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4279 Words
[D.C(다카포)]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약속한 피자집에 모여 시원의 늦은 생일파티를 해주고 있다.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오늘은 체육관을 째고 왔다는 석희의 등장에 다들 반가워하며 역시 ‘의리녀’라고 치켜세운다.     시원은 석희에게 진선과 주영을 소개해주었다.   주영은 시원과 친구들을 보며, 어쩜 선배들은 하나같이 샤프하고, 젠틀하고, 잘생겼냐며 뉴 페이스인 석희의 외모에 특히 감동한 눈치다. 석희는 몇 년 전, 영화 ‘스피드’로 유명해진 외국 배우 ‘키아누리브스’를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을 만큼 귀티 나고 잘생긴 외모로 연상의 선배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선배들, 그거 아세요?”   “뭐?”   “시원 선배는 귀엽고, 젠틀해서 모성 본능을 자극하게 생겼고.”   “하핫, 내가?”   “응! 그리고 승주 선배는 모델처럼 큰 키에 이지적이고, 샤프하게 생겨서 쳐다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아요~”   “베... 베인다고?”   “하하핫! 그럼 나는?”   “석희 선배는 그냥... 엄청 잘생겼어요. 예쁘다기보다 잘생긴? 왜 그런 거 있죠? 선배, 그런 얘기 많이 듣지 않아요?”   “아하하~ 그럼, 그럼~! 안주영이랬나? 너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우우~ 이건 말도 안 된다! 시원아, 내 귀 안 썩었나 봐줘!”   “하하하”     주영이 석희에게 잘생겼다고 말하자, 승주는 잘난 척하며 대답하는 석희를 향해 장난스레 야유를 퍼붓는다.       “진짜 아쉽다. 선배들이 남자였으면 아이돌 가수를 했어도 먹힐 스타일들인데... 진선, 안 그래?”   “그러게...”   “뭐야, 그럼 우리가 ‘저는 귀여움과 자상함을 담당하는 임시원이구요.’ ‘저는 샤프함을 담당하는 이승주입니다.’ ‘그리고 저는 잘생긴 얼굴을 담당하는 강석희입니다.’ ‘우리는 삼.총.사 입니다!!!’ 뭐 이런 거 하라고?”     주영의 아이돌 발언에 석희가 마치 자신이 아이돌이 된 양 특유의 포즈를 취하며 따라 하자, 다들 배를 쥐고 웃는다.   서로 처음이라 어색할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주영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을 대하듯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이에 질세라 석희도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행복하다며 요 근래 체육관에서 고생한 이야기보따리들을 풀어놓고는 즐거워했다.         -   케이크 대신 피자에 초를 꽂아 불을 끄고 다 같이 식사를 마친 뒤, 유행하는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갔다.   첫 시작은 얌전히 웃으며 단체 사진을 찍었고, 그 이후부터는 파노라마를 찍듯 한 번에 15장을 연속으로 찍는 타이밍에 맞춰 우스운 복장과 가발들을 쓰고, 각기 다른 표정과 포즈를 취했다. 그리곤 현상된 엽기적인 모습들을 보며 각자 다이어리에 붙일 스티커 사진을 공평히 배분했다.         노래방을 가자는 석희의 제안에 다 같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데, 아까부터 시원을 바라보는 승주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한창 신나게 분위기를 탈 무렵, 갑자기 승주가 시원과 석희를 데리고 음료수를 사 오겠다며 친구들을 밖으로 몰았다.     “야, 뭔 음료수를 셋이 사러가?”   석희는 한창 신나게 부르던 노래에 미련이 남은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넌 좀 가만있어봐. 임시원, 솔직히 말하시지. 너, 저기 1학년 후배 좋아하지?”   “누구? 주영이라는 애?”   “넌 좀 기다려보라니까. 진선이라는 애 말이야. 민진선.”     승주의 말에 석희가 엉뚱하게 끼어들자, 말을 자르고는 시원을 향해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한다.     “아... 응. 티나? 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뭐야, 진짜? 너 쟤 좋아해? 그래서 오늘 같이 데려온 거야?”   “아하하, 뭐 그렇게 됐네. 하하...”   “야!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음 우리가 눈치껏 빠져줬을 거 아냐.”   “아니, 뭐 그렇게까지...”   “됐고, 주영이라는 애. 이따 우리가 눈치 봐서 데리고 빠져 줄 테니까, 시원이 너는 진선이랑 둘이 시간 보내.”     승주는 시원과 석희에게 그렇게 말해두고는 카운터에서 사 온 음료수를 들고 후배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   한 시간 동안 신나게 노래를 부른 뒤, 승주와 석희는 서로 이상한 얼굴로 사인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아까 낮에 주영이 얘기했던 맛있는 떡볶이 가게에 가고 싶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리곤 주영에게 안내 좀 해 달라고 부탁하며,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을 돌린다. 주영은 진선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눈치 빠른 승주가 혼을 쏙 빼놓는 현란한 말로 '진선이는 시원이랑 할 얘기가 남았으니 우리끼리 가자'고 주영을 부추기곤 석희와 함께 황급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왁자지껄하고 애매한 분위기만 남긴 채 멀어져가는 친구들 쪽을 바라보며, 시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진선을 향해 묻는다.     “혹시, 떡볶이 먹으러 같이 가고 싶어?”   “아뇨, 괜찮아요. 아까 낮에 먹은 피자도 아직 소화가 덜 된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산책할래? 이쪽 길, 가본 적 있어?”     시원은 진선에게 수목원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며 묻는다.     “아뇨, 저 길 좋아요?”   “응, 예쁜 숲길 같아. 같이 걷자!”         시원은 오랜만에 진선과 함께 다카포로 향하는 수목원 길을 걷고 있다. 주영을 데리고 가며 석희가 푼수 없이 어설픈 연기를 시도하는 탓에 승주에게 구박받고 떠밀리듯 억지로 끌려가버리긴 했지만, 어쩐지 진선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 대충은 아는 눈치다.     “어때? 이 길 멋지지?”   “네, 좋은 향기가 나네요.”   “좀 더 걷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커피숍이 나오는데, 우리 거기서 차 한 잔 마실까?” “네.”     “저기, 그냥 편한 언니라고 생각하고 말 놓지 그래?”   “아... 그럴...까요?”   “응. 서클 애들 때문에 눈치 보여서 그러는 거라면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말 편히 하자.”   “응. 알았어, 언니.”   “헤헤~ 거봐. 말 놓으니까 더 편하고 친해진 것 같지?”   “응~”     두 사람이 한가로운 봄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에 다카포 카페가 보인다. 가로수 가득한 산책길에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던 ‘D.C’라고 쓰여 있는 간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기야.”   “다카..포?”     역시나 진선은 그 간판을 보고 ‘D.C’가 아닌 ‘다카포’라 말한다. 시원은 그런 진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잡고 이끌었다.     “들어가자.”   “응...”       “어서 오세요~”   시원은 오랜만에 사장님을 보고 너무나 반가웠지만,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시원은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마치 처음 보듯 대해야 할 것이다.       “다카포가 뭐야?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   “아.. 악보에 나오는 용어인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연주하라는 기호야.”     “어라? 우리 카페 이름 제대로 아는 사람 드문데. 학생, 음악 하는구나?”   메뉴판을 갖다주러 온 사장님이 진선과 시원의 대화를 듣고, 반가워하며 끼어든다.     “아뇨, 그냥 취미 삼아 피아노 치다가요...”   “잘됐네. 우리, 저 쪽에 피아노 있어. 언제든지 연주해주면 난 땡큐야~”     그는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검은색 그랜드피아노를 가리키며 말하고는 ‘연주를 하면 커피나 음료를 무료로 주겠다’는 메뉴판 한 쪽에 쓰여 있는 문구를 보여주었다.       시원과 진선은 헤이즐넛 커피를 시켰다.       “언니는 설탕 안 넣고 마셔?”   “응, 난 원래 설탕 안 넣어 마셔.”   “안 써? 커피가 향은 좋은데, 너무 쓰더라.”   “나이 들면 입맛도 변해. 나도 어릴 땐 꼭 각설탕 넣어야 먹고, 크림 넣은 커피 마시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 바뀌더라고.”   “응? 언니, 나랑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네. 후훗~”   “아... 그.. 그러게.. 하하하...”     시원은 진선이 웃으며 말하자 아차 싶었다.     “언니, 이거 생일 선물. 좋아해 줄지 모르겠는데, 저번에 언니가 쇼팽의 녹턴 너무 좋다기에 집에서 피아노 쳐서 녹음해왔어. 그리고 이건 열쇠고리. 요새 이렇게 열쇠고리 안에 색깔 있는 물 넣어서 가방에 달고 다니는 거 유행하더라. 교환일기 보고 언니가 파란색 좋아한대서 하나 샀어.”     시원은 진선이 주는 선물을 풀어보고 고맙다며 환하게 웃는다.   그녀는 지난날 자신의 추억 상자에서 이 열쇠고리를 찾았을 때, 오랜 시간이 흘러 파란색 물이 많이 빠져있어 서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게다가 진선이 준 녹음테이프는 그 시절, 카세트플레이어에 꽂아 둔 채 실수로 오토리버스를 눌러 밤새 틀어둔 탓에 테이프가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복구할 수가 없었는데, 다시 받게 되다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잘 간직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원이다.       “고마워, 진짜 감동이다. 나도 아까 팬시점에서 선물 하나 샀는데. 이거...”   “이게 뭐야?”   “이니셜 열쇠고리. 너도 가방에 달고 다니라고. MJS. 네 이니셜이야.”   “언니야, 이거 진짜 예쁘다. 고마워. 가방에 잘 달고 다닐게.”     시원은 아까 낮에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근처 팬시점에서 이니셜 열쇠고리를 사두었던 것을 꺼내어 진선에게 수줍게 건네주었다.       “있지, 사람들은 이 카페의 진짜 이름을 잘 모르고 그냥 D.C 카페라고 부른대. 사장님은 알면서도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게 놔두신 대고.”   “언니 여기 단골 인가 봐?”   “아... 응. 뭐... 그래서 말인데, 니가 아까 ‘다카포’라고 했잖아.”   “응. 왜?”   “그 이름. 우리 둘만 알고, 부르자고. 그리고 여기 이 장소도 딴 애들 알려주지 말고, 둘만 아는 추억의 장소로 만들까?”     진선은 자신에게 비밀 얘기를 하듯 얼굴을 바짝 당겨 앉고선 쑥스러워하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시원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되어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장난하듯 일부러 모르겠다는 척 되묻는다.     “왜? 그러고 싶어?”   “응. 사실.. 여기 아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은데... 조용하고 좋은 곳이니까... 그래서 음... 둘만 알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시원은 자신이 괜한 제안을 했나 싶어 귀까지 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는다. 진선은 그런 시원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그러자”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럼 약속해.”   시원은 진선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을 걸고는 환하게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너는 생일이 언제야? 그땐 내가 너 여기로 데리고 와서, 생일 축하 파티 해줄게.”   “얼마 안 남았는데? 이번 달 말일.”   “4월 30일?”   “응.”   “무슨 선물 받고 싶어?”   “음~ 글쎄. 언니가 주는 건 아무거나 다 좋아.”   “오케이, 서프라이즈 선물 준비해둘게!”     진선은 즐거워하며 함박웃음을 짓는 시원을 보며 말했다.     “언니, 꼭 어린애 같다.”   “왜? 유치해?”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나는 언니가 서클 회장이라 늘 차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같이 얘기해보니까 언니 참 어린애처럼 순수하고, 웃을 때 행복해 보이는구나 싶어서.”   “내가 웃을 때 행복해 보여?”   “응, 진심으로 행복해 보여. 그래서 언니가 웃으면 기분이 같이 좋아진 달까? 그래. 어쩜 그렇게 환하게 웃어? 비결 좀 알고 싶네.”     자신에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얘기하는 진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원은 멋쩍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세상에 두 번은 없을 시간을 선물 받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네가 있으니까...’       -   늦은 저녁, 진선을 집까지 데려가 주고 돌아오는 길. 시원은 다시금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오늘처럼 진선과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지...'   시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꿈같은 행운을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있다. 조금 전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귓가를 맴돌았고, 잠시였지만 자신과 함께하며 즐거워 보였던 진선의 미소는 여전히 시원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진선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이 길도 참 오랜만에 걸어본다. 그렇게 길가 여기저기에 핀 봄꽃들은 사랑스러운 향기를 내뿜으며 시원의 들뜬 마음을 따사로이 감싸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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