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5000 Words
[첫 만남] K대학은 초중고교와 재단 및 병원으로 이뤄진 사립대다. 캠퍼스를 중심으로 50만평이 넘는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지어진 이곳은 작은 산 하나를 끼고 주변 3개의 마을을 연결 할 만큼 드넓고 웅장했다.   그 대학의 한쪽 구석에 시원의 여고가 있었고, 캠퍼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곳에서 시원의 학교는 철철이 많은 혜택을 함께 누려왔다. 특히, 여러 문화제 행사들과 캠퍼스 축제는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 내에 속해있는 초중고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까지도 함께 즐기는 지역축제와도 같았다. 시원이 다니던 여고는 대학의 이벤트를 제외하고도 문학적 감수성을 중시했던 학풍을 이어받아 자체적인 행사 또한 많은 편이었는데 3월 서클 캠핑과 4월 벚꽃 감상제, 5월 체육대회를 거쳐 9월 수학여행 및 10월 여고 가을 축제까지... 따지고 보면 방학과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 1년에 축제나 행사가 없는 달은 손에 꼽을 정도다.     고2가 되기 전, 투표로 노랑 봉사서클 회장에 뽑혔던 시원은 ‘3월 서클 연합 캠핑’에 관한 공지를 알리기 위해 1학년 새내기들의 반을 돌며 캠핑 참여 홍보에 분주하다. 스마트한 세상이었다면 단체 카톡방을 만들어 공지를 띄우면 그만이지만 당시는 서클 수뇌부들이 쉬는 시간마다 구역을 나눠 각 반을 돌며 칠판 구석에 색분필로 자신의 서클 공지를 직접 적어야 했다.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때면 한쪽 벽면을 칠판으로 가득 채우고도 부족했기에 간혹 이동식 칠판까지 연결해두곤 했는데, 그 보조 칠판은 이따금 서클이나 반 HR 등의 공지를 적어두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   97년 3월 29일.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7개의 서클이 모여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시작했다.   서클 연합캠핑은 각 서클 담당 선생님들의 지도아래 부모님의 동의를 받고, 학교에서 1박 2일을 보내며 회원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행사였다.   보라 서클을 담당하던 철학 선생님께선 젊은 시절 교관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캠프파이어를 준비해주셨고, 학생들은 조리 실습실을 개방해 함께 저녁을 지어먹고선 본격적으로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   승주는 천주교 봉사 동아리인 파랑 서클에 2학년 회원으로 참여해 자신이 좋아하는 고윤아 선생님을 곁에서 돕고 있다.   언젠가 시원이 그녀에게 왜 파랑 서클에 가입했느냐고 물었을 때, 파랑 서클 담담 선생님인 고윤아 선생님이 머리에 ‘미사보’를 쓰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반해 ‘매주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한 승주다.     하지만 시원은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오기 몇 년 전, 승주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술에 취해 무심코 본심을 말했던 친구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날 승주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성당에 예배를 다녔던 어린 시절, 잠시였지만 자신에게 상냥했던 어머니와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깊은 속내를 시원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기도를 드리다 무심코 곁에 앉은 어머니를 올려다봤을 때, 미사보를 쓴 옆모습이 마치 마리아님 같다고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며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그 기억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몹시 비통해했다. 그리곤 자신이 고교 신입생이었을 당시, 파랑 서클 홍보 영상을 시청하다가 성당에서 고윤아 선생님이 기도드리는 장면을 우연히 본 순간, 그 시절의 어머니가 떠올랐더라는 얘기도 함께 해주었다.     야영 준비에 한창인 선생님의 짐을 들어드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승주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원은 “어쩌면 이것이 내가 파랑 서클에 가입한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하던 친구의 쓸쓸한 미소가 떠올라 가슴이 시려온다. 그러고 보니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선생님은 얼핏 승주의 어머니를 닮은 것도 같다.         -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학생들은 준비한 모닥불을 붙이고 캠프파이어를 시작했다.   각 서클을 대표하는 회장들이 ‘쿨’의 ‘운명’에 맞춰 다 같이 준비한 귀여운 율동을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서클 별 장기자랑 대결이 펼쳐졌다.     노랑 서클 신입생들은 당시 한창 유행하던,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를 준비해왔는지 그들 중 한명은 ‘엄정화’처럼 반짝이는 옷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는 단체로 검은 옷에 두건을 맞춰 입고선 ‘백댄서’ 역할을 했다. 그리곤 비명 소리로 시작되는 전주에 맞춰, ‘엄정화’ 역으로 추정되는 학생을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특유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2학년 회원들도 질세라 ‘지누션’의 ‘말해줘’ 노래에 맞춰 춤을 췄고, 시원과 승주 역시 작년 수련회에서 반대표로 나가 춤췄던 ‘듀스’의 ‘굴레를 벗어나’를 멋진 안무로 소화해내며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학교 내에서 두 사람의 인기는 워낙 유명했기에 그 둘을 보겠다고 서클에 가입하고 캠핑에 참여한 신입생들도 제법 있던 터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열정적인 응원 열기로 캠핑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갔다.   고윤아 선생님의 칭찬에 흥이 오른 승주는 비보이들의 ‘윈드밀’ 기술까지 선보이며 자신의 춤 실력을 한껏 뽐내는 중이다.     시원은 춤을 추면서도, 진선을 향해 눈을 떼지 않는다. 캠프파이어가 끝나고 나면, 곧 그들이 처음 만났던 담력 훈련이 시작되기 때문에 조금은 긴장 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   초록 서클 회장의 레크리에이션 진행으로 즐거웠던 캠프파이어를 모두 마치고 다 같이 뒷정리를 끝낸 뒤, 2학년들은 신입생들을 위한 담력 훈련 준비에 한창이다.   캠프파이어 후, 혹시 남았을지 모를 불씨 정리까지 도와주신 선생님들은 비상시를 대비해 한 분만 숙직실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퇴근하셨다.       담력 훈련은 2학년들이 ‘진행’과 ‘분장’ 두 팀으로 나뉘어 학교 곳곳에 귀신 분장을 하고 숨어있거나, 진행 교관을 맡아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1학년 신입생들이 둘씩 짝지어 쪽지에 적힌 장소에 가서 작은 구슬을 가지고 교실로 돌아와 무사히 담력 훈련을 마쳤다는 도장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산을 두르고 있는 환경 덕에 밤이 되자 학생들이 빠진 학교는 무척 스산했고, 불 꺼진 교실과 복도 등도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작은 플래시 하나로 두 사람이 함께 불 꺼진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야 하기에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는 취지였지만, 사실은 후배들의 기합을 잡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이벤트였다.     승주는 긴 가발을 뒤집어쓰고, 미리 준비한 소복으로 갈아입고는 학교 구석구석을 말없이 돌아다니는 귀신 역할을 했고, 시원은 교실에서 기다리며 작은 구슬을 가져온 아이들에게 확인 도장을 찍어주는 진행 일을 맡았다.         -   담력 훈련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신입생들의 간헐적인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아이들은 큰 키에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승주와 마주치면 엄청나게 놀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구슬을 찾고 마무리를 하러 교실에 들어온 학생들 중 절반은 눈물바람을 하고 와서는, 시원에게 ‘승주 선배가 말없이 쓱쓱 지나가는 게 다른 선배들이 일부러 겁주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며 울먹였다. 어린 학생들의 귀여운 모습을 오랜만에 본 시원은 신입생들의 투정 섞인 애교에 고생들 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준다.       담력 훈련의 마지막 조인 진선과 그녀의 친구 주영은 쪽지에 적힌 구슬을 찾아내곤 마무리 도장을 받기 위해 시원이 있는 교실로 들어섰다.   놀랐다며 울먹이는 주영과 달리 진선은 차분했다. 당차던 옛 모습 그대로의 진선을 마주한 순간, 시원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어두운 교실을 비춰주던 달빛 사이로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진선의 크고 또렷한 눈망울을 처음 보았을 때, 시원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고, 심장은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시원은 첫눈에 반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진선을 다시 만난 지금도 마치 그날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 시원은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진선을 바라만 보고 있다.       “선배님? 도장이요.”   “응? 아... 응. 고생들 많았다.”     시원은 자신에게 마무리 도장을 찍어달라고 말하는 진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시원아, 효진이가 다 끝났으면 정리하고 운동장에 모이래!”   “아악-! 승주 선배! 놀랐잖아요. 히잉~”     마지막 조의 담력 훈련이 끝나자, 정리를 마친 승주가 마무리 전달사항을 알려준다며 교실에 잠시 들렀다. 여전히 귀신 복장인 채로 한가득 짐을 들고, 교실 앞문에 얼굴만 슬쩍 내민 승주의 모습을 본 주영이 또 다시 깜짝 놀라며 울먹이더니 이내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린다. 그리고는 짐을 같이 들어주겠다며 시원을 기다리던 승주를 잡아끌고는 운동장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승주와 주영이 가고 난 뒤, 교실에는 시원과 진선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빨강 서클 신입, 1학년 3반 민진선. 맞지?”   교실 뒷정리를 도와주는 진선에게 시원은 1학년을 상징하는 노란색 명찰을 가리키며 묻는다.       “네.”   “난 노랑 서클 회장, 2학년 7반 임시원이야. 반갑다!”     시원은 진선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시원과 악수를 하던 진선은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함께 미소 지어주었다.       “담력 훈련 안 무서웠니?”   “네, 별로요...”   “씩씩하네. 고생했어. 이제 가자!”     시원은 진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어 보였고, 진선은 그런 시원을 이번에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   의도야 어쨌든 담력 훈련에 참여한 신입생들은 처음보다 많이 친해진 듯했다. 운동장에 쳐놓은 텐트 여기저기에선 아이들이 소곤대는 소리로 가득했고, 한껏 들뜬 이들은 늦도록 쉽게 잠들지 못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자 숙직실에서 대기 중이셨던 선생님께서는 텐트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1층 교실로 이동 시킨 뒤, 책걸상을 전부 복도로 옮기게 하고는 교실 안에 다시 텐트를 칠 수 있게 도와주셨다.     7개의 서클 회원들은 두 교실에 반씩 나뉘어 각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다. 그 중 시원의 노랑 서클과 승주의 파랑 서클 그리고 진선이 있는 빨강 서클이 한 교실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자기로 했다.   졸지에 잘 자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며 투덜대던 아이들은 어쩌다 보니 한 교실에서 많은 인원이 모여 서로 마주 보며 둘러앉게 되자, 갑자기 들뜬 분위기가 조성됐고, 단체로 게임을 하거나 무서운 얘기들을 나누며 신나게 웃고 떠드느라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   텐트 출입구를 열어 둔 채, 서로 마주 보며 잠든 아이들이 아직 깨지 않은 이른 아침.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시원은 음악실로 향했다.     학교 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음악실은 대학 캠퍼스가 전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무척 아름다운 곳에 자리해있었다.   예전 그날도 오늘처럼 갑작스레 내린 비로 아이들과 교실에서 늦게까지 함께 놀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자리에 누운 시원이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깊이 잠들 수 없었고, 결국 밤새 뒤척이다 홀로 일어나서는 학교 건물 이곳저곳을 거닐며 바람을 쐬고 있을 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리듯 찾아간 음악실에서 진선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날의 개인적인 만남 이후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기에 이번에도 눈을 뜨자마자 곧장 음악실로 향했던 것이다.       음악실에 문을 열자, 진선은 놀라서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추고 시원을 바라봤다.     “피아노 소리... 1층까지 들렸어요?”   “아니, 아직 애들은 자. 나 혼자 바람 쐬다가.. 피아노 잘 치네, 무슨 곡이야?”   “쇼팽의 야상곡 녹턴이요. 9-2번.”   “다시 듣고 싶은데, 혹시 처음부터 쳐 줄 수 있어?”   “잘.. 못 쳐요. 어릴 때 조금 배우고 혼자 연습한 게 고작이라...”   “난 아예 못 쳐. 그냥 그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시 듣고 싶어서 그래. 부탁 좀 하자.”     부끄러워하는 진선에게 꼭 듣고 싶다며 부탁하자,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연주해주었다. 시원은 기다란 음악실 의자 끝에 앉아 진선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리웠던 지난날을 생각한다.       “와.. 진짜 잘 친다. 혹시 빨강 서클에 마니또 선배 있어?”   “아뇨, 아직...”   “그럼 나랑 교환일기 쓰지 않을래? 서로 서클이 다른 건 아는데... 나, 니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우리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진선은 시원이 환하게 웃으며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자, 좋다며 수줍게 대답해주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음악실 창문 넘어 보이던 맑게 갠 하늘 위로 아침 해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   아침을 지어먹고 정리를 마친 뒤, 학생들은 이번 캠핑을 통해 느낀 점들을 적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원들 전체가 돈독해질 수 있었던 성공적인 캠핑이었음에 서로 박수를 쳐주며 격려하는 것을 끝으로 해산했다.   이후 아쉬움에 좀 더 함께하길 원하는 아이들을 모아, 노래방으로 뒤풀이를 하러 가는 중이다.       진선은 승주 선배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같이 가자고 조르는 주영을 따라 뒤풀이 자리에 합류했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시원이 싫지 않았기에 함께 교환일기를 쓰자는 그녀의 제안에 좋다고는 했지만, 시원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아보고 싶었던 진선은 그녀가 또래들 사이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듯 바라보는 중이다.     시원은 잘 웃고, 상냥하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 같았다.   노래를 부르다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시원의 미소에 진선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좋은 언니가 생길 것 같은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진선은 앞으로 함께 써 나갈 교환일기에 어떤 이야기들이 채워지게 될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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