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빚을 갚다

1946
"유미소?" 그 꼬마가 이렇게 크다니. "미소야, 오랜만이야." 하준이 웃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하준을 보자 미소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빠가 무슨 낯으로 우리 집에 와?" 아주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내가 뭘 잘못 말했어? 그때 우리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 오빠가 안 도와줬잖아! 문도 안 열어줬잖아!" "다 오빠 때문이야! 오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된 거라고!" 미소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다. "입 다물어!" 어머니가 화내는 걸 보고 미소는 입을 삐죽거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정웅이 신문을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왜. 미소가 한 말 다 사실이잖아! 우리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사람이 어떻게 이래?!" "맞아!" 아빠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미소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힘들 때는 만나주지도 않더니 도대체 이제와서 왜 찾아온 거야?" "아주머니. 이게 다 무슨 말이에요?" 아주머니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 지난 일이야. 지금은 다 무사하잖아.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자." 하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주머니를 꿋꿋이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마. 엄마 수술비 때문에 오빨 찾아갔는데 오빠가 우릴 외면했잖아. 우린 결국 사채까지 빌렸다고." "그만해!" "이모." 하준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죄책감이 가득했다. "괜찮아!" 아주머니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별일 아니야." 아주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난 괜찮으니까 힘든 일 있으면 나 찾아와. 알았지?" 그러자 미소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어이가 없네. 우리가 힘들 땐 안 도와줬으면서." 하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제 다 컸어요.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미소야, 밥 먹자. 하준 오빠가 가져온 건 안쪽에 넣어 놔." 우유과 과일을 보며 미소는 입을 삐죽거렸다. "몇 년이 지났는데 오빠는 그대로네. 옷이며 신발이며. 돈 빌리려고 안 온 게 다행이지." "제가 도와드릴게요." 앞서가는 하준을 바라보며 미소는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하준이 어린 시절과 달라졌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 그녀를 데리고 뛰놀던 오빠는 사라졌다. 지금 하준의 모습에는 침착함만 있었다. 옷차림을 좀 봐. 사무직도 아닌 거 같아. 미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는 하준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하준의 궁상맞은 모습을 보고는 하준에게 시집가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소는 곧 대학을 졸업할 것이고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도 나쁘지 않으니 앞으로의 생활은 틀림없이 걱정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자신과 하준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기도 전에 문밖에서 탁탁하는 소리가 났다. "야!" 말하는 소리를 듣고 미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빠! 엄마!" 미소는 황급히 뛰어나갔고 하준도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말끔했던 거실이 지금은 더없이 어수선해졌다. 식탁이 뒤집혔고 반찬이 가득 담긴 접시도 산산조각이 났다. 테이블과 의자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남편을 부축하며 말했다. "이거, 주택 무단 침입이에요." 입구에는 금목걸이와 팔찌를 한 뚱뚱한 남자 한 명과 그의 부하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서 있었다. "무단 침입? 돈을 갚아야 침입을 안 하지!" 미소가 앞으로 달려가 말했다. "돈은 다 갚았잖아요!"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뚱뚱한 남자가 그의 부하에게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흉악해졌다. "새로 빌린 돈은 안 갚았잖아!" 이 말을 들은 정웅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남자가 시큰둥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어이 유 씨, 당신이 돈 빌린 걸 아내와 딸은 모르나 보지?"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머니는 정웅의 팔을 힘껏 흔들며 말했다. "왜 또 돈을 빌린 거야? 그 돈은 도대체 뭐 하는 데 썼어?" "돈 주고 사람 좀 섰어.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건. 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남자는 차용증을 한 장 내밀었다. "조용히 하고 돈이나 갚아. 원금은 5천만 원이고, 이자 합쳐서 1억이야. 알겠어?" 1억? "그땐 1년에 1억이라고 하셨잖아요!" 남자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발을 걷어찼다. "말이 많네. 1억 내놔." 아주머니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에게 1억은 머나먼 얘기였다. 정웅이 비틀비틀 일어나 말했다. "조,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관공서에서 오래 일해서 곧 도지사 될 거예요. 시간을 주시면…." 퍽! 남자가 정웅의 정강이를 세게 찼다. "도지사고 뭐고 관심 없고, 돈이나 갚아. 우리 위에 누가 있는지 알기나 해?"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배후에 큰 인물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소가 다급하게 하준의 팔을 흔들었다. "오빠가 어떻게 좀 해봐. 군대 갔다 왔잖아." "쟤가 뭘 할 수 있겠어?" 정웅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만약 이 돈이 아주머니가 빛진 거면 그는 두말없이 갚아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웅이 술을 마시기 위해 빌린 돈이었고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남자는 아름다운 미소를 힐끗 보더니 씨익 웃었다. "시간 줄게. 그 대신 많이는 못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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