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4388 Words
[적응]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버릴 시간이 아니라는 점은 다행스러웠지만, 언제 다시 돌아갈지 모를 막연함 속에서 시원은 관찰하듯 조심스레 자신과 주변을 살피며 경계했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자연스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간절한 염원 끝에 주어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게 됐다. 그렇게 여기고 있는 이유를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순 없었지만 시원은 직감적으로 ‘이 상황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개입해선 안 될 것에 관여해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것’과 같은 불상사가 생겨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가겠노라 다짐했다. 그러자 두렵고 막막했던 요 며칠간의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차분히 마음을 정리하자 주어진 삶에도 충실할 수 있게 됐다.         -   일주일이 지난 지금. 시원은 과거의 자신과 천천히 동화되어 갔고, 열여덟 고등학생으로서의 생활도 무리 없이 잘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지난날 시원은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넘어서지 못한 채, 꺾여버린 자존감으로 매사를 결정함에 있어 늘 망설이고, 행동하길 주저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인생을 계획 중인 그녀는 더 이상 지난날의 후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 앞에 서 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삶을 살고있는 시원은 하루하루가 꿈만 같다. 한때, 말기 암 환자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경험이 있기에 삶에 대한 애착은 더욱 커져만 갔고, 언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릴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은 그녀에게 매 순간을 허투루 보내선 안 될 이유가 되어주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농밀해진다’는 어느 유명 작가의 명언처럼, 시원은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지금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며 알차게 보내고자 했다.   ‘여유로움’은 비록 실패에서 비롯되었더라도 경험 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엄청난 메리트다. 지난날 조급하게 굴며 불안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던 진선을 향한 서툰 사랑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까지도.. 모두 여유를 갖고 대하기 시작하자,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것만 같다.     시원은 점점 자신감이 넘쳤고, 그로 인해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진선과 함께 할 걱정 없는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은 역시 건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건강관리에 힘썼다. 그래서일까? 다시 돌아오고 난 뒤,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을 챙기라는 잔소리가 입에 붙은 시원이다. 가족들은 유난이라며 시원에게 핀잔을 주지만, 몸소 경험한 자의 어쩔 수 없는 자기보호본능이었다.       비교적 순조롭게 과거의 삶에 동화되어가던 시원이지만, 간혹 22년의 시간 차이를 느끼는 순간은 있어왔다. 예를 들어 오늘의 날씨를 알아야 한다거나, 길을 찾아 헤맬 때, 혹은 몇 번 버스를 타야 할지 모르겠을 때, 지하철은 몇 분 후에 도착하는지 등등 생활 속 전반의 일들을 급히 풀어야 할 때,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찾다가 아차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면 아직은 인터넷이나 PC방조차 제대로 보급되기 전임을 깨닫고, ‘문명의 이기’의 엄청난 생활밀착력과 그 편리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때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카톡으로 연락해”라든지 “유튜브 찾아보면 다 나오잖아”와 같은 말실수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게 뭐냐고 되묻는 친구들에게 대충 주제를 돌리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그런 시원을 보며, ‘좀 엉뚱한 구석이 있는 재밌는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 주었다.     방금도 내일 오전 수업을 끝내고 같이 저녁을 먹자는 승주에게 ‘내일이 토요일인데 왜 학교에 가느냐’며 말실수를 했다가 겨우 얼버무렸다. 당시엔 아직 주 5일 근무나 수업이 시행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던진 말이었다.     이처럼 시원은 자신이 22년간 잊고 산 것들 속에는 ‘바뀌어버린 생활방식’들도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다. 그녀는 지난날 자신에게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던 ‘그 작은 기계’를 잊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마트한 세상이 사라졌어도 아날로그의 감성으로 정보를 찾고 생활하는데 점점 익숙해져 가는 시원이다.         -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 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1학년에 이어 2학년까지 같은 반이 된 승주와 시원은 새롭게 만난 반 친구들과 아직은 어색한 이맘때,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던 기억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돌아온 지금도 시원은 승주 덕분에 학교생활을 즐겁고 수월하게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뒤, 승주가 미대 입시 준비를 위해 어머니의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오면 서클 봉사활동을 끝낸 시원과 함께 만나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 1학년 때는 매주 토요일마다 석희까지 셋이 모여 햄버거나 피자를 먹으며 일주일의 회포를 풀곤 했었는데, 2학년이 되고부터는 체대 입시를 희망하는 석희가 실기 준비 때문에 토요일 모임에 자주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안 그래도 혼자 다른 학교라 떨어져 지내는 것도 서운한데, 체육관에서 연습하느라 기껏 한 달에 한두 번 보는 게 불만인 석희는 시원과 승주가 같은 학교, 같은 반인 것을 무척 부러워했다.     사실 이들이 토요일 저녁을 함께 먹기 시작한 건 일이 바쁜 어머니 때문에 야자가 없는 어정쩡한 토요일엔 승주 혼자 저녁을 해결한다는 것을 시원이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엔 괜찮다는 승주를 시원이 억지로 자기 집에 데리고 가 가족들 사이에서 함께 식사하게 했었는데, 그게 불편했는지 승주가 체하고 말았다. 결국 승주는 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따주던 시원에게 슬픈 가족사를 얘기해주었고, 시원의 가족이 화목해 보이는 것이 부럽다며 자신은 어른들을 제대로 상대해 보지 않아서 어렵고 불편했다는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시원은 승주를 배려해주려 밖에서 함께 외식을 하거나 비어있는 승주네 집에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 잦아졌고, 이를 알게 된 석희도 함께 합류하다 보니 자연스레 정기적인 토요일 저녁 모임이 되었던 것이다.       시원은 22년 만에 다시 나가는 토요일 저녁 모임에 설레하며 약속장소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자주 가던 햄버거 가게에 앉아 이렇게 승주를 기다리는 게 얼마 만인지...’   시원은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그녀는 승주를 기다리며, 통유리 너머로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대학가라 그런지 주로 젊은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었는데, 바닥에 끌릴 것 같은 힙합바지에 커다란 군함 같은 워커를 신고, 메이커 로고가 크게 박혀있는 티나 점퍼를 입는 게 유행이던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다.     되돌아온 뒤, 교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으려 옷장을 열었을 때, 시원은 커다란 바지며 티셔츠에 놀라 한참을 옷장 문을 연 채로 서서 ‘어떻게 저 큰 옷들을 입을지...’ 난감해 했다.   한번은 발목을 덮는 소위 하이탑 농구화를 신고 외출을 하려다가 헐렁한 신발이 벗겨져 크게 넘어질 뻔도 했다. 왜 그런지 살펴보니, 자신의 원래 발사이즈 보다 신발사이즈가 두 치수나 커서 그랬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녀는 한창 힙합 패션이 유행일 때, 다들 자신의 바지통에 맞춰 신발을 크게 신었던 게 생각났다.       ‘다들 이렇게 큰 옷을 입고, 헐렁한 신발을 잘도 신고 다녔었구나..’   시원은 창밖 너머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눈에 띄게 화려한 옷을 입고,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남자가 햄버거집 앞에서 갑자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7시 30분의 Bad Boy!’   시원은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   당시 토요일 저녁 7시 30분만 되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던 이 햄버거 가게 앞에서 저 남자가 오늘처럼 춤을 췄었다. 커다란 힙합바지와 가슴에 ‘Bad Boy’라고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입고, 햄버거 가게의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최신 유행곡에 맞춰 어떤 춤이든 막힘없이 추다가, 8시 정각이 되면 아무 말 없이 사라졌던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계절마다 바뀌는 화려한 염색 머리와 유행을 따르는 옷과 헤어스타일로도 유명했다.   ‘K 대학 모 햄버거 가게 배드보이’라고 하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언제부터 시작했을지 모를 그 남자만의 의식은 몇 년 동안 계속됐고, 그를 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연예인처럼 가수들이 입는 옷과 헤어스타일을 똑같이 따라 하고 다녔다고 했는데, 96년 '캔디'가 유행일 때는 ‘HOT’의 ‘캔디’ 복장을 직접 맞춰 입고 춤을 췄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했다.     ‘듀스’, ‘터보’, ‘쿨’ 등 수많은 당대 스타들의 스타일을 따르던 그가 처음으로 춤을 끝까지 다 추지 못한 적이 한 번 있었다고 한다.   가수 ‘솔리드’가 한창 유행할 때, 맨살에 조끼 정장을 입고 나타나 춤을 추자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그에게 다가가 “옷 꼬락서니가 이게 뭐냐?”시곤, 춤추고 있던 그 남자의 맨살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며 호통을 치셨다고 했다. 당황한 남자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가리곤 재빨리 사라졌다고 하는,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목격담도 있었다.         **   “미안, 많이 기다렸지? 어?! 배드 보이떴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석희한테 삐삐음성 남겼는데, 못 온다고 연락 왔더라. 오늘도 체육관이래.”   승주는 헐레벌떡 달려와 시원에게 미안하다며,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했다.       “그림 잘 그렸어?”   “뭐, 맨날 그렇지... 대학 때부터 C.C로 만나 6년을 연애하셨다는데, 사귀면서 서로 다른 성격들 그때는 어떻게 참아가며 결혼했나 몰라. 아빠한테 보여주기식으로 '내가 잘돼야 엄마가 옳다'는 그 말.. 이제 아주 지긋지긋해!”   승주는 이혼한 아버지와의 문제로 자신을 옥좨 오는 엄마한테 화가 많이 난 듯 말했다.     “2학년 되니까 더 숨 막히게 그래. 다른 학원으로 옮길 수도 없고... 입시 준비 때문에 매일 보니까 더 그러셔.”   “그래도 어머니가 옆에서 1대1로 그림 봐주시니까 실력은 금방 늘겠다.”   “그렇지 뭐... 우리 윤여사는 디자인 전공이고, 데생은 아빠가 잘 하셨지... 참, 근데 서클 캠핑 준비는 잘 돼가?”   “월요일에 7대 서클 회장들 회의할 때 정해질 거래.”   “학교에서 하는 캠핑이면 나도 엄마한테 그 핑계 대고 참석해야겠다. 우리 윤여사님께서 시원이 너는 믿잖아. 1학년 때 나도 같이 그룹과외 끼워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애라고. 어휴... 그놈의 공부...”   “니가 온다면 나야말로 대환영이지. 너도 파랑 서클 회원이니까 와서 좀 도와줘. 이번에 2학년 회장들, 전부 다 같이 ‘쿨’ 노래에 맞춰 단체 춤도 추고, 개인 장기자랑도 한다더라. 우리 1학년 수련회 때, 둘이서 장기자랑 시간에 췄던 ‘듀스’의 ‘굴레를 벗어나’ 기억나? 그거 이번 캠핑에서도 춰줄 수 있냐던데?”   “누가? 초록 회장이?”   “응, 같이 하자! 추억도 되고.”     시원은 승주에게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 이럴 때 함께 했던 기억들이 많으면 나중에 좋은 추억이 된다. 시원은 3학년이 되어 서로가 바빠지기 전에 옛날처럼 승주와 많은 추억을 쌓고 싶다고 생각했다.       “뭐, 2주 남았으니 우리 집에서 시간 날 때 맞춰보든가.”   “고윤아 선생님도 오신대. 그러니까 잘 춰라~! 하하하.”   “뭐?!”     시원이 승주가 좋아하는 파랑 서클 담당 선생님 얘길 하자, 마시던 콜라를 뿜고 귀까지 빨개진 승주다.         -   승주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저녁. 시원은 곧 있을 학교 캠핑에서 만날 진선을 생각하고 있다.   일주일 동안 오가며 스치듯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일부러 예전처럼 모른척하며 때를 기다려왔다. 이젠 마음 정리를 모두 끝냈으니 진선을 만나고 미래를 바꾸는 건 앞으로 시원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오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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