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기를 원해 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계획적인지 충동적인지, 소심한지 활발한지 등등 인간은 언제나 인간의 분석 대상이었다.
그런 욕구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특징을 '눈에 보이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색깔'로서.
어떠한 원인 없이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나타난 '색깔'은 마치 구름처럼 제 주인의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색구름'이라고 명명했다.
색구름은 갑작스레 나타난 만큼 꼭 마법 같았다. 당최 이게 어떤 물질인지, 물리력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같은 골 아픈 문제는 제쳐두고, 색구름의 가장 신비로운 점은 그것에 주인의 감정이 담긴다는 것이었다. 색구름은 주인의 의지와 감정에 따라 움직였으며 타인의 색구름을 만지면 그 사람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순간의 감정뿐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도 색구름이 한명의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색구름의 색이 지문처럼 고유한 것이며, 인간의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그 색과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래전에 유행했던 한 성격 유형 테스트가 다시 유행을 타기 시작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테스트는 색깔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이었고, 겨우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깔로 사람을 분류해놓은 그 테스트의 결과가 몇 번 색구름의 색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얼추 들어맞으니 사람들은 점점 그 테스트를 맹신하게 되었다. ‘이런 성격은 저런 색구름, 저런 색구름은 그런 성격’. 확실하지 않은 사실이 널리 퍼지니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그에 대해 전국적인 조사까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테스트의 신뢰성은 50% 미만. 테스트의 결과와 실제 성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허나 사람들의 의식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는 색구름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 후로도 말은 부풀려지고 추가되고 왜곡되었다. 별의별 미신과 편견이 생겨났으며 수많은 차별이 사회에 팽배해졌다. 그쯤 되니 화근이었던 그 테스트는 원형도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이후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폭력이었다.
그 폭력 속에서 가장 많은 논란에 휩싸인 색은 단연 극과 극인 흰색과 검은색이었다. 으레 유명한 종교나 오래된 토착신앙에서 그렇듯 사람들은 밝은 색구름이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어두운 색구름이 부정적인 성격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두루뭉실한 추측일 뿐이었으나 한 사건 이후로 그 추측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12명이 살해된 끔찍한 연쇄살인이었다. 4년의 추격 끝에 붙잡힌 범인의 색구름은 그 파장을 우려해 일단 비밀에 붙여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얼마 못 가 범인의 색구름이 까발려졌다.
심연처럼 새까만 색구름이.
그 이후로 검은 색구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진창으로 처박혔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검은색이 최악으로 가라앉으니 대척점에 선 흰색은 자연스럽게 최상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흰 색구름이라면 무조건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굳어진 인식들은 꽤 오랜 시간동안 사회를 지배했다. 사람들은 그 옛날 인종과 피부색으로 그랬듯이 쉽게 매도하고 업신여겼다. 수십 년이 지난 현재는 그나마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이미 부당하게 차별받아온 이들과 아무 이유 없이 우대받아온 이들 사이에는 골이 깊었다.
그리고 그건 별세계인 연예계도 마찬가지였다.
#
"이번이 마지막이었던가?"
아버지의 질문에 나린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본 오디션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간은 아직 한 달 정도 남았잖아요."
"얼마 안 남았네."
여전히 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듯한 말을 들으며 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린의 집안은 대대로 흰 색구름을 타고나 부와 권력을 축적한 집안이었다.
집안사람들은 대부분 흰 색구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나린의 아버지인 하백언은 흰 색구름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들 중 유일하게 짙은 붉은 색구름을 가지고 있었다.
색구름 때문에 백언은 집안에서 온갖 무시와 차별을 당했다. 집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피아니스트여도 백언은 절대 형보다 유명해질 수 없었다. 백언은 자연스럽게 시기와 열등감에 잠식되었다.
그 시기와 열등감은 자식인 나린에게까지 이어졌다. 백언은 자신의 딸이 선명하고 깨끗한 순백의 색구름을 갖고 태어나자 일찍부터 나린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백언에게는 운 좋게도 나린은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된 나린의 꿈은 피아니스트가 아닌 가수였다. 백언은 크게 실망했지만 나린의 노래 실력도 꽤나 유망했기에 잠시 내버려두었다.
나린은 노래를 공부한지 얼마 안 되어 중형 기획사에 입사했고, 어린나이에 금세 데뷔를 앞두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련의 사고로 인해 나린은 데뷔를 포기하고 소속사를 나왔다. 데뷔뿐만 아니라 노래도 피아노도 공부도 모두 손을 놓아버렸다. 완전히 무너진 사람처럼 잘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백언은 그런 나린을 돌봐주기는커녕 이렇게 말했다.
'방황하는 건 딱 고3 까지다. 그 이후로도 다른 소속사를 찾지 못하면 다시 피아노를 가르칠 테니까.'
그때가 나린이 막 고1이 되었을 때였다. 당시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라 있던 나린은 백언의 말에 오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한번 데뷔 문턱까지 갔었으니 다시 소속사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둘 때까지 나린은 그 어떤 오디션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나린은 이미 실용음악과에 지원해서 당당히 합격한 후였다. 그것도 서울의 꽤 이름난 대학이었다. 그러나 백언은 요지부동으로 졸업까지 카운트다운을 했다. 고작 두 달도 남지 않은 그때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대학 합격 같은 건 상관없다는 듯이. 내심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제 말을 조금은 들어줄 줄 알았던 나린은 낙담했다.
타인으로부터 비롯된 감정은 뭐든 자신을 망가트린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린은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했다.
그래서 문제였다.
나린이 짜증을 가라앉히고자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중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친구 다미의 문자였다.
"!"
문자 내용을 확인한 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이번에 그거 들었어? 선아 언니 새 프로 하는거?"
"나 들었어! 오디션 프로그램!"
수시 접수가 끝나가는 12월 첫째 주. 영화나 보며 잠에 찌들어있을 3학년 교실이 웬일로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컴백한 유명 연예인의 드문 프로그램 출현 소식 때문이었다.
본명 박선주, 예명은 선아. 밀키웨이 엔터테인먼트의 이사이자 스타들의 우상이라 불리는 댄스 가수인 그는 이번 20주년 앨범과 함께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을 예고했다. 어제 올라온 티저에선 선아를 포함한 쟁쟁한 심사위원 라인이 공개 되어 화제였다.
"프로 이름이, 뉴 스타였나?"
"요즘 신인들도 뜸한데 덕질할 사람 좀 나와 주면 좋겠다~."
까르륵, 교실에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편 뉴-스타 촬영장. 심사위원 선아의 대기실에서도 똑같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진짜? 이거 프로명 네가 지었다고?"
"그래..."
"어쩐지 너무 올드하다 싶더니!"
배를 잡고 깔깔깔 웃어대는 선아 앞에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앉아있는 밝은 주황머리의 여성은 선아의 데뷔 동기인 다정이었다.
다정은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대한민국 대표 여성 발라더이자 뉴-스타의 주축인 BG 기획사 대표로, 선아와 함께 뉴-스타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아니... 갑자기 의견을 물어보길래 대충 말했는데...... 회의 내내 그것보다 나은 게 하나도 안 나올 줄은 몰랐지!"
"진짜ㅋㅋㅋ 대박ㅋㅋㅋㅋㅋ 예명도 못 지어서 결국 본명으로 활동하는 애한테ㅋㅋㅋ"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누군지 허락도 없이 슬그머니 열리는 문에 선아와 다정의 시선이 쏠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 아가씨들?"
"어머, 선배!"
"정운 선배!“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건 검은 곱슬머리를 한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였다. 바로 최근 떠오르고 있는 비상 기획사의 사장 겸, 유명한 밴드 보컬 출신의 가수 권정운이었다.
뉴-스타의 마지막 심사위원이자 선아와 다정의 3년 선배인 정운은 먼저 대기실의 주인인 선아에게 작은 케이크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선아야, 20주년 축하한다. 이번 앨범도 잘 들었어."
"어우, 답지 않게 점잖은... 고마워요, 선배."
선아는 짓궂게 웃으면서도 두 손으로 선물을 받아들었다. 선아의 불꽃처럼 선명한 붉은 머리와 잘 어울리는 장미였다. 선아가 꽃다발의 향기를 맡으며 선물들을 정리하는 사이 정운은 다정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정아,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정운 선배."
"그래서, 이 프로그램 이름을 네가 지었다고?"
"으악! 어디서부터 들으신 거예요?!"
"선아 웃음소리가 어찌나 청아한지 밖까지 다 들리더라~."
"아 박선주!"
한때 연예계 3대 비글이라고 불렸던 세 명이 만나자 대기실은 떠나가라 시끄러워졌다. 그렇게 떠들고 놀기를 몇 분 지났을까. 스텝 중 한명이 대기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촬영 시작합니다! 심사위원 분들 모두 자리로 올라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