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3077 Words
제 2장 분노에 잠긴 토르는 몇 시간이 넘도록 이곳 저곳으로 언덕들을 배회했다. 그러다 결국엔 언덕 위에 주저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사라지며 남긴 흙먼지가 모두 다 없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지켜봤다. 더 이상 마을에 방문객이 찾아올 리 만무했다. 토르는 또다시 이 작은 마을에서 행여 찾아올지 모를 실버부대를 기다리며 기약 없는 몇 년을 보내야 했다. 그마저도 만에 하나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집에 남겨진 사람은 토르와 아버지, 단 둘뿐이었다. 앞으로 토르에게 노여움을 고스란히 드러낼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또다시 아버지의 종 노릇이나 하며 살다가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토르도 아버지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게 뻔했다. 나머지 형제들이 명예를 얻는 동안, 토르는 작은 마을에 갇혀 초라하고 천한 삶에 안주해야 했다. 갑자기 분노로 피가 솟구쳤다. 이건 토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토르는 이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묘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짰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몇 시간을 앉아있다 결국 낙담한 채 일어나 익숙한 마을 언덕들을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어느새 토르는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첫 번째 태양은 이미 하늘 밑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두 번째 태양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솟아 초록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느릿느릿 걸으며, 허리 춤에서 오랜 사용으로 보기 좋게 바랜 가죽 장식 끈을 풀었다. 토르는 다시 손을 뻗어 허리에 연결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그 동안 좋다 하는 개울가에서 하나하나 수집해둔 매끄러운 작은 돌멩이들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가끔씩 토르는 돌멩이로 새총을 쏴 날아가는 새를 맞췄다. 그러나 보통은 쥐를 겨눴다. 몇 년 동안 거듭하며 몸에 익힌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움직이는 목표물을 맞췄고 그 이후부턴 뭐든 명중시켰다. 이젠 뗄래야 뗄 수 없는 취미가 돼버렸다. 새총을 쏘며 마음 속 분노도 떨쳐냈다. 형들이 검을 휘둘러 통나무를 벨 수 있을진 몰라도 돌멩이 하나로 날아가는 새를 명중시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새총에 돌을 채우고 최대한 뒤로 잡아 당긴 뒤 온 힘을 다해 쏘았다. 마음속의 목표물은 아버지였다. 돌은 꽤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를 명중시켰고 덕분에 나뭇가지가 힘없이 꺾여나갔다. 돌을 던져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토르는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를 겨냥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목표물은 오로지 나뭇가지뿐 이였다. 단, 양떼 주변에 여우가 접근할 때는 예외였다. 점차 토르의 양떼 주변에는 그 어떤 여우일지라도 얼씬조차 못했고, 덕분에 양떼들은 마을에서 가장 안전하게 방목됐다. 지금쯤 형들이 어디쯤 있을까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왕실에 당도하기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형들의 향후가 눈 앞에 절로 펼쳐졌다. 최대한 옷을 차려 입고 나온 사람들의 대대적인 축하와 환영인사를 받으며 왕궁에 당도하는 형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형들은 전사들의 환영을 받는다. 다름아닌 실버부대 대원들의 환영을. 형제들은 왕의 부대에 최종 선발되고 부대 막사에서 생활하며 왕실 훈련장에서 가장 좋은 무기로 훈련을 받을 것이다. 각자 실버의 후원을 받는 후견부대원이 되고 언젠가는 실버가 되어 전용 말과 갑옷을 하사 받는 대지주가 될 것이다. 그럼 형들은 모든 축제와 왕의 만찬에 빠지지 않고 초대를 받게 된다. 매력적인 삶이 아닐 수 없었다. 토르는 이 모든걸 놓친 것이다. 전신에 고통이 전해졌다. 마음 속으로 꾹꾹 누르려 했으나 맘처럼 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스스로에게 외쳐댔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진정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이보다 더 멋지다고. 그 삶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알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곳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르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언제나 느끼며 살았다. 특별한 존재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 누구에게서도 이해 받지 못하고 과소평가됐다. 가장 높은 언덕에 오른 토르는 양떼를 찾아봤다. 훈련이 잘 된 양들은 다 함께 무리 지어 있었고 그곳에 있는 풀을 닥치는 데로 만족스럽게 뜯어먹고 있었다. 털에 염색해 둔 빨간 표식을 확인하며 양들을 하나하나 셌다. 그러나 토르는 양의 수를 모두 확인하고는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리가 모자랐다. 반복해서 세고 또 세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한 마리가 없어졌다. 토르는 지금까지 한번도 양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양을 잃어버리면 아버지가 토르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이 황무지에 양 한 마리가 속수무책으로 길을 헤맨다는 생각에 토르는 더욱 속이 상했다. 무고한 생명이 고통 받는 건 그에겐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덕 가장 높은 곳으로 황급히 올라 저 멀리 수평선까지 늘어진 여러 언덕들을 살피며 빨간 표식을 등에 품은, 홀로 된 양을 찾아보았다. 사라진 양은 무리들 중에서 가장 야생성이 강한 놈이었다. 양은 이미 멀리까지 도망친 상태였다. 게다가 수많은 장소 중에서도 다름아닌 서쪽 다쿠우드로 향하고 있었고, 이에 토르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다크우드는 양뿐만 아니라 사람의 출입도 금지된 곳이다. 마을의 경계 너머에 있을뿐더러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부터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이란 걸 학습했다. 차마 가볼 엄두도 못 냈다. 전설에 따르면 그곳엔 미로 같은 숲과 사악한 동물들로 가득해 결국 죽어서야 헤어나올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갈등에 휩싸인 토르는 다크우드 위에 펼쳐진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양을 그렇게 죽게 놔둘 수 없었다. 당장 서두른다면 다크우드에 가기 전에 양을 데려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양의 위치를 살핀 후 어둑한 하늘로 뒤덮인 다크우드를 향해 서쪽으로 재빠르게 뛰었다. 마음은 무겁게 철렁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몸은 달리고 있었다. 이젠 되돌리고 싶어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마치 아주 무시무시한 악몽을 향해 돌진하는 기분이었다. * 토르는 쉬지 않고 달려 수많은 언덕을 지나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인 다크우드로 가고 있었다. 산길이 끝난 곳 맞은편에 다크우드 숲길이 펼쳐졌다. 토르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숲 속으로 힘껏 질주해 들어갔다. 발 밑에선 바삭 하고 마른 나뭇잎들이 으스러졌다. 숲 속에 진입하자마자 어둠이 토르를 덮쳤다.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숲 속은 매우 추웠다. 들어선 순간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어둠이나 한기 외에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분명 느껴졌다. 관찰 당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토르는 고개를 올려 자신의 몸통보다 두껍고 울퉁불퉁한 아주 오래된 나뭇가지들을 둘러봤다. 가지들이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며 삐걱댔다. 숲 안으로 열 다섯 걸음 정도 걸어갔을 뿐인데 이상한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봤지만 토르가 들어온 숲의 입구는 이미 시야에서 희미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토르는 주저하고 있었다. 마을 주변으로 다크우드가 존재하는 까닭에 토르에겐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어떤 목동도 도망간 양이 다크우드로 간다면 그 뒤를 쫓지 않았다. 설령 토르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다크우드에 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들려왔고 모두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 예외였다. 토르는 깊게 자리잡은 고정관념들을 무시했고 오히려 주위 깊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 눈 앞에 펼쳐진 인생을 따라가라며 스스로를 한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숲 속 깊은 곳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지만 이내 멈춰 섰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았다. 때마침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도망간 양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토르는 그 흔적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한참 후, 그는 다시 방향을 바꿨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영락없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신세가 됐다. 기억을 더듬어 돌아온 길을 찾으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뼛속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길을 재촉했다. 저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곳으로 몸을 이끌었다. 작은 빈터였다. 이내 토르는 그 곳 가장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 앞에는 푸른색 공단을 길게 늘어뜨린 의복을 입은 한 남자가 토르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토르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존재였다. 바로 마법사였다.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당당하게 서 있는 그는 세상을 초월한 듯 매우 고요해 보였다. 토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의복 위에 정교하게 금빛으로 장식된 표식만 보아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왕실의 문양이었다. 토르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왕실 마법사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영원의 순간이 흘러간 듯 느껴졌을 때 마법사는 천천히 뒤를 돌아 토르를 마주했다. 토르는 그를 바로 알아봤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왕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인물 중 하나, 수 세기 동안 서부 왕국 선대 왕들의 고문 역할을 해온 왕의 직속 마법사, 아르곤. 무엇 때문에 그가 왕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다크우드 한가운데 와있는지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토르는 혹시 환영을 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눈빛이 너를 말해주는구나.” 아르곤은 토르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고풍스런 저음이 마치 나무들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크고 투명한 눈은 마치 토르를 투영하는 듯 보였다. 태양을 마주하는 듯한 강렬한 에너지가 마법사에게서 전해졌다. 토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 제가 방해가 됐다면 용서하십시오.” 왕의 고문에게 무례를 범하면 구금되거나 처형된다. 토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속에 새긴 불변의 진리였다. “일어나거라, 얘야. 무릎 꿇길 바랬다면 이미 명령 했겠지.” 토르는 천천히 일어나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르곤은 토르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이내 멈춰 토르를 주시했고 토르는 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네 어머니의 눈을 꼭 빼 닮았구나.” 토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었으며, 아버지 외에 어머니를 아는 사람 또한 만나본 일이 없다. 토르를 낳다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이로 인해 토르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족들에게 미움 받는 이유가 어머니의 사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전 어머니가 없습니다.” “진정 그런가?” 아르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 혼자 널 낳았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 오라, 주군, 제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맥클라우드 가의 토르그린. 4형제 중 막내. 선발되지 못한 소년.” 토르는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르곤 같이 위상이 높은 존재가 자신을 알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사람 외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어떻게 모든걸 알고 계시죠?” 아르곤은 미소를 지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토르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머뭇거리던 토르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제 어머니를 아시죠? 뵌 적이 있나요? 어떤 분인가요?” 아르곤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 질문하거라.” 어안이 벙벙해진 토르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혼돈스럽고 신비로운 만남이었다. 아르곤을 이렇게 떠나 보낼 순 없었기에 토르는 곧장 아르곤을 쫓아갔다. “이곳엔 왜 오신 거죠?” 토르는 아르곤을 붙잡기 위해 서둘러 뛰었지만, 수천 년 된 상아색 지팡이를 쥔 아르곤의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이 빨랐다. “저를 기다리셨던 건 아니죠?” “그럼 누구였겠나?” 아르곤을 따라잡기 위해 빈 터를 뒤로하고 숲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왜 저를요? 제가 여기 올걸 어떻게 아셨죠? 제게 무얼 원하시는 거죠?” “끝이 없는 질문 세례군. 질문만 가득해. 자넨 오히려 들어야 하는데.” 토르는 빽빽한 숲 사이로 계속해서 쫓아가며 최대한 질문을 자제하려 애썼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왔구나. 고결한 노력이야. 허나 애석하게 시간만 낭비할거야. 양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토르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아시죠?” “네가 절대 헤아릴 수 없는 세상을 알고 있단다, 얘야, 적어도 지금은 네가 알 수 없는 것들 말이다.” 마법사의 뒤를 쫓는 내내 의문만이 가득했다. “넌 내 충고를 듣지 않겠지. 그게 네 천성이야. 고집불통. 네 어머니처럼. 양을 구하겠다고 계속해서 찾아 돌아다닐게 뻔하구나.” 아르곤에게 속마음을 들킨 토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넌 거침없는 소년이란다. 의지가 강해. 당당하고 긍정적이야. 그러나 언젠가는 이로 인해 네가 몰락할 수도 있단다.” 토르는 이끼가 가득한 산등성이로 오르는 아르곤을 계속 뒤쫓았다. “왕의 부대에 선발되고 싶었지.” “네! 제게 다시 기회가 올까요? 제게 기회를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아르곤은 웃었다. 저음의 공허한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바람에 토르의 등에 한기가 돋았다. “원하는 데로 할 수야 있지. 허나 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모두 네가 내리는 선택이 좌우하지.” 토르는 이해하지 못했다. 산마루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가던 길을 멈춘 아르곤이 토르는 바라봤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걸음 남짓이었고 아르곤이 발산하는 기운이 너무 강해 토르를 태워버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네 운명은 비범해. 절대 저버리지 말거라.” 토르는 눈을 크게 떴다. 운명? 비범? 덕분에 온 몸이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이해하기 어려워요. 알 수 없는 말씀뿐이에요. 좀 더 말해주세요.” 아르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토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온 사방을 둘러보고 주위의 소리를 살피며 주변을 뒤졌다. 꿈을 꾼 것인가? 환영을 본 것인가? 돌아서서 숲 속을 살폈다. 산마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확실히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멀리서 움직임이 감지됐다. 소리를 들어보니 잃어버린 양이 분명했다. 이끼가 가득한 산등성이를 내려와 숲 속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내려가는 내내 아르곤을 마주친 일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수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이런 곳에 왕의 마법사가 찾아온 것인가? 그는 토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마법사가 언급한 토르의 운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수수께끼를 풀려 하면 할수록 궁금증만 증폭됐다. 아르곤은 토르에게 의문만 잔뜩 심어준 채 질문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걸어갈수록 뭔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것만 같았다. 방향을 틀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두 발이 굳어버렸다. 예상했던 악몽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서며 이곳 다크우드에 오기로 한 결정이 어마어마한 실수라는걸 몸소 깨달았다. 토르의 맞은편, 약 서른 걸음 너머로 시볼드가 보였다. 억센 근육과 흉측한 외모, 말과 비슷한 크기에 네 발로 서있는, 다크우드에서 아니 왕국을 통틀어 가장 무시무시한 짐승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전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자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그보다 크고, 진한 홍색 빛 가죽에 이글거리는 노란 눈을 품은 짐승. 전설에 따르면, 시볼드의 심홍 빛은 무고한 아이들의 피로 물든 것이었다. 평생 동안 이 짐승을 봤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있었다면 믿을 수가 없는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했다. 시볼드와 마주쳐 살아남은 사람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일부는 시볼드가 숲의 신이자 흉조라고 믿었다. 왜 흉조라고 여겼는지 당시의 토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한걸음 물러섰다. 시볼드의 거대한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양쪽 송곳니에선 침이 뚝뚝 흘러나왔다. 노란 눈동자는 토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입에 문 것은 다름 아닌 토르의 양이었다. 울부짖으며 뒤집힌 채로 송곳니에 몸이 박혀있었다. 거의 죽은 상태였다. 양이 죽을 때까지 서서히 괴롭히며 고문을 즐긴 모양새였다. 토르는 양의 비명소리를 견딜 수 없었다. 양은 꼼지락거리긴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토르는 죄책감이 들었다. 처음엔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시볼드의 속도는 무엇보다 빨랐다. 도망가는 건 이 짐승을 자극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양이 저런 식으로 죽어가는걸 가만히 지켜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움에 온 몸이 굳어버렸지만 뭐든 해야 했다. 반사신경이 작용했다.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멩이 하나를 집어 새총에 끼웠다. 떨리는 손으로 새총을 감아 올려 앞으로 나아가 힘껏 쏘았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적중했다. 명중이었다. 양의 눈을 적중한 돌멩이는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어 뇌를 격파했다. 양은 축 쳐졌다. 죽어버렸다. 목숨을 끊어 더 이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덜어줬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죽어버리자 시볼드는 분노의 눈길로 토르를 노려보았다. 서서히 큼지막한 입을 벌려 양을 바닥에 떨궜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양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이제 시볼드의 눈에 들어온 건 토르였다. 시볼드의 복부에서부터 사악하고 깊은 으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시볼드가 토르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토르는 떨리는 마음으로 돌멩이 하나를 새총에 끼워 다시 한번 조준했다. 재빠르게 뛰어올라 돌진하는 시볼드는 지금껏 토르가 보아온 그 무엇보다 빨랐다. 토르는 앞으로 발을 디뎠고 제발 명중하길 바라며 돌을 던졌다. 다시 한번 돌을 던질 기회 따윈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토르가 던진 돌은 짐승의 오른쪽 눈에 명중해 눈알을 파열시켰다. 몸짓이 작은 동물을 충분히 굴복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그러나 시볼드는 작은 짐승이 아니었다.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상처에 비명을 질렀지만 계속해서 질주했다. 한쪽 눈 만으로도, 심지어 돌멩이가 눈을 파고 뇌리에 박혀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거뜬하게 토르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토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잠시 후 시볼드는 토르의 몸에 올라탔다. 거대한 발톱을 휘둘러 단숨에 토르의 어깨를 찢었다. 토르는 비명을 질러댔다. 칼날 세 개가 살을 베어내는 것 같았고 단숨에 뜨거운 피가 분출했다. 시볼드는 네 발로 토르를 눌러 바닥에 고정시켰다. 코끼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마냥 무게가 상당했다. 갈비뼈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시볼드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토르의 목덜미를 노렸다. 토르는 다가오는 시볼드의 목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근육 덩어리를 쥔 느낌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티기에는 힘이 부쳤다. 토르의 팔엔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한 반면, 시볼드의 송곳니는 점차 가까워졌다. 시볼드의 뜨거운 입김이 토르의 얼굴에 전해졌고 목에는 시볼드의 침이 떨어져있었다. 시볼드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토르의 귓가를 에워쌌다. 죽음을 예견한 순간이었다. 토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신이시여. 부디 제게 힘을 내려주소서. 이 짐승을 물리치게 해주소서. 부탁 드립니다. 이렇게 애원합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번 한번만 신세를 질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순간 무언가가 달라졌다. 엄청난 열이 핏줄을 타고 토르의 몸 속에서 솟구쳤고 마치 에너지 장이 그의 온 몸을 활보하는 것만 같았다. 눈을 떠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의 손바닥에선 노란빛이 발사되고 있었고 시볼드의 목을 다시 밀어냈을 땐 놀랍게도 짐승과 힘의 세기가 같아져 시볼드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 계속된 저항 끝에 결국 시볼드를 밀쳐낼 수 있었다. 힘은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포탄처럼 강력한 원기가 느껴졌다. 얼마 후 토르는 시볼드를 3미터 밖으로 던져버렸고 시볼드는 등뒤로 나가 떨어졌다. 얼떨떨해진 토르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볼드도 다시 일어섰고 격분한 채 토르를 향해 돌진했다. 토르는 달라진 무언가를 느꼈다. 그의 몸 안에 흐르는 힘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자신을 느꼈다. 시볼드는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 틈에 토르는 몸을 낮춰 시볼드의 복부를 움켜쥐고 세차게 던졌다. 날아가는 짐승을 보며 알아서 나가 떨어지도록 내버려뒀다. 시볼드는 숲 속으로 날아가 나무에 세게 부딪힌 뒤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지켜보던 토르는 놀라웠다. 방금 전 던져버린 게 진정 시볼드였던가? 시볼드는 눈을 두 번 깜빡인 뒤 토르를 쳐다봤다. 이내 다시 일어나 토르에게 돌진했다. 시볼드가 토르를 덮쳤고 토르는 시볼드의 목을 잡았다. 땅 위에서 뒹굴다 시볼드가 토르 위를 올라탔다. 토르는 다시 몸을 굴려 시볼드 위에 올라탔다. 토르는 양손으로 몸을 위로 일으켜 송곳니로 공격을 시도하는 시볼드의 목을 졸랐다. 그 순간 새로운 힘이 솟구쳤고 더욱 손을 꽉 쥐어 시볼드를 제압했다. 온몸으로 힘을 퍼트리자, 이내 놀랍게도 토르는 시볼드보다 힘이 강해져 있었다. 시볼드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을 졸랐고 마침내 시볼드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약 일분가량 시볼드의 숨통을 놓을 수 없었다. 토르는 가쁜 숨을 쉬었다. 놀란 눈으로 땅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처 입은 팔을 감싸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진정 토르가 시볼드를 죽였단 말인가? 수 많은 날들 중에서도 바로 오늘, 토르는 무언의 징조를 느꼈다. 방금 전 무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왕국에서 가장 악명 높고 무시무시한 시볼드를 이제 막 그의 손으로 제압한 후였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었고 무기도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자신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게 무얼 뜻하고, 자신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록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이런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마법사들뿐이었다. 그러나 토르의 부모들 중 그 누구도 마법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토르도 마법사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그가 마법사일 수 있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아르곤이 죽은 시볼드를 내려보며 서 있었다. “이곳엔 어떻게 오신 거죠?” 아르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 보신 건가요?” 토르는 아르곤과의 만남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요.” “넌 잘 알고 있단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식하고 있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그건……갑자기 솟구친 힘이었어요. 저도 모르던 그런 기운이요.” “에너지 장이란다. 어느 날 모든걸 깨닫게 될 거다. 아마 조정하는 방법도 터득하겠지.” 토르는 어깨를 꽉 움켜 쥐었다. 극심한 통증에 고개를 숙여 손을 보니 피가 흥건했다. 지금 당장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했다. 아르곤은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 잡은 토르의 반대편 손을 상처 위에 올렸다. 그대로 손은 얹은 뒤 몸을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감았다. 상처 입은 팔에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몇 초 뒤, 손위로 흐르던 피가 멈췄고 상처의 고통도 사라졌다. 어깨를 내려다본 토르는 의아했다. 몸이 치유되고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시볼드의 발톱에 긁혀 생긴 세 줄의 흉터뿐이었다. 그것마저도 이미 며칠 전 치료된 흉터처럼 살점이 서로 잘 붙어있었다.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았다. 경악한 토르는 아르곤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신 거죠?” 아르곤이 미소 지었다. “내가 한 게 아니란다, 네가 했지. 난 그저 네 힘을 인도했을 뿐이야.” “제겐 그런 치유의 능력이 없어요.” 토르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정 없는가?” “이해할 수 없어요. 이 모든 게 이해되질 않아요. 부탁이에요, 말씀해주세요.” 토르는 점점 더 초조해지는 자신을 자제할 수 없어 아르곤을 재촉했다.. 아르곤은 외면할 뿐이었다. “세월을 보내며 차차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지.” 토르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말씀은 제가 왕의 부대에 선발될 수 있다는 건가요?” 토르의 어조는 몹시 흥분돼 있었다. “그렇죠, 시볼드도 제압했으니 저도 이제 다른 선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요.” “물로 그렇고말고.” “그렇지만 선발 된 건 제 형들이에요. 제가 아니라고요.” 토르는 다시 아르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실버는 이미 한번 저를 거절했어요. 어떻게 해야 제가 선발될 수 있죠?” “언제부터 전사가 누군가의 초대를 기다리게 된 거지?” 아르곤의 대답이 토르의 가슴 깊이 전해졌다. 덕분에 토르의 몸에 활기가 돋았다. “그럼 제가 언제든 찾아가도 되는 건가요? 허락 없이도?” 아르곤은 미소 지었다. “네 운명은 스스로만 좌우할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토르가 눈을 깜빡이던 그 순간 아르곤은 또다시 자취를 감췄다. 토르는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이쪽이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눈 앞에 큰 바위가 보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토르는 바위를 올라타 위로 향했다.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여전히 아르곤이 보이지 않아 토르는 의아했다. 그곳에서 보니 다크우드 나무들의 뾰족한 윗부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다크우드가 끝나는 지점도 보였고, 두 번째 태양이 짙은 녹색빛으로 저무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왕실로 가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저 길에 오르려무나, 그럴만한 용기가 있다면.”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울려대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토르는 분명 아르곤이 주변 어딘가에서 그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아르곤의 말에 동조했다. 토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위 밑으로 내려가 저 멀리 있는 길을 찾아 숲 길을 헤쳐나갔다. 그리고는 운명을 찾아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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