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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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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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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 바람이 분다. 또 저녁이다. 날은 여전히 차고, 거세지는 저녁 바람에 컴컴한 골목 전선들이 심란하게 울부짖는다. 바람이 분다. 여자의 갓 삶은 국수발 같은 머리카락이 면발처럼 바람에 찰랑거린다. 머리카락 끝에서는 발삼향이 실려 온다. 다시 바람이 분다. 흰색 점퍼 아래, 여자의 땡땡이 시폰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간다. 또각또각. 두꺼운 어둠을 가로지르는 우유 빛 종아리가 두근두근, 가슴을 두방망이질 친다. 어둠 속에 웅크린 흰색 재규어 세단에서 나온 여자가 칙칙한 사 층 건물 입구로 다가간다. 짙은 어스름을 뒤집어쓴 건물이 하얀 여자를 목구멍으로 내려 삼킨다. 지하로 내려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얀 여자를 삼켜버린 건물의 아가리를 재차 응시해본다. ‘보아 노래주점.’ 저 상호였던가? 싸구려 코노에서 오백 원짜리 하나 넣고 노래를 두 세 곡 부를만한 시간을 어두운 거리에서 애써 뭉갠 본다. 블랙 보아 같은 건물의 아가리로 나도 발걸음을 옮긴다. 여러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뒤섞여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다른 목소리는 없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문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대기실 같은 방이 있다. 그 방은 반쯤 열려 있다, 안에 사람이 살짝 비친다. 검정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하나가 화장을 고치고 있다. 아까 흰색 재규어에서 내린 여자는 시폰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모르겠다. 그 여자는 다른 방에서 이미 손님을 받고 있을까? “어서 오세요.” 카운터를 보고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넨다. 어??! 직원들도 모두 여자라고 했는데? 하기야 뭐, 카운터는 남자도 볼 수 있으니까. “혼자 오셨나요?” 혼자 오는 손님도 많은가 보다. 다행이다. 혼자 와서 괜히 쪽 팔렸는데. “예.” “노래 부르실 건가요?” “아 네.” “곧 봐드릴게요.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가 카운터에서 나와 복도 끝, 오른쪽 방으로 향한다. 복도랄 것도 없이 짧지만. 여기 생각보다 널널하다. 손님도 한 팀밖에 없는 듯하다. 내부에서는 묵고 묵은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이 노래방이 소리 소문 없이 알려진, ‘여성전용’이라는 그 노래방 맞나? “여기 잠깐 앉아 계시면 실장님이 상담해 드릴 거예요.” 직원남이 방문만 열어주고 되돌아간다. 여느 가족 단위 동네 노래방보다 조금 나을 뿐이잖아. 실내 인테리어가 좀 여성 취향이긴 하지만. 대기 상태인 노래방 화면을 마주보고 앉는다. 테이블에 귀퉁이가 닳고 닳은 두꺼운 노래 목록이 있다. 나처럼 시대에 뒤떨어지고 너덜너덜하다. 요즘은 모두 피자 같은 리모컨으로 노래를 고르는데. 아직도 이런 게 있다니. 나는 괜히 노래 목록을 뒤적거리며 누군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아무 생각 없이 노래 목록을 앞뒤로 세 번은 뒤적인 것 같다. 대책 없이 기다리는 이런 짧은 시간이란. 무지 짧은 시간일 텐데도 무한하게 길게만 느껴진다. 여자들의 노랫소리는 한 방에서만 나는 것 같다. 여자들의 고음이 한 번에 긁어내리는 쇠 기타 줄들처럼, 쇠 된 소리를 내며 차례로 어긋난다. 저 방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일까. 나와 같은 목적으로 온 것일까. 미지의 설렘에, 가슴이 다시 두방망이질 친다. 문이 열린다. 직원이 들어온다. 실장님이란 분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까 그 남자다. “실장님이 상담 중이시네요. 노래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쩌면 실장님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손님은 한 팀밖에 없기 때문이다. “캐스트 되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초짜처럼 보이면 안 된다. “네. 어떤 타입 원하시는데요?” “뭐, 이십 대 초반이면 괜찮겠네요.” “이십 대 초반 아가씨는 좀 쉽지 않은데...” “여기 대부분이 그렇지 않나요?” 소문과 좀 다르네. 이상하다. “일단 제가 나가서 한번 전화해 보고 다시 말씀 드릴게요.” “아, 네.” 나는 다시 방 안에 혼자 남겨진다. 똑. 똑. 한참만에 문이 열린다. 아까 그 직원이다. “스물 둘, 한 분이 있다는데 괜찮겠어요? 이 시간에 아가씨 분들 오기 힘들어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한 타임 하실 거죠?” “네.” “일단 오면 보시고 결정하세요.” 남자는 다시 나간다. 나는 기다린다. 이런 시간은 하필 더 길게만 느껴진다. 누가 들어올까. 눈이 클까, 쌍꺼풀이 없지만 길고 매력적일까. 키는 클까. 가슴은 클까. 작을까. 다리는 학 다리처럼 잘 빠졌을까. 얼굴빛이 태양에 좀 그을린 듯하다면 좋겠다. 난 너무 하얗다. 나는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편다. 똑똑.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왔나? “들어오세요.” 어어. 아까 그 카운터 직원남이 들어온다. “아가씨 왔고요. 옷 갈아입고 있습니다. 곧 올 거예요.” 다시 나간다. 나는 다시 아무 생각 없이 노래 목록을 넘긴다. 똑똑. “아가씨 왔습니다.” 아까 직원이 들어오고, 한 여자가 들어와 다소곳이 맞은 편 벽을 보고 서 있다. 나를 정면으로 보지는 않는다. 지퍼가 달린 검정색 섹시 셔츠에, 역시 지퍼가 달린 검정색 섹시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어느 클럽에 가도 빠지지 않을 첨단 패션이다. 상의 셔츠는 V자형으로 지퍼가 열려 있다. 왼쪽은 길고 오른쪽은 짧다. 왼쪽 어깨 끝에서부터 오른쪽 가슴 한가운데까지 브라가 보일락 말락 가슴선이 트여 있다. 살이 훤히 비친다. 오른쪽 어깨선에서 왼쪽으로 찢어진 지퍼는 왼쪽 브라 윗선까지 트여 있다. 쌍커풀이 진 커다란 눈에, 퍼진 라면 발처럼 우아하게 컬 진 머리. 코는 날 서고 오똑하다. 마른 나뭇잎과 와인 빛의 중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그리 도톰하지 않지만 고혹적이다. 키는 딱 중간, 가슴은 크다고 할 수 없다. 힙의 볼륨은 과하지 않고 죽여주는 비율이다. 그리고 스커트 밑으로 뻗은 우윳빛 살결과 하이힐.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이 퀴퀴한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기대 이상이라니. “초이스하실 건가요? 이 시간엔 이 정도 어린 분들 오기가 힘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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