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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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셀림 쇠창살로 겹겹이 쌓인 창밖에서 새들이 지져귀는 소리가 들린다. 햇살이 들어오지 않으니, 해가 뉘엿뉘엿 지는 중이로구나. 힘없이 누워있던 셀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곧 시종이 저녁 식사를 가지러 올 것이다. 이곳 황금새장은 너무 조용해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감옥이라고 셀림은 생각했다. 아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레굽 황실에 비하면 황금새장의 수감자가 훨씬 나을 것이다. 셀림은 쿡 하고 비소를 지었다. 살레굽 황실의 13황자라는 신분과 하그리아 여왕의 첫남편이라는 지위를 빼면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셀림을 모시던 수석시종도 황금새장에 수감되기 싫어서 셀림을 버렸다. "화~려한 궁전에~ 화려한 감옥이네~ 청승맞은 내 인생~ 황자로 태어나면~ 무얼하고~ 국서면 무엇하리~" 남들이 보면 셀림 전하가 드디어 미쳐버리셨다고 할것이다. 하지만 황금새장에 수감되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셀림 전하는 혼잣말을 자주하거나 혼자 노래를 불렀다. 왕족의 예우로 화려한 의복과 신발, 훌륭한 식사와 목욕탕을 그대로 누리고 살았다. 하지만 황금새장은 화려하긴 해도 감옥이다. 시종은 필요한 음식과 물품만 지급하고 바로 도망간다. 셀림과 절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생이란~ 다~ 부질없는 것~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그냥 뱃속에 남겨주시지~ 아아~ 서러워라~ 아들은~ 새장 속에~ 새처럼~ 살고 있소~ 어머니는~ 잘 계십니까~ 아아~ 그리워요~ 어머니~ 하지만 못난 아들은~ 편지 한장 쓰지를 못해요~ 아니~ 쓸수는 있지요~ 종이는 맨들맨들한 상등품 종이고~ 필기구는 상아로 만든 최고급이거든요~ 하지만~ 어머니가 계신 곳까지~ 보낼 전서구는~ 없어요~ 경비병들이~ 편지를~ 전부 뺏어버리거든요~ 아아~ 나는 날수 없는 새라오~ 아아~ 내 신세야~" 황금새장에서 셀림은 항상 혼자였다. 외롭고 쓸쓸했다. 그래서 혼자서 노래를 부르거나 혼자서 춤을 추거나 혼잣말이라도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마 하그리아 공용어까지 까먹을 것이다. 살레굽 어를 까먹어도 살아가는덴 큰 지장이 없겠지만, 여기는 하그리아 왕궁의 황금새장이니까. "아아~ 바깥에 새들이 부럽다~ 훨훨 날아다니니까~ 하지만~ 밖에는 무서운 독수리와 매가 날아다니지~ 이쁜 마누라가 있으면~ 무엇하냐~ 다른놈이랑 붙어먹고~ 애비다른 자식들만~ 낳는데~ 아아~ 결국엔~ 남편도 감옥에~ 집어넣지~ 아아~ 무서운 여자~ 아아~ 독수리보다~ 더 무시무시한 여자야~ 아아~ 운명의 여신님~ 다음생에는~ 왕족 여자랑~ 결혼하지 않을래요~ 아아~ 운명의 여신님~ 다음생에는~ 평민으로 태어나게 해주시오~ 아아~ 황자님이고~ 국서님이고~ 나는~ 이제 싫어요~" 음감이 뛰어난 이스카 왕자가 들었다면, 음정도 박자도 전부 안맞는 노래라고 평했을 것이다. 하지만 셀림은 혼자 계속 노래를 불렀다. 셀림 전하는 살레굽 황제 무스타파 3세의 1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위를 이어받을 황태자를 제외하곤 나머지 황자는 전부 사형당하는 살레굽 황실에서, 서열 낮은 후궁의 아들이, 평범한 황자가, 위로는 나이가 10살 이상 많고 경험많은 형들을 제치고 태자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샤라와 결혼했다. 예쁜 공주와 결혼해서 나중에 국서가 되서 편하게 살고 싶었다. 마침 샤라는 권력에 기반이 되어줄 신분은 높지만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을 남자가 필요했고, 살레굽 제국은 새로운 영웅과 동맹을 맺고 싶어했다. 어느정도 정치적인 결합이었다. 그래도 셀림은 맘에 들었다. 샤라는 미인이었다. 조금 쌀쌀맞을 때도 있지만 세상에 예쁜 여자 싫어할 남자는 없었다. 샤라는 폭정왕 라지한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셀림은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남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왕자들이 태어난 뒤엔 폐위시켜서 황금새장에 쳐넣었다. 샤라는 과감했다. 남편노릇 못하는 남편따위는 내쳐버리는 여자다. "아아~ 못되고~ 고약한 여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리따운 공주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그런 일은~ 이 세상엔~ 없다네~" 셀림은 다시 벌러덩 드러누우며 목청것 노래를 불렀다. 어짜피 하루종일 방구석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일상의 변화란 본래 급작스러운 것이다. 운명의 여신들은 변덕이 심해서 사람의 인생이라는 실타래를 마구잡이로 던지고 굴린다. 오늘 셀림의 식사를 가져온 자는 시종이 아니었다. 베일로 얼굴과 몸을 가린 행색이었다. 여성? 아니면 거세한 환관? 살레굽 황실에는 환관제도가 있지만 하그리아에는 없을텐데? "오늘 저녁 식사 당번은 시종이 아닌것 같은데?" 어짜피 대답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생각나는 데로 지껄였다. 하지만 상대는 놀랍게도 입을 열어서 셀림 폐국서에게 대답을 했다. "영예로운 셀림 전하를 뵈옵니다. 영명하신 전하의 생각처럼 저는 시종이 아닙니다. 저는 루키예라고 하옵니다" 셀림은 깜짝놀라서 몸을 움추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자였다. 게다가 자기가 하는 말에 대꾸를 하다니, 정말 몇년만에 겪는 낯선 경험이었다. 셀림은 겁먹은 듯이 뒤로 몸을 뒤로 뺐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건 너무 오랫만이었다. 그래서 어색하고 두려웠다. "괴이한 일이로군... 나한테는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게 할텐데? 궁녀나 시녀는 황금새장 근처에도 못오게 하는 걸로 안다만? 아니면 오늘 가져온 식사에 독이라고 넣은건가? 아하~ 알겠군~ 오늘이 마지막 식사인가?" 셀림은 아무 말이나 지껄여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루키예는 음식을 받쳐든 은쟁반 밑에서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게 보였다. "...제가 할일은 이것을 셀림 전하께 무사히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전하의 식사엔 독은 없습니다.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그...제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전...그저 제 약혼자가 보낸 편지 내용대로 전달을 해드리는 것 뿐입니다..." 루키예는 분홍빛 베일을 뒤집어 쓴 채 울먹거리며 말했다. 뭔가 셀림이 보기엔 이 루키예라는 아가씨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셀림은 궁정에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셀림이 멍청했다면 살레굽 황실에서 16살이 될 때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루키예는 셀림에게 꾸벅 절을 하고 되돌아갔다. 셀림은 어안이 벙벙했다. 경비병들이 따로 제지를 하지 않는 것인가? 뒤숭숭한 감정상태의 셀림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쪽지를 펼쳐 보았다. 오래된 양피지 종이에 하그리아 공용어로 정갈하게 쓰여진 첫 줄은 이러했다. 스피타만이 셀림 전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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