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타인들

4980 Words
쪼오오옥 후루룹후루룹!! 가영은 편의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야외 벤치는 노숙자 아저씨에게 빼앗겨 버렸다. 가영은 빨대를 빨아당기며 생각했다. 주머니 속 천원짜리 두장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단 말이지.." 가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가영은 한번 본 얼굴은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 일주일 전. 가영은 어느때와 같이 친구와 토크토크를 즐기고 있었다. 친구와 이야기한 장소도 오늘과 똑같은 곳이었던게 떠올랐다. 그때도 토쏨 카페였잖아!! 지잉--커피 벨이 울리자 친구는 가영을 재촉했다. 가영은 팔을 걷으며 하회탈 웃음을 지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얼른 뭐라도 먹어야 직성에 풀릴 것 같았다. "야야 음료 나왔다 가지고 와!" 가영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친구에게 한턱 내며 온갖 생색을 냈다. 느끼하기 그지없는 치즈케이크 한 조각과 허니브레드에 카라멜 시럽이 한가득 뿌려진게 만족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쓴맛을 쏟아 부은 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빠질 수 없지. "아오 계단 완전 높네."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서 가영의 종아리는 근육으로 울퉁불퉁해졌다. 평소에 카페 계단 오르기 운동이 취미여서 따로 운동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비켜봐요." 알바생인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가영은 자비 따윈 없는 사람이다. 퍽- 가영은 정체 모를 사람에게 어깨빵을 날렸다. 트레이 위에 있던 아메리카노는 스카이 점프를 했고 어딘가로 정겹게 안착했다. "아!! 아악!!!!" 젖어버렸다. 흰색 가운이. 자세히 말하면 중요 부위가 젖어버렸네. "죄..죄송합..어어??" 가영은 얼굴이 빨개졌다. 남자는 소매치기 범인을 잡는 속도로 재빠르게 밖으로 뛰었다. "그래.. 그 사람이었어! 중요한 그 곳의 남자!" "할거 다 떨어졌네. 집에 가자 김가영..."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다 보면 현타가 오는 시점이 있다. 나에겐 오후 4시가 바로 그 시점이다. 가영은 집으로 돌아와 폭신한 이불 속으로 몸을 쏙 담군다. "남들처럼 사는게 왜 이렇게 힘드냐..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 가영은 우울한 마음에 대학시절 교수님이 적어주신 메모지를 들여다 봤다. 궁서체로 쓰여진 문장은 메아리처럼 방안에 울렸다. "가영 학생! 지금처럼 뭐든지 열심히 한다면 앞으로도 잘 헤쳐 나갈거라 믿는다!" 교수님, 정말 슬픈건 뭔지 아세요?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건 아니더라구요.. 세상 살이가 어려워요 아직 저에게는 버거워요. 가영은 베란다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고 난간에 올라섰다. 끝내고 싶다. 아픔, 모든 슬픔을. "야 뭐하냐? 벌레 들어온다. 창문 빨리 닫아라." 엄마가 돌아왔다. 가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거실로 발을 내딛는다. "아오 .." "이불 마르면 먼지나 털어라." 먼지만도 못한 김가영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가영은 꽃무늬 이불을 탈탈 털었다. 가영은 이불이 왜이렇게 무겁냐며 투덜댔다. 어라.. 손에 힘이..풀린다. 이불은 그녀의 손을 떠났다. 아파트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아름답구나 라고 생각했다. 폭. "아악!!" 뭐지?3층에 사는 가영은 냉큼 달려가 이불을 주섬주섬 챙기려고 쪼그렸다. 이불을 비집고 꼬물꼬물하며 사람이 튀어나왔다.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 버렸다. "뭐야??" "다..당신은?" 도진혁에게 악연이 덮칠 줄이야..산 넘어 산이로구만. 진혁은 괜히 더 성질을 냈다. "뭡니까? 손아귀에 힘 좀 주시죠?" "네? 그쪽이 지나갈 줄 모르는게 당연하죠.." 진혁은 깊은 깨달음에 도달했다. 방구 뀐 놈이 성낸다더니, 옛말 하나 틀린 것 없군. 갑자기 조상님들의 지혜와 현명함에 감탄을 자아냈다. "그 때 중요 부위는 안녕하신지요?" 진혁은 중요 부위를 애지중지하며 감싸 안는다. 새색시가 홍조를 띈 것처럼 진혁의 볼도 홍당무 같이 되어 버렸다. "쇄골 미남 처음 봅니까??" 아, 중요 부위는 거기가 아닌.. 바로! 쇄골이었던 것이다. 가영과 진혁은 꽃무늬 이불을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 말싸움을 했다. "아메리카노 사주떼용." 가영은 어색함을 깨는 것은 아무말 대잔치라고 생각했다. 진혁은 생각 외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캔커피도 괜찮습니까?" 저 남자 의외로 그린라이트인데?안돼, 아빠가 남자는 늑대랬어. 가영이는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진혁을 새초롬하게 쳐다봤다. 중요한건 가영은 지금 캔커피가 땡긴다. 가영은 총총총 진혁을 따라갔다. "야!!! 김가영 저 가시나! 어휴.. !!!" 가영의 엄마는 먼지 쌓인 지저분한 꽃무늬 이불을 동동 싸매고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가영의 침대에 이불을 정돈하고 나가려는 찰나, 책상 위에 무언가에 발길을 멈췄다. 가영이가 초등학생 때 쓴 일기장이었다. 저의 꿈은 한의사입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싶어요. '가영아..힘들지... 엄마가 미안해.. 네 아픔 다 헤아려주지 못해서..' 딸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우리 딸 가영아 힘내. 아픈 시기도 언젠가는 지나갈꺼야. * "캔커피 어떤거 좋아합니까?" "제가 또 입맛은 까탈스러워서요." 진혁은 새삼 깨닫는다. 여자들의 마음은 갈대라지만, 미친 여자의 입맛은 갈팡질팡이라는 것을 말이다. '미친 사람의 입맛이라..' "이거 어떻습니까?" 진혁은 손을 스무스하게 까딱인다. 진혁은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선택을 믿고 있는 눈치였다. "어디 봅시다." 레쓰봉. "다른거 고를래요." 가영은 도도한 숙녀의 표정으로 팔을 길게 뻗었다. 진혁의 취향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나갈게요오!!" 퍽-- 알바생이 삼각 김밥이 가득 담긴 박스를 나르다 가영의 등짝을 건드렸다. 진혁의 품에 쏘옥 들어와 버렸다. "어..어??.."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것 같다. 얼마만에 남자의 품인가. 가영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호르몬을 깊이 느끼고 있다. "안 일어나고 뭐합니까?" "흠흠..!!" 진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옷을 털었다. 한의사 가운이 몇 벌 없다고 말하기엔 체면이 살지 않았다. "뭐가요? 그럴 수도 있지. 참나, 깔끔 떨기는." 가영은 진열대를 쳐다보면서 고민했다. 가영은 캔커피가 왠지 구미가 안 땡겼다. 달콤한 음료수가 갈증해소엔 최고지. "모궁모궁 먹을래요." "그게 뭡니까? 이상한 발음 자제해 주시죠." 가영은 떡 하니 음료를 그의 눈 앞에 들이댄다. 모궁모궁은 알갱이가 잔뜩 들어가 있는 과일 음료다. 여자들에게는 인기연예인 버금가는 음료라고 할 수 있다. "인싸 음료를 모르다니?" 진혁과 가영은 편의점 밖으로 나와 벤치에 마주 앉았다. 살짝 어색한 공기가 감돌아서 가영은 식상한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가영은 묻고나니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진혁은 뭔가 망설이는 듯했다.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가진 사람 같았다. "내가 뭐하는지..그런게 중요합니까? 직업이라는 잣대로 사람 판단하는거 별로인 것 같습니다." "치. 배부른 소리!! 난 부럽기만 한데." 가영은 뾰로통하며 입이 톡 튀어나왔다. 진혁은 피식 웃는다. "그럼 아저씨는 사람 볼 때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음..." 그는 한참을 고민하는지 들고 있던 음료의 겉면을 만지작 거렸다. 음료는 차가웠지만, 가영의 질문은 무언가 모르게 따뜻했다. "그 사람 자체요. 그 사람만의 향기랄까.." 가영은 어려워서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다. 진혁은 난이도가 최상인 수학 문제를 풀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서 가영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네. 어휴 인생 참 어렵게 산다!" "어이쿠 선생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진혁은 고개를 돌렸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실루엣에 진혁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 김봉남 아주머니?" 다름 아닌 병원 청소부 아줌마였다.아주머니는 비닐 봉지를 잔뜩 들고 있었는데, 근처 시장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여기서 뭐하슈? 아이고 청춘 사업하는구만? 시장 갔다오는 길에 선생님의 호리호리~ 한 모습에 인사했구먼유! 그럼 불타는밤 보내슈~~" 김봉남 아주머니는 번개처럼 왔다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간다. 가영은 뭔가 의아했다. "선생님..?" "그런거 안 중요하다 했습니다." "아.. 오키." 가영은 체념한듯 살짝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날렸다. 밤공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워서 가영은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저는 이쪽 방향입니다. 잘가요!" 진혁은 쿨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가영은 진혁이 쿨한 것인지 쿨한 척을 하는 것인지 속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나중에 생각이 드문드문 날 것 같았다. 진혁이 뒤돌아가려는 찰나, 가영은 진혁을 불러세웠다. 가영은 몇초 동안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저씨!!" "네?" "우리 똑같은 처지 같은데..편의점 친구할래요? 심심할 때 만나요. 그 때는 내가 컵라면 한턱 쏠테니." 진혁은 멀뚱멀뚱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본다. 심심할 때 만나자는건 심심풀이? 근데 뭐, 심심풀이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은 인간관계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어서 꾸준히 연락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에이 뭘 그렇게 봐요? 나 빈말 안함! 그럼 잘가 빠잉." 가영은 뒤돌아서 경보로 팔을 휘저으며 번개처럼 빠른 워킹으로 사라진다. 진혁은 콧등에 땀이 맺힌다. 추운 날씨에 진땀은 무슨 의미일까 싶지만 컵라면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컵라면이.. 어쩔 때는 위로가 되는구나.' 진혁의 입술은 씁쓸하고 오묘하게도 푸른빛을 띠었다. 진혁은 집에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 가영은 눈을 떴다. 기분이 더럽다. 이유? 그딴거 없다. 가영은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포근하구만." 이불은 내 유일한 친구다. 가영은 30년은 묵은 하회탈 웃음을 구수하게 짓는다. "밥 먹어!!!" 그놈의 밥 타령을 불러대는 엄마의 목소리에 폰을 보니 1시다. 늦잠도 오래자면 피곤한 법. 가영은 어깨야, 허리야 하며 몸을 두드렸다. "늦잠 잤네. 왠지 머리가 띵하더라." 가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잣말은 너무나 익숙하다. 안하면 좀이 쑤실것만 같다. 가영은 식탁에 놓인 반찬의 종류를 눈으로 훑었다. 그나마 먹을만한게 하나다, 소세지. "아오 냄새." 엄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영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려 애썼다. 서글픈 유레카의 끝자락은 가영의 발이었다. "김가영 발 씻고 잤냐???" 가영은 발바닥을 번쩍 들어 코에 갖다댄다. 리얼이네, 사람의 발냄새가 이정도로 지독할 수가 있다니 경이롭다. 킁킁. "아오!!" "그럴 줄 알았다. 게을러 가지고. 밥 먹고 산책이나 갔다와라." 엄마는 유유자적하게 떠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탁구 가방을 매고 형광 주황색 반바지를 껴입고서. 엄마의 노후 라이프는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산책이라.. 생전 안하던 산책에 흥미가 갔다. 마치 가끔씩 다큐멘터리가 보고 싶어지는 듯이. 그래 할 것도 없는데 나가보자. 가영은 책상이랍시고 놓여있지만 only 화장대로 쓰고 있는 나의 보물 같은 공간에 살포시 엉덩이를 내렸다. "산책하다가 훈남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안다 나도. 그럴 확률은 로또 맞을 확률보다 현저히 낮다는 것을. 하지만 백수에게는 개떡같은 초긍정 마인드가 필요하다. 먼저, 스킨케어로 더러운 피부를 정돈한다. 두번째, 선크림을 촉촉하게 두드려 펴바른다. 그리고 버섯모양 퍼프에 파데를 짜서 미친듯이 두들긴다. "와 화장 잘 먹었네. 아오 평소에 이런 얼굴이면 좋으련만..." 가영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 회상을 했다. 그저 해맑았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와 김가영 이번에도 과탑이라며? 쩐다 어떻게 공부해?" "가영아 너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잘어울리고 진짜 부러움!" 그 때는 내가 최고인 줄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다 될 줄 알았던 바보같은 시절이었지. 가영은 참다 못해 괴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그래!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 하고 산책을 떠날 것이야. 아이라인을 촘촘히 가느다랗게 그린 후, 코랄빛 블러셔로 화사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립색깔은 뭐하지? 그래 이거야!! 레드립을 풀로 발라서 외모가 한층 업그레이드 됐어. 가영은 트레이닝복을 대충 껴입고 나왔다. 아빠는 또 소파에 누워 티비 시청 중이네. 아빠는 옆으로 누웠다가 가영을 흘낏 봤다. "입에 케찹 발랐냐?" "아니거든? 뭔 소리래. 나 나갔다올게." 아빠는 티비로 고개를 자연스레 고정시켰다. 분명히 립색깔에 대한 핀잔이 아니라, 놀러 다닌다는 것에 대한 핀잔이다. 사회적 지위와 가족들의 태도는 비례하는걸까. 더러운 세상. 가영은 입을 쭉 내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고층에서 멈추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띵- 가영은 타는 순간 화들짝 놀라버렸다. 와우, 우리 아파트라인에 사는 존잘남이잖아? 엄친아. 이름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 꽤 알려진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김면상. 죽기 전에 훈남이랑 말이나 해보자. "어디 가세요?" 가영은 싱글벙글 웃었다. 훈남은 그저 폰을 들여다보며 눈길도 주지 않는다. 돌아오는 매서운 한마디. "그걸 꼭 말해야 해요?" 미친놈. 싸가지가 더럽게 없는 놈이었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 세가지 부류가 있다. First. 싸가지 없는 인간. Second. 남 무시하는 인간. Third. 음..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건. 가영은 너무나도 빡친다. 가영은 냄비뚜껑이 치솟아 오르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1층입니다. 카랑카랑한 안내원의 말이 들리자마자 가영은 이때다하며 외쳤다. 띵- "아악!!! 뭐야???" 가영은 하고야 말았다. 아니, 해냈다. 완벽한 짜릿함은 생전 처음이다. 저 새끼 뒷통수에 침 뱉으니까 속이 시원하네. 다다다--- 가영은 빛의 속도로 줄행랑쳤다. 훈남의 욕설이 흥겨운 노랫가사로 들렸다. "미친!!!!" 가영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웃은 친척보다 가깝다? 빌어먹을 말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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