흥하는 분이셨다. 부친과 형제자매들의 원수를 갚겠노라며 밑바닥부터 악착같이 올라온 19살 여인에게 13살 소년이던 아이라만은 눈을 떼지 못했다. 뛰어난 군재와 강인한 정신은 그녀의 외모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어렸던 자신을 신하로 받아주셨고 왕좌를 손에 넣은 뒤엔 왕국의 2인자로 임명해주셨으며, 아이라만의 피를 이은 아들도 낳아주셨다. 물론 역대 권력자들이 그렇듯이 아이라만의 왕자를 낳은 뒤엔 여러 사내들을 품으셨고, 눈에 거슬리는 왕자들을 낳으셨다. 왕자들은 샤흐라자드 폐하의 피를 이어받아 외모와 재능은 출중했지만, 그들의 아비들은 천한 신분의 용병과 노예였다. 2왕자 이스카와 3왕자 스피타만은 분명 하그리아 왕국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내 아들 1왕자 아르샨 전하의 앞길에는 해가 될 것이다. 아이라만은 욕조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종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젖은 몸을 말리고 실내복을 입고 욕탕을 나와 휘장이 쳐진 테라스로 건너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휘장이 살랑거렸다. 시종은 포도주가 담긴 쟁반을 받쳐들고 왔다. 아이라만은 꿀이 들어간 포도주를 편하게 한 모금 음미했다. 감미로웠다. 니스 자치령 태수가 진상한 포도주는 왕궁에서 여왕과 재상만 마실수 있는 최고급품이다. 아이라만은 니스 산 포도주를 가장 좋아했다. "아버님께선 항상 목욕 후에 포도주를 즐기시는 군요." 휘장 너머 내실에서 며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라만이 돌아보자 파리사티스 왕자비는 싱긋 웃으며 궁정식 절을했다. 금빛 장신구와 주황색 드레스는 그녀의 검고 윤기있는 피부색과 잘어울렸다. 궁정식 예절은 왕가의 맏며느리 답게 기품있고 흠잡을 곳이 없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아버님은 왕국의 재상으로서 공사다망하신데 며느리인 제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한걸요." 아이라만은 포도주를 들고 내실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시종에겐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시종이 물러나자 파리사티스도 아이라만에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상아를 깎아 만든 장기판과 기물이 올려진 테이블만이 존재했다. 기물에 배치로 보아 파리사티스가 저번에 했던 대국을 복기해 놓았다. "어제는 미쳐 승부를 보지 못했으니 오늘은 꼭 승패를 가려야겠구나." 아이라만은 기물들을 원위치로 배치하고 붉은 색 기물에 손을 뻗어 장군을 두칸 앞으로 움직였다. 파리사티스는 싱긋 웃으며 흰색 마술사 기물을 한칸 뒤로 움직였다. 왕, 재상, 장군, 마술사, 사제, 병사로 이루어진 붉은색 기물과 흰색 기물들이 64칸의 장기판을 오가며 팽팽한 전투를 벌였다. 아이라만 재상은 공무를 처리할 때 만큼 집중했다. 반면 파리사티스 왕자비는 다과를 들 때처럼 편안하고 수월하게 기물을 움직였다. 몇십 차례를 주고받으며 기물들이 움직이더니 흰색 장군이 붉은색 왕을 잡으며 판은 끝이 났다. "후우.. 너에겐 당해내질 못하겠구나. 나도 궁정에선 장기를 잘 두는 편이라고 자부심이 있는데." "그래도 제 상대로선 손색이 없는 걸요. 아버님과 두는 건 즐거워요." "그래 나도 너와 둘 때 마다 실력이 성장하는 것 같아서 좋구나." 아이라만은 포도주를 다시 들이켰다. 이마에 손을 얹으며 긴 의자에 깊숙히 몸을 기대었다. 비단 방석과 등받이가 등에 닫는 감촉이 좋았다. 파리사티스는 싱긋 웃으며 주황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부모님이나 궁정학자들보다 훨씬 좋은 상대였다. 왕국에서 제일가는 장기기사인 자신과 오랫동안 대국을 펼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기사**였다. 왕국의 2인자이자 여왕폐하의 부군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시는 자신의 시아버지는 존경에 대상이었다. "아르샨은 잘 하고 있느냐?" "그럼요. 마누셰흐르에 유학갈 준비는 이미 끝맞쳤습니다. 입학시험에 합격만 하시면 바로 출발할 수 있지요." 아이라만의 이마가 지끈거렸다. 애석하게도 고귀한 혈통과 선한 성품을 제외하면 1왕자에겐 장점이 없었다. 여왕의 군재와 외모, 아비인 자신의 두뇌와 통찰력은 아르샨 왕자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천한 아비를 둔 이스카 왕자와 스피타만 왕자는 제왕의 풍모에 어울릴만한 자질을 갖췄는데 자신의 아들은 그러지 못한게 한이였다. 그나마 명문가 출신에 똑똑한 며느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디제 왕비에 선례처럼 파리사티스는 강력한 왕국을 다스리는 왕비가 되고 싶어했다. 하그리아의 왕이 되는데 대학졸업장이 필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두뇌나 무예, 외모에서는 밑에 왕자들보다 쳐지는 건 사실이었다. 뛰어난 둘째나 셋째가 아닌 혈통만 좋고 덜떨어진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어떤 일이 발생할 지는, 이미 라지한 선왕과 샤흐라자드 여왕이 보여주었다. 2왕자 이스카는 조부인 '영웅' 루스탐에 비견될만한 천재이고, 3왕자 스피타만은 마누셰흐르 대학 교수들에게 사사받고 있다. 적어도 마누셰흐르 대학교에 입학은 해야 아르샨이 잡음없이 왕실후계자로 선정될 것이다. 아이라만의 생각을 읽었는지 파리사티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저는 제 남편을 반드시 왕으로 만들 것입니다." 파리사티스의 품위있고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아이라만의 근심어린 표정이 누그러졌다. 골치아픈 타흐마탄과 이스카가 설치지 못하게 견제하고, 소흐랍과 스피타만을 북부속령으로 쫒아내도록 중신들을 움직인 며느리였다. 파리사티스가 느릿하게 황금 잔에 니스 산 포도주를 부우며 말했다. 모슬린 천으로 짠 휘장이 산들거리는 바람에 넘실거리고 화려한 오색 타일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요즘 여왕폐하께서 제 오라비를 침실에 부르지 않으셔요. 관심을 주는 다른 사내가 생긴것 같아서 시녀들을 수소문해보았습니다. 여왕께선 최근에 신참 궁정학자에게 마음을 주신 것 같더라고요. 어제 그 사람에게 상아 필기구를 선물해주면서, 오늘 정오기도가 끝나면 만나서 장기를 두기로 했어요. 얼굴은 반반했는데 어떤 사람인지 좀 더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아이라만은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왕이 미녀를 찾는건 당연지사, 자신의 여왕도 지위에 걸맞게 미남을 찾는 건 정당했다. 여왕폐하에 침소에 몇명이 들락거리던 왕국의 2인자인 아이라만의 지위는 반듯하다. 걸리적거리는 두 왕자도 아이라만은 언제든지 치울 수 있다. 그저 샤흐라자드 폐하의 핏줄이고 아비들처럼 망나니는 아니니 두고보는 것 뿐이다. 천재라는 2왕자는 천한신분의 무희를 아내로 삼아서 든든한 처족도 없고, 3왕자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아비를 닮은 예쁘장한 얼굴만 빼면 별볼일 없었다. 3왕자 스피타만의 약혼녀가 서부속령 총독의 외동딸이지만, 그 영애는 정치에 관심없는 유약한 성품이고, 변방을 다스리는 총독 가문 따위보단 중앙에 기반을 둔 자신과 자신의 며느리가 더 좋은집안이었다. 내무대신인 부친과 법무대신인 모친을 둔데다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똑똑한 며느리가 있다. 자신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파리사티스는 시아버지의 표정을 읽더니 싱긋 웃었다. "곧 정오기도에 갈 시간이니 준비하셔요.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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