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6

3754 Words
스피타만 칸페자 교수가 출제한 시험문제는 매우 까다로웠다. 괴짜같은 천재답게 그녀의 과제는 항상 스피타만의 머리를 쥐어짜게 만들었다. 마누셰흐르 대학교의 약초학 교수인 그녀는 스피타만 왕자를 위해 예니사라이 자치령에서 머나먼 북부로 출강하러 왔다. 마누셰흐르 대학 교수 중에 스피타만 왕자의 공부를 봐주는 교수들은 여러명 있었다. 대부분은 거리가 멀어서 전서구를 통한 편지 교류로 수업과 과제를 제출하는 방법이다. 귀찮은 방법이였지만 스피타만은 꼬박꼬박 교수들의 방식을 잘 따라갔다. 전서구가 미쳐 도착하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면 스피타만은 교수들이 내준 과제는 한번도 빼먹지 않고 잘 제출했다. 스피타만의 학업능력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각종 허브와 구근, 약품을 다루느라 외부활동이 잦은 칸페자 교수는 특히나 열성적이었다. 그녀는 스피타만을 직접 만나서 가르치고 싶어서 무리하게 일정을 쪼개 출강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물론 대학생 수준의 공부는 14살에겐 너무 이르고 버거운 것이다. 혹자는 소흐랍 총독이 아들의 교육에 너무 심하게 몰두한 나머지, 아들을 과하게 몰아세우는 거라 생각할테지만, 이는 모두 스피타만이 자원한 것이다. 호두나무를 깎아서 만든 거대한 책상에 앉아 두꺼운 양피지 교재와 토판을 들여다보며, 교수들이 편지로 출제한 문제들을 해치웠다. 학업은 물론이고 총독인 아버지의 대리로서 북부속령의 토호들, 행정관들, 사제들에게 알현을 받고 정례보고를 받았다. 스피타만은 북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세금은 얼마나 걷히는지, 추위로 동사하는 사람이 매년 몇명이나 되는지, 돌림병이 도는 마을은 몇 부락이나 되는지, 곡식과 가축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웃 나라와 교역은 어찌되었는지, 북부의 국경에서 분쟁이 몇 차례나 있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피타만 왕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 외모만 아름다운 소년으로 알고있지만, 평범한 14살 답지 않게 스피타만은 총기있는 소년이였고 준비된 왕위계승자였다. 스피타만은 어렸지만, 왕위계승 후보라는 자신의 위치를 잘알았다. 그리고 자신과 아버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형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형들과 살던 왕궁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은 권력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마음같아선 스피타만은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형들과 경쟁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스피타만의 큰형 아르샨과 작은형 이스카는 착하고 좋은 형들이다. 세명 모두 아버지는 달랐지만 삼형제는 잘 어울리며 놀았다. 착한 아르샨 형은 동생들을 잘 놀아주었고, 재주 많은 이스카 형은 이것저것 조립해서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어주었다. 형들과 노는 건 즐거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린애들 처럼 놀기만 할수는 없었다. 그들 삼형제는 왕자였다. 왕위를 두고 서로 싸워야 하는 위치였다. 스피타만은 제일 나이가 어렸지만 눈치는 빨랐다. 어마마마께서 자신과 아버지를 북부로 보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중신들과 재상, 파리사티스 형수가 있었다. 아르샨 형의 아버지인 아이라만 재상과 아르샨의 형의 아내 파리사티스 형수는 소흐랍 총독과 스피타만 왕자를 싫어했다. 아이라만 재상은 아르샨의 경쟁자가 될 동생왕자들을 미워했다. 천한태생의 아비들을 둔 왕자들이 자기 아들의 지위를 위협할까봐 몹시 경계했다. 스피타만은 아이라만 재상과 파리사티스 왕자비의 대응이 이해되었다. 아르샨 형이 셀림 전하 꼴이 될까봐 예민하게 대응하는건 혈육으로서 응당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어마마마의 첫남편이었던 셀림 폐국서 전하는 살레굽 제국의 13황자로 태어나셨지만, 제위계승권이 낮고 변변한 기반이 없고, 별다른 재능이나 인물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보니, 살레굽과 동맹을 맺기위해 볼모로 장가를 온, 그저 고귀한 혈통이 그분께서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셀림 전하는 쓸모가 없어지자 곧바로 폐위되어 지금까지도 감옥에 갖혀있다. 어마마마는 12대 왕 라지한처럼 타고난 혈통 외에 내세울게 없는 사람을 싫어하셨다. 라지한 왕은 11대 샤리아르 왕과 정실인 소그다니아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복동생인 '영웅' 루스탐 왕자보다 훨씬 덜떨어졌고, 왕위에 오른뒤론 의미없는 살생과 폭정만을 저지른 자였다. 그래서 어마마마께선 신분보다는 능력있는 자들을 등용하셨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상비군을 조직하고, 학자를 양성하셨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면서, 늘상 자신의 뒤를 이을 왕자는 반드시 왕이 되기에 걸맞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고 여기셨다. 배우자는 물론 핏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어마마마께선 섭정왕비 하디제처럼 훌륭한 아내는 아니었고, 성녀왕 타흐미네처럼 자애로운 여왕도 아니셨다. 또한 현명왕 미흐리마처럼 아들에게 헌신적인 어머니도 아니다. 흑단같은 머리카락에 흑녹색 눈동자를 가진 처연한 백합꽃 같은 미모와 달리 어마마마는 군사를 일으켜서 왕좌를 쟁탈한 분이셨고, 가장 선봉에서 적을 물리치는 군인이었다. 어마마마는 이상적인 통치자였지만, 좋은 어머니나 좋은 아내는 아니었다. 아들 셋은 유모들과 신하들에 손에 맡겨놓았고, 장래에 왕위계승자로 대하며 항상 냉정하고 엄격하셨다. 어마마마가 보기엔 왕실의 장남인 아르샨 형은 외모도, 머리도, 능력도 평범한 수준이어서 어마마마의 눈에 차지 않았다. 따라서 재상에 눈에는 이스카 형과 자신이 눈엣가시였다. 스피타만은 어렸지만 아이라만 재상이 자신과 이스카형을 싫어하는건 눈에 띄게 알수 있었다. 아르샨 형은 동생들과 놀다가도 아버지인 아이라만 재상께서 눈치를 주면 이부동생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아이라만과 똑같은 입장인 타흐마탄 장군은 스피타만이 장난을 치면 잘 놀아주었고, 피 한방울 안섞인 아르샨 왕자의 검술이나 승마를 열심히 지도해주었다. 타흐마탄과 이스카 부자는 왕위나 권력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특히 이스카 형은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다며 성인이 되자마자 권력의 기반이 되줄 훌륭한 가문의 영애가 아닌 천한 무희와 결혼했다. 외할아버지인 영웅 루스탐에 버금가는 외모와 재능을 가진 이스카 형이 왕위를 포기한다면 스피타만에겐 기회였다. 스피타만 부자가 왕도에서 북부속령으로 가게 된 것을 아버지인 소흐랍 총독은 쫒겨났다고 생각하지만, 스피타만은 도약을 위해 준비할 기회라 생각했다. 북부속령은 춥고 험준한 땅이라 궁정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아니한다. 중앙에 영향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힘을 키우고 경험을 쌓을 최선의 장소였다. 스피타만의 약혼녀인 미르셀라의 친정, 서부속령과 동맹을 맺었으니 서부를 통해 하그리아 밖에 외국과 교역의 문호도 열렸다. 덕분에 평생동안 왕도와 북부속령만 알던 스피타만의 세계는 더욱 넓어졌다. 국외에 여러 나라들은 세 왕자들 중 누가 후계자가 될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강대국인 살레굽 제국은 하그리아의 차기 국왕이 누가 되는지 매우 주시했다. 하그리아 궁정에서는 1왕자비와 2왕자비가 기싸움을 하고 관료들이 출세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스피타만은 궁중의 정치나 암투보단 국외로 눈을 돌렸다. 하그리아의 신민들은 대부분 왕궁 밖에서 살았고, 백성의 삶을 보살피기 위해선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해야 했다. 북부는 이민족이 침략이 잦고, 신앙과 문화가 달라서 통치에 어려움이 많지만 오히려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교류를 하는데 있어서는 유리했다. 이 세상엔 코끼리 신을 모시는 나라도 있고, 머리가 3개인 신을 모시는 도시도 있고, 여자이면서 남자인 신을 모시는 마을도 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북부속령 사람들처럼 세상엔 신이 여럿있다고 믿었다. 스피타만에겐 익숙한 환경이었다. 그러니 기회였다. 제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수고도 감행할 수 있다. 스피타만은 훌륭한 왕이 되고 싶었다. 또한 궁전에서 호의호식만 하는 형들보다 자신이 왕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어려웠던 문제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스피타만은 씩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비샤르." 스피타만은 자신을 모시는 수석시종의 이름을 불렀다. 졸고 앉아있던 수석시종 비샤르는 이름이 호명되자 바로 정신을 차렸다. 스피타만은 작성한 답안지를 비샤르에게 내밀었다. "숙제 다했어, 이거 칸페자 교수님께 가져다 줘." "알겠습니다. 스피타만 전하." 비샤르는 스피타만이 작성한 답안지 뭉치를 들고, 꾸벅 절을 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스피타만은 비샤르를 막아세웠다. "잠깐만 이것도 가져가." 스피타만은 책상 서랍에서 편지를 두장 꺼내었다. 한장은 고급종이로 된 멋스러운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봉랍이 찍혀있지 않은 양피지 편지였다. 스피타만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이 두장은 각각 보내는 곳이 달라. 전서구를 두 마리 준비해서 보내줘. 우선 이건 살레굽 제국의 황궁 대사 아흐메드님께 보내는 서신이야." 스피타만은 고급종이로 된 편지를 쥐어주며 말했다. 비샤르는 왕자가 준 편지를 두손으로 받았다. 그러고서는 또 다른 편지에 눈길이 갔다. 저건 어디로 보내는 편지길래 왕자께서 서랍안에 꼭꼭 숨겨두다가 내민 것일까? "그럼 나머지 하나는 어디로 보낼까요?" "하그리아 왕궁의 시녀 루키예에게 보내. 루키예는 네 약혼녀라서 잘 알지? 루키예의 가문이 셀림 전하랑 엮여있어서 운 나쁘면 어마마마의 시녀 일 그만둬야 한다면서? 이걸 루키예에게 보내주면 그 애의 고민이 반쯤은 해결될거야." 비샤르는 약간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몇달 전에 불평거리며 한 말이었는데 주인이신 스피타만 전하께서 잊어버리지 않으셨구나. "세상에! 스피타만 전하 감사합니다! 아아! 왕자전하께선 성자님의 현신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 기쁜 전갈을 빨리 루키예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샤르는 꾸벅 절을 한 뒤, 신나는 발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스피타만은 씩 웃었다. 책상에서 일어나 턱을 괴고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순백으로 물든 세상은 티끌하나 없이 깨끗했다. 마치 고민따위 없이 명확한 스피타만의 머릿속 같았다. 또한 저 편지를 받게 될 루키예도, 아니 루키예라면 조금 망설일 수는 있겠다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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