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4883 Words
[돌아간다] 시원은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쓰는데, 저 멀리 진선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다. 애원하듯 간절함을 담아 그녀에게 손을 뻗어보지만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너를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시원의 두 눈엔 눈물이 고이고, 순간 지난 시간이 영화 필름을 돌리듯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간다. 연이어 두 번째 클리어 소리와 함께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던 시원의 머리 위로 눈부시게 하얀 빛이 내려와 온 몸을 감싸주었다.   잠시 후, 커다란 섬광이 내리꽂듯 시원의 몸을 통과하자 공중에 떠 있던 그녀는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쳐지며 곤두박질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추락하던 시원은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악!”         ***   탁! 탁! 탁! 지도봉으로 교탁을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놈! 아무렴 점심 먹고 난 뒤의 5교시 수업이라 식곤증이 몰려와도 그렇지.”   “여긴... 여기가 어디지? 왜 학교가...?”   “졸던 주제에 꿈까지 꾼 모양이네? 수업 중에 갑자기 소리를 질러 애들을 놀라게 하질 않나, 기껏 깨워놨더니 헛소리를 하질 않나. 원 녀석, 잠깐 사이 달게도 잤다. 어서 가서 세수하고 정신 차리고 와!”   “네? 어딜...”   “어디긴, 화장실 가서 세수하고 오라고!”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한가로운 오후. 수업 중에 졸고 있던 시원이 소리를 지르며 깨자, 한국사 선생님은 교탁을 두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그리곤 여전히 덜 깬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시원에게 나가서 씻고 졸음 좀 깨고 오라며 농담을 하셨고, 그 말에 반 아이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어리바리한 시원의 모습을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다들 봄이라 춘곤증에 잠들 오지? 자! 양쪽 어깨를 쭉 펴서 스트레칭하고, 이제 철기 시대로 넘어 간다~”   “네~”       도무지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지만, 시원은 일단 교실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자신은 고통 속에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고, 공중에서 떨어져 땅으로 곤두박질쳤었는데.. 눈을 뜨니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교실이라는 게 도저히 이해되질 않는다. 게다가 교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전 고등학교 시절, 그것도 2학년 7반의 기억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사물함 바로 앞의 창가 자리는 고2 때 시원이 가장 좋아하던 지정석이었기에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이리저리 유추해본다. 하지만 현실이라기엔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그것도 예전 고등학교 2학년 때 지정석 이었던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던 중이라니... 시원은 말도 안 된다며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다는 거라 생각했다.       복도는 교실 여기저기서 수업하는 소리로 가득했고, 창밖 너머에는 목련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 옆의 운동장 한쪽에선 체육 수업 중인 건지 한 무리의 학생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피구를 하는 모양새다. 낯익은 꽃 내음과 익숙한 흙냄새가 섞인 교정의 모습들.. 이 모든 건 시원이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시절의 기억들이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다. 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교실을 나와서 복도를 따라 화장실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보며 ‘원래 꿈이 이렇게까지 생생했었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시원은 화장실 앞에 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화들짝 놀랐다. 짧은 커트 머리에 치마 교복을 단정히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그리웠던 그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급히 찬물에 세수를 해봐도 거울 속의 모습은 그대로다.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시원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혹시나 한 마음에 손으로 온 몸을 훑어보고, 볼도 꼬집어보지만 아픔이 느껴져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학교 복도를 둘러보던 그때, 5교시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고 조용했던 복도는 금세 한 무리의 여고생들로 채워져 재잘거리는 소리, 까르르 웃는 소리로 정신이 없다.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는 듯, 넋 나간 사람처럼 주변만 두리번대던 시원에게 다가온 한국사 선생님은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한대 먹이시곤 교무실 쪽으로 향하셨다. “세수하고 정신 차렸으면 바로 들어와서 수업이나 마저 들을 것이지 여기서 뭐 해? 다음부턴 안 봐줘.”     멀어져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원에게 누군가 다급히 달려와 그녀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는다. 승주였다.     “하암.. 봄이라 그런지 식곤증이 심하네. 너도 아깐 엄청 졸더라?”   “어? 너는 승.. 주?...”   “뭐야, 아직 잠 덜 깼어? 우리 매점 가서 커피나 사 오자!”     승주는 친구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르곤 매점으로 이끌었고, 시원은 그녀를 따라 걸어가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익숙한 얼굴들이 계속 보였다. 시원의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후배들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며 관심을 보이지만, 시원은 여전히 정신이 없다.     그때, 매점 옆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오는 진선의 모습이 보였다.   시원의 심장은 그녀를 처음 본 날처럼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가워 할 새도 없이 진선은 자신을 보고 “안녕하세요?”라며 가벼운 묵례를 한 뒤,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승주야. 지금 몇 년, 몇 월, 며칠이지?”   시원은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진선을 보며, 지금이 언제인지 승주에게 묻는다.       “오늘? 97년 3월 7일이잖아. 그건 왜?”   “1997년 3월 7일...”   시원은 승주의 말을 곱씹어보며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치곤, 진선이 왜 자신을 보고도 반가워하지 않고 어색한 인사와 함께 재빨리 스쳐 지나갔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진선을 처음 만났던 날은 97년 3월 29일, ‘서클 연합 캠핑’에서였다. 그런데 그날보다 보름도 훨씬 전인 3월 7일에 그 애를 마주한 것이다.   당시 시원은 7개 서클 중 노랑 서클의 회장이었고, 진선은 이제 막 빨강 서클에 가입한 신입 회원이었다. 서클 활동 시, 타 서클이어도 선·후배 규율이 엄격했기에 지금처럼 학교 안에서 마주칠 때면 이런 식으로 간단히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곤 했었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진선이 타 서클 선배였던 시원을 향해 존댓말로 어색한 인사를 건넨 모양이다.     시원은 진선을 처음 본 날이 실제로는 3월 29일 서클 연합 캠핑에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그날은 단지 자신이 진선이라는 아이를 마음에 담고 인식하기 시작한 날 일뿐, 훨씬 이전부터 이런 식으로 몇 번씩 서로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이 꿈일지라도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진선의 모습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이해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기로 마음 먹는다.       그 이후 6교시 정규수업을 마저 듣고, 주간자습을 하는 등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시간을 보냈다.   시원은 자신이 직접 온 몸으로 느끼는 이 순간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과연 꿈이 맞을까 의심스럽다. 만약 꿈이 아니라면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마흔의 말기 암 환자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사람이 뜬금없이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되다니... 하지만 꿈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대체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시원은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왔을 당시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     그녀는 자신이 승주와 진선을 만나러 가던 중, 심해진 통증에 진통제를 먹다가 호흡이 가빠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 까지는 정확하게 기억했다.   의식을 잃기 전 얼핏 진선의 모습을 본 것 같았고, 곧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처음 만났던 옛날로 다시금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러자 온 몸을 감쌌던 하얀 빛이 자신을 공중에 떠오르게 만들었고, 순간 쏟아져 내리던 섬광에 쓸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뒤에 이제 죽는구나 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그토록 바라왔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꿈이든 현실이든, 더 내려갈 곳도 없을 만큼 바닥을 치던 지난날의 상황보다는 낫다.     꿈이라면 끝이 있을 터..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시원은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는 야자 인원을 체크하러 온 담임선생님에게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빠지겠다고 말씀드리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뭔가 낯설면서 동시에 낯익었다. 분명히 익숙한 길이면서도 불과 얼마 전에 봤던 그 길이 맞나 싶을 만큼의 차이를 보였기에 알 수 없는 위화감마저 느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22년 전의 모습이니 충분히 그럴만하다. 높고 세련된 신축건물들이 즐비했던 자리는 원래 낡은 건물들이나 오래된 집들이 들어있던 자리였고, 상점가의 현란한 네온사인 간판은 이전에 비해 훨씬 줄어 있었다.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음식점 및 술집이 주를 이뤘던 대학가 주변도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가게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어 최근에 느꼈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소방도로로 뚫려있던 시원스러운 길은 사라졌지만 재개발 이전의 주택단지가 밀집해있던 골목길 이곳저곳에는 집마다 꽃과 화분 그리고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 나름의 정겨움이 느껴졌다.       시원의 고등학교가 속해있는 대학을 벗어나면 바로 옆에 K 대학병원이 크게 들어서 있고, 그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 단지가 있다. 그곳이 지금 시원의 부모님이 사시는 본가다. 하지만 이곳은 2010년까지도 빌라와 주택들이 길게 늘어서 있던 평범한 주택가였다. 그 곳을 재개발하고 들어선 것이 지금의 아파트인데, 시원은 이곳 빌라에서 태어났고 집을 나가기 전까지 거기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아파트 단지가 아닌 자신의 추억이 가득 깃든 베이지색 건물의 빌라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본 시원은 반가움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더욱이 현관문 앞에 세워둔 동생 시준이의 자전거를 보자, 잊고 지냈던 지난 시간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만 같다.   녀석은 부모님께 자신의 열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MTB 자전거를 받곤, 무척 기뻐하며 신줏단지 모시듯 했었다. 16단까지 변속기어를 넣을 수 있다고 자랑하며 어찌나 소중히 여기던지, 누가 훔쳐 갈지도 모른다며 ‘자물쇠 번호키’에 마카로 자신의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적어두고는 바퀴 체인에 자물쇠를 단단히 감아 잠가둔 것을 보니, 97년 그때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시원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간다.       “어머, 오늘은 야자 안 했니?”   “엄마... 흐흑... 엄마...”   “얘가 왜 이래? 얘 시원아, 어디 아파? 무슨 일 있니?”   “아니, 그냥 엄마가 좋아서... 엄마 머리가 까만 게 너무 좋아서... 흐흑...”   “우리 딸이 어쩐 일로 어리광이실까? 나중에 엄마 흰 머리 나면 싫다고 하겠네~”   “아냐, 엄마. 오랫동안 건강하셔야 해요! 아셨죠?”   “호호~ 얘가 안 하던 짓을 다 하네. 그래, 어서 씻고 밥 먹을 준비해라.”     시원은 젊은 시절 엄마의 검은 머리를 보자, 자신의 말기 암 소식을 듣고 힘겨워 하셨던 그녀의 백발이 생각나 엄마를 꼭 안고 한참을 울먹였다.        - 식구들과 함께 오랜만에 식탁에 둘러앉아 행복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자신의 손때가 묻은 방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시원은 꿈이든 생시든,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미련이 많던 삶이었다. 그래서 늘 이맘때의 자신을 그리워했고, 당시의 잘못된 선택을 수없이 후회하며 살아왔다. 그랬기에 그녀는 말이 안 되는 가정일지라도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삶을 살 것’이라 상상하며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던 것이다. 허무맹랑한 상상일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시원은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지난날을 위로하고 싶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립고 안타까웠던 그 시절로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돌아가고 싶다고 염원했던 것이 이뤄진 것일까?’   시원은 황당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금 이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충분히 비현실적이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도 없진 않다.       ‘만약, 꿈을 꾸는 것이라면 분명 머지않아 그 끝도 있을 것이다..’   시원은 오랜만에 느껴본 정다움과 그리움이 곧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잠시나마 그토록 그리워하던 시간 속에서 살 수 있어 행복했다며 애써 안타까운 마음을 추슬러본다.     이제 눈을 감고 잠들고 나면 ‘하룻밤의 행복처럼 모두 사라져 버릴 꿈’이거나,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 진짜 과거로 되돌아온 것’ 둘 중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부모님께 마지막일지도 모를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난 뒤, 침대에 누워 밀려오는 잠을 청했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시원은 여전히 1997년 봄 안에 있었다.   2019년을 살아가던 그녀는 40년을 지내온 지난 삶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22년의 시간을 거슬러 열여덟이었던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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