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8. 파리사티스
9. 루키예
10. 발라스
11. 셀림
8. 파리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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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 사람들은 본디 말이 많은 법이다. 누구에게도 틈을 보여선 아니 된다. 실수따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궁정은 사시사철 전쟁터다. 승자는 출세하고 패자는 쫓겨난다. 비단 피륙을 두르고, 보석으로 몸을 휘감은 사람들은 우아함이라는 갑옷을 두르며 싸운다. 하그리아 왕국의 1왕자비인 파라는 궁정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개인으로서 자아는 완전히 무너져있다.
파라는 하그리아 왕국 내무대신인 아버지와 법무대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파르잔, 다스탄, 발라스, 자한기르, 파리사티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중앙의 기반을 둔 명문가였다. 1왕자의 약혼녀였던 파라는, 1년 전 성년이 된 1왕자 아르샨 전하와 혼인했다. 고귀한 신분의 1왕자와 파라는 정말로 잘 어울렸다.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파라는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왕실의 첫 며느리로서 파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1년 전, 결혼식을 마친 뒤 시어머니인 여왕폐하를 대면하게 되었다. 파라는 샤흐라자드 폐하와 대화를 나눠보고는 시어머니는 아름다운 미모와 달리 제정신이 아닌 상태란 것을 직감했다. 폐하께선 파리사티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5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폭정왕 라지한에게 살해당하셨다. 내 어머니는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돌아가셨고, 내 아버지는 목이 잘려 성벽에 걸리셨지. 라지한은 그 광경을 오빠와 언니와 내가 보게 했다. 그자는 우리의 큰아버지였지만 남동생 부부와 조카들을 잔혹하게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찬 비열하고 잔인한 놈이란다.
다음날 7살인 오빠는 사자우리에 넣어져 잔인하게 찢겨 죽었고, 또 다음날엔 6살인 언니가 병사들에게 겁간당해 죽었다. 이제 내 차례였지, 나는 어떤 방법으로 죽게 될까 매우 두려웠단다. 내 시녀인 할리메가 몰래 나를 데리고 왕궁밖으로 탈출해서 나는 목숨을 구했지. 이 세상 어느 나라를 가던 왕실의 가족은 평범한 가족이 아니다.
권력 앞에선 큰아버지와 조카는 적이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너도 마찬가지란다. 천한 노예부터 고귀한 공주까지 모두 너의 경쟁자야. 이 궁전에는 왕자를 유혹해서 신분상승을 노리는 소녀들이 많고, 그중엔 널 해치려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피를 나눈 형제라 할지라도 이곳은 모두 적들뿐이니, 오래 살고 싶다면 누구도 믿지 말아라. 파리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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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학자 이사야 박사는 약간 짜증이 났다. 오늘따라 유달리 소란스러워서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사야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다. 평소에 이사야는 한번 집중력을 발휘하면 누가 말을 걸어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몰두한다. 각종 토판과 서적이 빽빽하게 쌓여있는 이사야의 연구실은 누가 봐도 학자의 방이었다.
이사야와 가까이서 지낸 그의 조수들은 이사야가 25살이 아니라 80이 넘은 노인 같다고 소곤거렸다.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다. 그는 일어나면 제일 먼저 글을 쓴다. 시를 쓰기도 하고, 경전을 필사하기도 하고, 오래된 토판의 문자를 해석한 걸 복기하기도 한다. 안경을 매만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집중해서 글을 쓴다. 이사야는 철필에 잉크를 찍어서 글을 적는 걸 좋아한다.
잉크의 향기가 느껴진다. 양피지 종이 위를 사각거리는 이 느낌이 정말 좋다. 속이 빈 갈대펜도 좋다. 그날그날에 생각과 감각을 문자로 옮겨 놓는다. 그러면 곧 시 한 수가 완성된다. 마음으로 읊어보고 입을 움직여 읊어봐도 매우 듣기 좋은 구절들이다. 시를 짓고 나면 아침 해가 밝아온다. 왕도의 일등지에 지어진 저택에 거주하기 때문에 이사야의 아침은 하인들이 주방에서 만들어 방까지 가져온다.
점심은 왕궁에서 푸짐하게 먹기 때문에 아침은 가볍게 먹는다. 석류, 무화과, 올리브, 대추야자 잼과 얇은 빵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우유와 꿀을 넣은 따뜻한 차를 마신다. 아침을 먹은 뒤엔 하인이 가져온 세숫물로 얼굴을 씻는다. 장미수를 넣은 따뜻한 물은 기분이 좋다. 잠옷을 벗고 궁정학자의 예복을 입는다. 흐트러짐 없이 옷을 갖춰 입은 뒤엔 가마를 타고 왕궁에 입성한다.
화려하고 장엄한 상아빛 궁전에 입구에 다다르면 가마를 들쳐멘 하인들은 궁정학자들을 위해 세워진 별관으로 들어간다. 이사야에게 배정된 연구실에 들어가면 조수들의 인사를 받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태양의 고도가 중앙에 다다르면 예배당의 종이 울린다. 일신교 신자들은 정오기도를 준비한다. 신앙심 깊은 이사야는 바닥에 엎드려 '신은 가장 위대하다'면서 기도문을 외우며 예배를 드린다.
하루에 한 번 정오가 시작될 때부터 정오가 지날 때까지 드리는 이 시간 동안은 일신교를 믿는 나라들은 모두가 일상을 내려놓는다. 정오가 지나면 다시 종이 울린다. 일신교 신자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세속에 삶으로 돌아간다. 점심은 아주 늦게, 아주 풍성하게 먹는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 사람들은 약간의 여유시간을 가진다. 이사야는 이 시간에 독서를 한다. 일신교 신자 답지 않게 마술**에 관한 책을 읽는다.
하지만 오늘은 독서를 즐길 여유시간이 없었다. 1왕자비 파리사티스와 2왕자비 누르자한이 함께 이사야 박사의 연구실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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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는 왕비가 되고 싶었다. 시메야 왕국이나 살레굽 제국과 달리 하그리아는 여성의 사회활동에 매우 관대하다. 파라의 어머니인 법무대신 같은 고위관직에 오른 여성들도 있다. 하그리아 왕조 13명의 왕들 중 3명은 여왕이다. 하그리아의 국조 '건국왕 루스탐'의 치세동안 그의 아내 파라카 왕비가 내정을 다스렸고, 5대왕인 '백치왕 바스파르'의 치세는 그의 아내 하디제 왕비의 치세였다.
왕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여인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왕과 결혼해서 왕비가 되는 것이다. 파라의 꿈은 왕비였다. 비단신을 신고, 황금으로 수놓은 예복을 입고, 화려한 보석을 몸에 두른다. 공주로 태어나지 않은 여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왕비이다. 왕비의 역할은 높은 위치에서 장기말을 다루는 장기기사와 같다. 국정에 관여하고 인사를 처리한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왕궁에 방문하면 역대 왕과 왕비들의 초상화가 걸린 긴 회랑을 지나가게 된다. 파라는 왕관을 쓴 고귀한 여인들의 초상화 속에 자신의 얼굴을 투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장기를 매우 수월하게 둘 수 있다. 10살 때 장기로 오빠 4명을 연달아 이기고 아버지까지 이기자, 파라의 장기 상대들은 점점 강력해졌다. 궁정의 관료들, 학자들이 파라의 상대가 되었다.
64칸의 장기판에서 기물을 움직이는 손이 빨라진다. 머리도 빨리 움직인다. 파라는 목표를 향해서 아주 거침없이 움직인다. 파라에게 전투란 항상 이기는 것이다. 왕, 재상, 장군, 마술사, 사제, 병사 기물을 움직이듯 궁정의 관료, 학자, 시녀, 군인들을 움직인다. 그들을 기물처럼 움직이면 왕을 공략할 수 있다. 정확히는 내가 원하는 위치로 왕을 옮기게 만들 수 있다.
판을 짜고, 원하는 위치로 몰아가게 만드는 것은 파라에겐 매우 쉬운 일이다. 상대방을 농락하면서 파라는 그저 싱긋 미소 지으면 된다. 파라가 왕비가 되는데 방해되는 기물들은 느긋하게 쳐부수면 된다. 누르자한이나 스피타만 같은 기물은 방해된다. 천천히, 하지만 승리하기 위해선 확실하게 무너뜨려야 한다. 함부로 야욕을 드러내선 아니 된다. 하지만 나의 목표를 상대방에게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샤흐라자드 폐하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극도로 불안정한 사람이다. 전쟁터에 한 가운데 있는 것 마냥 예민하다. 자기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뺨을 후려갈기거나 불같이 화를 낸다. 15살이 된 이스카 왕자가 여왕의 면전에 대고 자신은 왕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여왕폐하께선 크게 분노했다. 자기 아들이 피가 나고 멍이 들 때까지 발길질을 했다. 이스카 왕자는 그래도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타흐마탄 장군이 급히 뛰어들어 말리지 않았다면 이스카 왕자는 정말 목숨마저 위험했을 것이다. 여왕폐하는 군인 출신이라 손속이 매우 거칠고 자비가 없다. 이스카 왕자는 보름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한 달 동안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타흐마탄 장군은 며칠 동안 폐하와 언쟁을 벌였다. 자기 배로 낳은 아들을 어쩜 저렇게 만들 수 있냐면서 감정을 있는 데로 표출했다.
이후 타흐마탄 장군과 여왕폐하의 사이가 멀어졌다. 16살 성인이 되자 이스카 왕자는 성인이 되자 바로 천한 무희와 결혼했다. 여왕폐하는 2왕자 이스카와 결혼한 무희 누르자한을 2왕자비로 '인정'은 해주셨다. 하지만 타흐마탄 장군, 2왕자 이스카는 이전보다 여왕폐하와 관계가 서먹해졌다. 파라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남편인 1왕자 아르샨 전하가 부상할 기회였다.
파라는 자신의 셋째 오빠 발라스에게 넌지시 여왕폐하의 이야기를 꺼냈다. 파라의 셋째 오빠 발라스는 아주 탐미적인 성향이었다. 첫째 파르잔, 둘째 다스탄, 넷째 자한기르 오빠와 달리 발라스 오빠는 자신보다 나이많은 유부녀를 좋아했다. 귀부인들과 밀애를 즐기는 셋째 오빠 발라스가 아주 제격이었다. 아름다운 미모의 기혼여성은 발라스의 구미를 당겼다. 발라스 오빠는 여왕폐하의 승은을 입게 되었다.
이제 완전히 파라는 목표에 도달했다. 오빠가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되면 더 이상 방해될 기물은 없었다. 여왕폐하를 움직일 수 있으니 이제 이긴 판이나 다름없다.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갑자기 복병이 나타났다. 올해 초에 등장한 궁정학자 이사야 박사가 여왕폐하의 관심을 채간 것이다. 발라스 오빠에게 연적이 나타났다며 파라가 닦달해봤자 소용없었다. 발라스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분방했다.
발라스 오빠는 무언가에 종속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발라스 오빠에게 사랑은 갑자기 불타오르기도 하고, 갑자기 꺼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쪽이 마음이 식으면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여왕폐하와 관계가 소원해지면 다른 귀부인과 불꽃 같은 연애를 하면 된다는 태평한 말을 내뱉길래 오빠의 멱살을 잡았다. 당장 무슨 짓을 써서라도 폐하의 총애를 되찾으라고 일갈했다.
아무튼 그 이사야 박사라는 인간을 확인해 봤다. 예니사라이 태수의 다섯째 아들이고, 이른 나이에 마누셰흐르 대학교를 졸업해서 궁정학자가 되었다. 얼굴은 제법 반반하다. 말투는 궁정학자답게 교양있고 정중했다. 하지만 발라스 오빠보다 3살이나 어린 주제에 오빠를 밀어내고 폐하의 남총자리를 꿰찬 인물이다. 어떤 사람인지 더 알아봐야 겠다. 싱긋 미소 지으며 귀한 상아필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살살 시동을 걸었다. 장기를 한번 둘 수 없겠냐고, 내일 정오기도 드리고 잠깐 시간 내줄 수 있냐고 말이다. 이사야는 약간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승낙했다. 곧 다른 왕궁관료와 점심식사를 했다. 여우 같은 놈, 학자라는 인간이 권력에 기웃거리다니! 필시 이사야 저놈은 출세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녀석일 것이다. 반드시 발라스 오빠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정오기도가 끝나자마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그런데 이 요망한 놈, 보통내기가 아니다! 파라가 약속을 잡은 시간과 같은 시간에 2왕자비 누르자한을 불러왔다. 이사야! 치밀하고 계산적인 불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