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213
덜컹이는 창밖의 풍경은 쓸쓸했다. 아직 녹지 않은 저 너머 민둥산의 흰 눈과 이제 막 깨어나는 이른 봄의 푸른 새싹은 아이러니 하다. 내 손에 쥐어진 엄마의 낡은 일기장처럼. 목적지로 향하는 기차 안의 풍경도 제각각이다. - 한 산골의 조그만 마을, 바다와 근접한 외딴 집 한 채. 이곳에서 엄마는 당신의 평생의 소원을 이루다 떠나신 걸까. 아직은 용서 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 집은 의외로 아늑했다. 벽난로 속에 타고 남은 장작들의 흔적은 눈물이 날 만큼 따스해 보였다. ‘삐걱.’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웬 노인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누구세요?” “처녀는 뉘인가?” “네, 저 여기 살던 분의 딸인데요.” “아, 정씨 딸내미구먼! 엄마 산소 찾아왔어?” “네. 저, 제가 여기 한 동안 사용하고 싶은데, 괜찮겠죠?” “그럼, 되고말고! 주인장 딸내미가 쓴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하나. 허허, 내가 엄마 산소 안내할까?” “감사합니다.” 노인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났다. 구부정한 이 노인도 누군가의 남편이었겠지... - 작은 산을 타고 한참을 들어가니 엄마의 무덤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또 다른 무덤. 그 곳엔 분명 엄마가 사랑했던 그 여자가 묻혀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별안간 화가 났다. “자, 나는 이만 내려가오. 저 아래 보이는 집이 내 사는 집인데, 자주 놀러 와서 이 늙은이 말벗이나 되어주시구려. 허허.” “네, 살펴가세요.” 엄마의 무덤에 준비한 꽃을 놓아두었다. 무성하게 난 잡초는 누군가 꾸준히 뽑아주며 관리한 듯하다. 아까 그 노인일까? 소주를 뿌리고 절을 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엄마의 소식을 몇 년 만에 듣게 된 것도 서러운데 이미 돌아가신 후라니..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엄마. 왜 그랬어?” 엄마의 무덤을 향해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던져놓고는 야속함에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낸다. “아빠 돌아가신 거 알아요? 나 이제 외톨이야. 아빠 끝까지 엄마 찾다 돌아가신 거, 엄마 알아요? 흑흑, 엄마 나쁜 사람이야. 흑.” 그간의 울분을 토해내듯 원망 섞인 눈물을 한참동안 쏟아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날이 점점 어두워져 왔기에 아쉬움과 설움을 뒤로한 채, 산을 타고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 밤이 되자 이 작은 집은 더욱 아늑했다. 침대 옆 커다란 창문은 맞은편 바다를 향해 있고, 얼마간의 세간도 들어있어 무엇을 해 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 했다. 엄마의 산소를 다녀온 뒤,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비워진 것만 같았지만 이곳에서 머물 며칠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 내팽개쳐둔 짐 꾸러미들을 정리한 뒤 천천히 방을 치워나갔다.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인지 먼지가 가득했지만, 집안 곳곳 손길이 닿을 때 마다 사람 사는 곳처럼 변해가는 이 집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청소를 마친 뒤, 베란다에 몸을 기댄 채 창문너머로 바다를 바라본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파도소리에 한참을 귀 기울이다 생각에 잠긴다. 낮은 산을 등지고, 베란다의 통 유리 너머로 바다가 펼쳐진 이 집의 배경만으로도 취할 것 같다. 더욱이 총총히 하늘을 수놓은 별이라니. 서울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경치에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늦추고 만다.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 까지 한 바다와 산의 맞바람에 일찌감치 샤워를 마치고 벽난로에 불을 붙인다. 아직은 이른 봄이거니와 산과 바다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이곳은 밤이 되자 점점 더 추워지는 듯 했다. 난로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난로에 몸을 녹이자,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듯하다. 그 느낌에 취해 나는 무의식중에 따뜻한 머그잔에 얼굴을 데어본다. 엄마와 그녀가 살다 간 이 집. 실은 출발 전부터 한 가득 경계심을 품고 이곳을 찾았다. 더욱이 이번 여행은 주변에서 권해주는 사람들의 등에 떠밀려서 온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아직도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는 그의 흔적을 찾아 떠나온 이번 여행이 편치만은 않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 속의 엄마를 떠올리며,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 네가 이것들을 모두 읽고 난 뒤에 엄마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선이 아줌마와 아빠의 말씀을 떠올리며 한참을 고민 끝에 가방에서 엄마의 낡은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겉표지를 만지작대며 선뜻 읽기를 주저하며 망설이고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내게 전해 준 이 일기장은 아직까지 열어보지 않았다. 엄마를 이해 할 수 있을 거라며 아빠가 전해주신 마지막 유품. 하지만 어쩐지 힘겹게 돌아가신 아빠와 이렇게 남겨진 내 자신이 가여워 읽고 싶지 않았다. 아빤 엄마를 이해해 달라고 했지만, 어렸던 난 엄마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주변에서 엄마를 감싸면 감쌀수록 나는 더 큰 증오심을 키우며 반발할 뿐이었다. 내가 19살이 되던 해. 엄마는 아빠와 나를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아빤 엄마를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를 자유롭게 보내 줄 때가 왔다고 그렇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그렇게 엄마가 우리들을 떠나고 얼마 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아빠와 지선 아줌마의 대화를 듣게 되었고, 엄마의 가출의 이유가 다른 누군가와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엄마의 친구 수경이 아줌마라는 사실도.. 너무 큰 충격이었다. 엄마가 레즈비언이라니! 나와 아빠를 두고 떠난 것도 모자라 여자와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버리고 떠난 거라니! 아빠는 모두 알고 계신 듯 했지만 내게는 아무런 말씀도 해주지 않으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애매한 말씀만 남겨 둔 채 이 일기장을 내게 남기신 거다. 아직은 엄마를 용서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기에 자꾸만 망설여지지만, 유언처럼 남긴 아빠의 마지막 당부에 용기를 내어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정희윤..  일기장 첫 면에 엄마의 이름이 쓰여 있다. 엄마의 흔적을 느끼는 건 실로 7년 만이다. 참으려 애써봤지만 그리웠고, 그 만큼 미워했던 애증의 이름 앞에 허락한적 없는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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