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봄]
서클 캠핑 이후, 시원과 진선은 약속대로 바로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교환일기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점에선 일반 펜팔과 비슷하지만 개별 편지지로 글이 오가는 게 아닌 다이어리 공책 한권에 서로 번갈아 가며 편지를 쓰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당시 여고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글쓰기다.
보통은 같은 서클 내에서 마니또로 지정된 선후배 끼리 주고받는 편이었기에 타 서클에 속해 있던 두 사람은 각자 서클에서의 입장을 의식해 요란스럽지 않게 교환일기를 쓰며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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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이 완연한 4월의 첫날.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은 시원에게 어머니는 어젯밤부터 준비하신 미역국과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한 생일상을 차려주셨고, 아버지는 제법 두둑한 용돈을 주셨다.
시원은 가족들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으며 기뻤지만 한편으론 불과 얼마 전에 겪은 자신의 마흔 번째 생일날이 떠올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자신의 생일이었던 그날, 과거로 돌아와 지금껏 며칠을 열여덟 고등학생으로 살고 있으니 혹시나 같은 날짜인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리진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시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기에 만약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식구들과 함께 엄마가 차려주신 생일상을 맛있게 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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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입고 단색의 백팩을 멘 학생들이 서둘러 학교를 향해 걷고 있다. 시원 역시 당시 유행하던 파란색 ‘잔스포츠 가방’을 멘 채, 학생들 틈에 둘러싸여 등교 중이다.
교문 앞에는 학생 주임인 함노식 선생과 학생지도부원들이 지키고 서서 등교하는 아이들의 복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시원은 아침부터 함노식 선생을 만나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자신에게 용서를 빌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곤 마음을 추슬러본다.
매달 1일이면 어김없이 학생부의 복장 지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평범한 단발머리나 짧은 상고머리 혹은 긴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말총머리를 유지했지만 간혹 학주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려 애쓰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엔 특히 학주의 주의를 요하는 3대 헤어스타일이 있었는데, 소위 ‘커튼’과 ‘깻잎’ 그리고 ‘떡’이라 불리는 머리들이었다.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애들 중에는 당시 아이돌처럼 가운데 가르마를 갈라 양쪽으로 앞머리를 길게 내려 눈을 가리듯 늘어트리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학주는 이 머리로 단속에 걸린 아이들의 앞머리를 지도봉을 이용해 양쪽으로 밀어내며 ‘커튼’에 비유하곤 했다.
필요 이상으로 짧은 머리를 한 아이들이 젤과 무스를 과하게 바르고 나타나면 ‘엉겨 붙은 떡진 머리’라고 단속했으며 긴 머리도 간혹 단속의 대상이 될 때가 있었는데, 당시 약간 '논다'하는 날라리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던 소위 ‘깻잎 머리’로 불리는 헤어스타일이 그랬다. 앞머리를 한쪽으로 몰아서 이마에 딱 붙이듯 젤이나 무스를 발라 핀을 꽂고 고정시킨 그 모습이 마치 깻잎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머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정 실 핀이 풀려 흐트러지기 쉬웠고, 자주 갈라졌다.
그 모습을 본 학주는 깻잎이 갈라져 쌍 깻잎이 됐다며 노는 아이들이 이 머리를 하고 모여 있으면 너희가 무슨 ‘쌍깻잎파’냐며 몰려다니지 않도록 주의를 주곤 했다.
그 외에도 이름표를 달고 있지 않거나 넥타이를 제대로 메지 않은 경우. 혹은 셔츠 단추를 단정히 잠그지 않거나 치마를 일부러 길게 늘여서 입는 경우도 학생지도에 해당되었다.
당시 하복이나 춘추복에는 스타킹 대신 복숭아뼈까지 오는 하얀 양말과 흰 운동화를 신었지만, 동복에는 반드시 검은색 스타킹에 까만 학생용 구두를 신었어야 했다. 그래서 동복과 춘추복을 겸해서 입는 환절기에 시기를 잘못 타면 검정 스타킹에 하얀 운동화를 신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곤 했는데, 이를 보고 아이들은 ‘컴퓨터용 사인펜’이라는 은어를 붙여 부르기도 했다.
간혹 학생들 중에는 그 스타일을 유지하려 춘추복에도 검정 스타킹에 흰 운동화를 신는 애들이 있었는데, 이런 식의 언발란스한 모습이 곧 'X세대의 반항'을 상징하는게 패션의 트렌드였던 그 시절. 치마를 골반에 걸쳐 입고, 치맛단을 길게 늘어뜨린 채, 깻잎 머리를 하고 있는 컴퓨터용 사인펜 모습의 여학생을 본다면 학교에서 좀 논다는 학생일 확률이 꽤 높았다.
학생지도부는 특히 이런 모습의 학생들을 엄하게 단속했다.
“거기, 이리와. 눈 가리면 안 답답하냐? 몇 학년, 몇 반, 이름!!”
“한 번만 봐주세요~”
“안 돼. 그리고 앞으로 커튼 걷고 다녀라~ 당장 잘라!”
“깻잎! 치맛단 똑바로 안 접을래?”
“무스 떡! 너도 이리로 와. 학년, 반, 이름!”
“어이~ 커튼! 너도 이리와. 너, 이 녀석. 왜 이름표도 안 달고 다녀! 어쭈~ 넥타이도 안 하고, 블라우스 단추도 열고 다니고? 이놈 봐라~!”
“아! 아아~! 선생님, 귀 좀 놔주세요! 앗! 시원아, 생일 축하해~!!!”
“이 놈이, 그래도 정신 안 차리고. 따라와! 넌 특별 관리다.”
승주였다.
녀석은 학주에게 머리부터 이름표에 복장 불량까지 걸려 귀를 잡혀가는 와중에도 시원을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생일 축하한다고 외치다가 결국 학생부로 끌려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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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주에게 된통 혼나고 교실로 돌아온 승주는 불만이 많았다.
“아니, 젤도 무스도 안 된다면서! 그럼 이 머리는 어떻게 정리하라는 거야. 쳇! 빡빡 깎기를 바라나?”
“야, 빡빡 깎으면 그건 그거대로 불려갈걸? 이건 우리 언니한테 들은 얘긴데, ‘어스’의 ‘유채영’이 ‘쿨’ 초창기 멤버였을 때 머리 빡빡 밀고 나왔었잖아. 그거 한창 유행할 때, 우리 학교에서 그 머리 따라 한 어떤 언니가 학주한테 걸려서 사회에 불만 있냐고 끌려간 적 있대.”
“그래서, 그 언니는 어떻게 됐는데?”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오시고, 머리가 다 자랄 때까지 엄청 이상한 단발 가발을 쓰고 다녔다더라고. 졸업할 때까지 머리가 짧았다는데, 그때까지 학주가 그 언니 가발 제대로 쓰고 다니는지 매일 검사하고 그랬대.”
“와... 학주 이 지독한 새끼! 그럼 나도 결국 잘라야 한다는 거네...”
7반의 이야기꾼이었던 연지가 승주에게 학주의 일화를 들려주자, 평소 힙합 패션을 좋아하고 고수해오던 그녀는 정색하며 머리카락을 자를 생각에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아... 시원아, 나도 정녕 너 같이 짧기만 한 특색 없는 상고머리를 해야 하냐? 이 언니가 고민이 많구나!”
“차라리 기르지 그래? 얼마 전 캠핑에서 썼던 귀신 가발이 엄청 잘 어울리던데? 풋~!”
시원과 승주는 서로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장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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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 적응을 마친 학교와 친구들은 집보다 더 오랜 시간을 생활하는 공간이자 가족 같은 존재들이다.
학교가 곧 집이었던 학생들의 개인 사물함 속에는 삼선 슬리퍼와 도시락을 함께 넣고 비벼 먹을 커다란 양푼, 잠시라도 푹 잘 수 있게 도와주는 책상용 쿠션과 방석 그리고 손톱깎이에서부터 수건과 치약, 칫솔을 포함한 세면도구 등 크고 작은 생활용품들이 즐비했다.
심지어 50여명이 수업하는 교실에 선풍기 3대가 전부였던 시절,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여름의 불볕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찬물에 발을 담그고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개인 세숫대야까지 준비해서 학교 사물함 속에 넣어둔 학생들도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 늦은 밤 야간자율학습까지, 온종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인문계 고교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공부에 지친 수험생들을 보며 '학교란 감옥에 갇힌 불쌍한 학생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 생활하는 유쾌함이 있었다.
젊기에 가능했던 그립고 소중한 추억들을 다시금 경험하며 시원은 이 행복이 오랫동안 유지되길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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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여고 방송반은 점심시간마다 교내에서 학생들을 위한 음악방송을 한다.
적당한 멘트와 함께 학생들의 사연을 담은 ** 곡을 틀어주며 공부에 지친 학생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주영과 함께 도시락을 먹던 진선은 방금 나온 생일축하 ** 곡 멘트를 듣고는 교실 벽면에 부착된 방송 스피커를 당혹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시원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노랑 서클 후배들의 생일축하 사연을 담은 ** 곡들이 연이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학교 내에는 여기저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만우절 소동’으로 1교시부터 정신이 없었는데, 바로 오늘이 시원 선배의 생일이라니...
캠핑이 끝나고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교환일기에서도 간단한 자기소개 정도만 했을 뿐, 오늘이 시원의 생일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였기에 진선은 거짓말 같은 이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시원 선배, 인기가 많다. 노랑 서클 후배들만 자기네 선배 생일이라고 챙기는 줄 알았는데, 다른 애들이 **한 곡도 저렇게나 많다니.. 하긴 우리 반에도 시원 선배 좋아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아까 승주 선배 보러 갈 때 슬쩍 봤는데, 시원 선배 자리에 꽃이며 선물이 하나 가득 있더라. 역시 승주 선배 못지않은 인기라니까. 뭐, 그래도 난 승주 선배가 더 좋지만~!”
“난 오늘 선배 생일인 것도 몰랐어.. 선물도 준비 못했는데 어쩌지?”
“선배랑 같이 교환일기 쓴다며, 생일도 몰랐어?”
“이제 겨우 두 번 쓴 거라... 그냥 가족관계랑 취미. 그런 것만 아는 정도야. 아... 그나저나 선배 생일선물 어떻게 하지?”
“음... 선배한테 직접 물어봐, 교환일기에 써서 물어보든지. 아! 아니면 이따 내가 같이 가줄까?”
주영은 시원의 생일 선물로 고민하는 진선에게 자신이 같이 가주겠다며 나섰다.
그녀는 진선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고, 서로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더욱 친해졌다. 말이 많고, 조금은 푼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마음씨만은 착한 친구였기에 진선과 주영은 4년째 함께 붙어 다니며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반이 되었을 때, 둘이 너무 기뻐 서로를 얼싸안고 소리 지르며 어찌나 좋아했는지..
진선은 아직도 고등학교 반 배정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들은 고등학생이 돼서도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은 변치 말자'며 함께 기독교계 봉사서클인 빨강 서클에 가입해 활동 하고 있다.
그런 주영이 요즘 파랑 서클 선배이자 시원의 절친인 승주에게 관심이 많단다. 안 그래도 진선이 승주의 친구인 시원과 교환일기를 쓰며 친하게 지낸다기에 이참에 자신도 그들 틈에 껴서 승주와 친하게 지내고 싶던 차였는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는 주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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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은 틈만 나면 운동을 했다. 워낙 옛날부터 운동을 좋아했기에 점심시간이나 야자를 하기 전 저녁 식사 후에 주어진 휴식 시간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승주도 자신과 함께 농구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늘 함께 운동하던 석희가 빠진 것은 아쉬웠지만 승주가 농구에 취미를 붙이자 더욱 신이 난 시원이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난 뒤, 승주와 한창 농구를 하던 중에 진선과 주영이 할 말이 있다며 다가왔다.
생일인 줄 몰랐다며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해달라는 진선에게 시원은 "그럼, 돌아오는 토요일에 같이 놀아주라."라고 대답하며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얼떨결에 곁에 있던 승주와 주영도 함께 생일 파티를 하자며 다 같이 모일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날은 점심부터 모여 놀기로 정하고, 시원의 생일 축하 파티를 열겠다는 승주의 연락에 석희도 이번만큼은 꼭 참석해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