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

하그리아 왕국 9

10. 발라스

궁정엔 미녀들이 많다. 탐스러운 과일처럼 향내를 뿜어낸다. 하지만 너무 어린여자는 매력없다. 우아하고 농익은 귀부인들이 좋다. 발라스는 석류를 한입 깨물었다. 붉은 과즙이 입가를 흘러내린다. 발라스 경은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왕궁시종장에 자리에 올랐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닌 여왕폐하의 새로운 남총이라서 얻은 자리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발라스 경은 애초에 남총이 아니라도 관직에 오를만한 배경을 갖춘 사람이다. 발라스 경은 1왕자비를 배출한 명문가의 삼남이다. 발라스의 아버지는 하그리아의 내무대신이고 어머니는 법무대신이다. 발라스의 위로 두 형은 부모님의 뒤를 이어 관료가 되었고, 남동생은 지방토호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여동생은 왕실의 며느리가되서 궁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신께서는 발라스 경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표범 같은 눈매와 잘빠진 몸매는 여자들의 관심을 끈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들은 몰래 흘끔거리며 그를 쳐다본다. 발라스는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걸 좋아한다. 비단 쿠션에 몸을 비스듬히 누운 채 쟁반 위에 석류알을 손가락으로 굴린다.

붉은 과즙이 손가락에 묻는다. 혀로 할짝거린다. 시큼하고 단맛이 일품이다. 손으로 얼굴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붓거리는 휘장 밖으로 왕도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복작거리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뜨고 재밌는 것을 찾는다. 여왕폐하의 수청을 드는 것은 즐겁지만 최근엔 찾아주질 않는다.

샤흐라자드 폐하는 발라스의 탐미적인 취향에 가장 부합했다. 39살의 여성은 육감적이고 원숙미 넘친다. 제일 여자다운 나이다. 어두운 녹색 눈동자는 보석 같다. 검은 머리카락은 흑단 같다. 뺨은 장밋빛이고 피부는 상앗빛이다. 향수는 치자꽃을 쓰신다. 얼굴은 처연한 백합꽃 같다. 폐하의 우아한 목선에는 진주가 잘 어울린다.

황금을 수놓은 붉은 예복은 금빛쟁반 위에 석류알 같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발라스는 씩 웃는다. 입매와 눈빛은 열정적으로 탐닉한다. 사랑스러운 여동생 파라가 말했다. "여왕께서 요즘 오빠를 찾지 않고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주시더라, 이사야 박사라는 신참 궁정학자야.

이제 25살 밖에 안되었는데, 마누셰흐르 대학교를 졸업하고 최연소 궁정학자가 되었어. 얼굴 반반하게 생긴 불여우야. 학자라는 인간이 출세에 눈이 멀어서 벌써 왕궁관료들이랑 연줄을 만들고 있어. 발라스 오빠, 폐하를 뺏어간 그런 불여우는 짓뭉겨버려. 오빠는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성격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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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두 분 왕자비마마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세 사람은 다과회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자리는 누구보다 살벌한 입담이 오가고 있다. 1왕자비 파리사티스와 2왕자비 누르자한은 궁정에서 누구나 다 알만큼 사이가 좋지 않다. 이사야는 웃으면서 독설을 날리는 자리가 너무 부담스럽다.

"호호~ 2왕자비께서 궁정학자의 연구실에 방문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2왕자비께선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하는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오직 2왕자 전하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군요.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하고 정성으로 모시는 것만큼 훌륭한 행동은 없지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남편을 위해 열정을 바치는 아내는 저보단 1왕자비 마마지요. 옛날 살레굽에서 유행했던 노래 중에 남편의 장래를 위해서 자신의 오라비를 황제의 후궁으로 바친 여인의 노래가 있지요. 마마께선 그 노랫속 여인보다 훨씬 간절하시지 않습니까?"

"어머~ 2왕자비께서도 참~ 재미있는 말을 하시는군요. 신께서 인간을 빚으실 때 신분을 만드셨지요. 우리 하그리아에서 신분의 정점에 계신 분은 샤흐라자드 여왕폐하입니다. 폐하께 예물을 바치고 헌신하는 것은 신께 제물을 바치고 봉헌을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디 2왕자비께선 신분 높은 자의 존귀함과 신분 낮은 자의 비천함을 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왕폐하께서는 존귀, 존엄한 분이십니다. 하그리아의 위대한 여왕이신 제 시어머니를 항상 존경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신분과 위치를 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아니합니다. 1왕자비마마."

"호호호~ 2왕자비께선 예의바르고 현숙한 귀부인이로군요. 2왕자 이스카 전하께서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했을 땐, 온 궁정이 발칵 뒤집어질 뻔했는데 말이죠. 2왕자 전하께서 변고를 겪으시고 이제는 정말로 크게 경을 치시는게 아닌가~ 매우 걱정했답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성모님께서 이스카 왕자 전하를 보살펴 주시는 모양입니다. 호호호~"

"제 남편인 이스카 전하는 여왕폐하의 아버지이신 '영웅' 루스탐의 비견될 천재니까요. 저는 제 남편이 재능을 펼친다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왕이 될 거라 믿습니다."

"호호~ 아직 폐하께서 왕세자를 정하지 않았는데 너무 성급하십니다~ 하지만 차기 국왕은 모두의 관심거리지요. 궁정의 관료들은 세 왕자님들을 각각 선대 왕으로 비유를 하는데, 제 부군인 1왕자 전하는 자비왕 아르샨에 비유하고, 3왕자 전하는 냉혈왕 마르두크에 비유했으며 2왕자 전하는 미남왕 소흐랍에 비유하더군요. 2왕자 이스카 전하께선 축복받은 분이시지요~ 뛰어난 외모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셨고 왕족으로서 누구보다 화려하고 향락적인 삶을 영유할 수 있으니까요."

"범인**으로 살아갈 바엔 화려하게 사는 게 훨씬 낫지요. 제가 듣기로 1왕자 아르샨 전하께선 마누셰흐르 대학교에 입학하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계시지요? 그곳은 입학보단 졸업이 훨씬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학자가 되고싶은 강한 열망없이는 버티기 어렵다고도 하지요. 마누셰흐르에 입학하신다면 시중을 받을 수 없고 신분고하 없이 학교생활을 시작합니다. 1왕자 전하께서 과연 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아참! 어리석게도 아직 1왕자 전하께서 입학시험도 통과를 못했다는 걸 잊었습니다."

이사야는 진심으로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신께서는 이사야를 놓아주기 싫으셨다. 바깥에서 하인이 들어오더니 왕궁시종장 발라스 경께서 오신다고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