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4576 Words
[이루지 못한 만남] 시원이 승주네 집에서 자고 온 날, 부모님은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쳤다고 하셨다. 혹시나 몸이 더 상하는 건 아닐지, 두 부부는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요사이 자신을 대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시원은 다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더 이상 외박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두 분을 안심시켜드렸지만 사실 그날 이후, 메스꺼움과 통증이 더욱 잦아짐을 느낀다.       남부지방엔 벌써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여행을 떠나 사진을 찍고, 맛있는 것들을 먹는 등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고자 시원과 그의 가족들은 서로를 위해 애쓰고 있다.   여행 당시 시원은, 식구들이 자신을 위해 너무 많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가는 순간까지 행복한 모습이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을 지켜주기 위해 가족들은 시원 앞에서 최선을 다해 슬픔을 참아내며 평소처럼 즐거운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주었다.           =   승주는 시원이 다녀간 뒤로 진선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그녀가 결혼한 뒤, 인천 쪽에 자리를 잡았다는 대략적인 정보만 얻었을 뿐 결혼 후 바뀐 휴대폰 번호도, 도심 재개발로 다른 곳에 이사 가버린 그녀의 친정집 전화번호마저도 추적이 되질 않아 한 달이 넘도록 애를 먹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승주는 어쩔 수 없이 친구인 석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야, 이거 걸리면 난 죽음이야. 너 이거 불법이라고.”   “그럴 일이 있어. 꼭 좀 부탁하자.”     시원의 중학교 동창이자 승주와 함께 ‘삼총사’로 불렸던 석희는 경찰공무원이다. 체대를 졸업 후, 멋진 제복에 반해 여군이 되고 싶었지만 우연히 자신의 동네에서 연쇄살인범이 범행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한 뒤로 강력반 형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경찰이 된 친구다. 한때는 합기도와 유도, 태권도를 합쳐 도합 무술 5단의 실력을 갖춘 잘나가는 강력반 형사였고, 승진을 거듭한 지금은 ‘지능범죄수사팀’을 맡아 후배들에게 여전한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는 베테랑 팀장이다.   ‘민진선’의 신원조회를 부탁하자던 뜬금없는 승주의 연락에 무슨 일로 그러느냐며 되물었을 때, 이런 비보를 듣게 될 줄 석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시원의 소식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져,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방에서 경찰 일을 하느라 예전처럼 셋이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같은 성향을 가진 친구들이라는 공통점 그 하나만으로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었는데...’   석희는 중학교 때, 시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   농구공 하나면 행복했던 그 시절 시원과 석희는 자신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고민이 많던 소녀들이었다. 소년 같은 짧은 상고머리에 교복 치마 대신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고, 두 사람이 각자 운동장 양 끝에 있던 농구 골대에서 농구를 하다 마주친 그 순간. 그 둘은 서로가 같은 부류임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이후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시원과 석희는 성향이 비슷했고, 운동을 즐긴다는 취미도 같았다.     석희와는 학교가 갈라졌지만 시원이 고등학교에 진학 후, 승주를 만나면서 셋이 자주 뭉쳐 다니자 학생들은 그들을 삼총사라고 부르며 관심 있게 바라봤다.   미소년처럼 깔끔하고 수려한 외모의 세 소녀가 함께 다니면 사람들은 한 번쯤 그들을 향해 시선을 보내곤 했고, 농구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기에 농구부 출신의 시원과 석희에겐 중학교 때부터 이들을 좋아하고 따라다니는 여학생 무리가 늘 존재해왔다. 더군다나 이지적이고 샤프한 얼굴과 모델 같은 큰 키로 화구통을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따로 없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승주까지 이들과 합류하자, 세 사람을 바라보는 여학생들의 태도는 아이돌을 대하는 팬클럽 회원들처럼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여중·여고였기에 가능한 한때의 해프닝이지만 셋이 만나면 뭘 해도 즐거웠던 그 시절. 자신들을 동경해주는 선·후배와 친구들이 있어 더욱 즐겁고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세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가끔씩 모여 술자리를 할 때면 여전히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추억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불과 석 달 전, 크리스마스 겸 망년회 모임에서 만난 시원은 너무나 멀쩡했다. 그날 세 친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랜만에 모여 함께 술도 마시고 옛날얘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간암 말기라니...         **   석희는 연차를 내고 밤새 차를 몰아 서울을 향해 달렸다. 시원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속력을 내는 중이다. 하지만 그녀는 운전하는 동안 쉼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승주네 집까지 어떻게 차를 몰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석희는 늦은 밤 찾아간 승주에게서 사실을 전부 확인하고 난 뒤, 다리가 풀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날 그녀는 시원이 밝은 모습으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승주의 말을 전해 듣고,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려 애쓰며 시원의 본가로 찾아갔다. 하지만 초췌한 몰골로 자신을 반기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고 있는 친구의 의연함에 끝내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야 만다.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석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시원의 옅은 미소가 오늘따라 더 눈물겹다.   석 달 만에 다시 만난 시원은 거짓말처럼 너무나 많이 야위어있었고, 몹시 지쳐 보였다.         -   벚꽃이 필 무렵 시원은 서서히 뱃속에 복수가 차올라 숨 쉬는 것이 답답했고, 거북함 그 이상의 불쾌함을 느끼며 자주 피를 토했다. 모두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떠올리는 단어조차 입에 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약해져만 가는 시원을 바라보며,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짙게 드리워지고 있음을 서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병원에서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지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어가고, 며칠 뒤면 시원의 생일인 4월1일이 다가온다.   길어야 석 달이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자꾸만 생각났던 시원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안고 사는 사람처럼 매일 눈 감을 때 마다, ‘내일도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함과 불안감 속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그마저도 온종일 고열에 시달리고, 피를 토하거나 몸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면 차라리 이대로 아픔 없는 세상을 향해 빨리 떠나는 게 낫겠다고 포기할 만큼 피 말리는 두려움 속에 겨우 숨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시원의 생일날 아침.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셨던 어머니가 딸이 평소 좋아했던 음식들로 한 상 가득 생일상을 차리셨다.   시원은 복수가 차올라 배가 부풀어 오른 상태였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마지못해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술에 축인다.     “엄마, 아버지.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0년 전, 부모님을 다시 뵙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원은 자신의 생일상을 차려주시는 부모님께 매년 빠짐없이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왔다.     제대로 먹지 못해 퀭한 두 눈에 부종으로 퉁퉁 부어버린 잿빛 얼굴을 하고는 까칠한 피부와 터진 입술로 옅은 미소를 띠며, 자신을 보고 낳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딸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애달프다.   시원이 음식들을 제대로 삼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일지 모를 자식의 생일상을 입술 깨물며 겨우 차려냈던 어머니는, 안타까운 딸의 모습을 보자 끝내 돌아서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야 만다.         =   석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진선과 연락이 닿은 승주는, 모든 사실을 듣고 한참 동안 흐느끼던 진선을 달래어 시원을 만나러 간다. 마침 오늘은 시원의 생일이기도 했기에 진선을 데리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승주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볍다.     그 애를 보고 싶다는 시원의 간절함을 듣고 난 뒤, 한 달이 넘도록 진선을 찾지 못해 늘 시원에게 빚을 진 기분이었는데, 오늘 드디어 친구에게 그토록 바라던 사람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다.   시원에게 '진선이를 데리고 너희 집에 가는 중'이라며 전화를 했을 때, 밖에서 만나겠다는 얘기를 전해왔기에 승주는 시원의 집 근처 카페에서 진선과 함께 녀석을 기다리고 있다.         =   승주의 갑작스러운 연락에 시원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외출을 준비하는 중이다. 걱정하시며 집에서 만나지 그러느냐는 부모님께, 답답해서 그러니 집 근처 카페에서 잠시 만나고 오겠다고 말씀드리곤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시원은 2년 전 이맘때, 종로의 한 극장 앞에서 우연히 진선을 만난 적이 있다. 그날은 영화 [아비정전]의 세 번째 재개봉 일이었다..   진선은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돕고, 유치원에 아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종로의 한 극장에서 아비정전을 재개봉한다는 벽보를 보게 됐고, 그길로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까지 걸음 했다고 한다.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오다 마주친 두 사람은 함께 커피숍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모금에 그 동안 잘 지냈었냐는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며 잠시나마 짧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2년 만에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시원은 거울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단장해보지만, 아픈 기색이 역력한 낯빛과 복수로 인해 부풀어 오른 배가 제대로 감춰지지 않자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하다. 하지만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늘 진선과의 만남에서는 옛날에 그랬듯 바보처럼 절대 초라한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   집을 나서는 길. 따스한 햇살은 오늘따라 더욱 눈부셨다.     저 멀리 신호등 건너편에 약속한 카페가 보이고, 승주의 맞은편엔 진선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카페 유리 너머로 등을 돌리고 앉은 저 사람이 진선이라고 생각하자 시원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온다. 안 그래도 추레한 모습이 싫었던 그녀는 고통 속에 일그러진 자신의 못난 얼굴만은 진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다급히 주머니에서 진통제를 꺼내 입속에 털어 넣는다. 한 움큼을 삼켰는데도 통증은 가실 줄 몰랐다. ... .. . 그 동안 삼거리의 신호는 두어 번 바뀌었고, 시원은 끝내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져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   승주는 시원을 기다리며 초조한 듯 커피잔을 매만지는 진선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그녀의 두 눈엔 여전히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그때 커피숍 안의 사람들이 갑자기 창밖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연이어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맞은 편 길가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던 승주와 진선은 누군가 급히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진동이 울리던 승주의 스마트폰 창 위엔 시원의 이름과 번호가 떠 있었지만, 전화를 받았을 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시원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승주는 눈물을 흘리며 진선과 함께 5분 거리에 위치한 근처 대학병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K 대학병원 응급실. 119대원들이 환자를 실은 카트를 밀며 다급히 중증 치료 구역으로 들어선다.     “말기 암 환자로 다량의 진통제를 복용 후 쇼크로 쓰러졌습니다.”   “보호자는요?”   “환자의 휴대폰 속 최근 통화 기록으로 연결된 분께 보호자와 연락을 취해 달라고 부탁드렸고, 간암 말기 환자로 이 병원에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구급대원이 시원을 옮기며 급하게 보고하듯 말하자 의사는 숨을 헐떡이며 가쁘게 호흡하는 시원의 눈꺼풀을 열고 의식을 확인한다. 그리곤 재빨리 인턴에게 기관 삽관과 인공호흡기를 적용하라고 지시했다.   “우리 병원 의무기록 좀 알아봐 주고, 심전도 체크 빨리!”       “선생님, 심정지예요!”   심전도를 체크하던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에 기관 삽관을 하고 있던 인턴은 급히 흉부 압박을 실시하며 심폐소생술을 시도해 보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재빨리 제세동기를 준비한다.   “200줄 charge. 양쪽 패들 위치잡고! 제세동 시작 합니다. 모두 물러나세요!”   “하나, 둘, 셋. 클리어!”     전공의가 시원의 몸 위에서 압박을 가하며 제세동을 실시하자, 시원의 몸은 짧게 요동쳤다.       “더는 들어오시면 안 돼요!”   응급실 안, 중증치료실 입구로 들어서려는 승주와 진선을 향해 간호사들이 다급히 막아선다.     “저기에 내 친구가 있어요!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제발... 흐흑...”   절규하듯 애원하는 두 사람을 말리던 간호사는 보호자들이 안쪽을 보며 동요하지 않도록 레일이 달린 커튼을 쳐 두 사람의 시야를 가로막았고, 안에선 의식을 잃어가는 시원을 향해 심폐소생술이 한창인지 분주하고 다급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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