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2. 이스카
13. 아르샨
14. 달리아
15. 샤흐라자드
16. 아이라만
17. 미르셀라
18. 타흐마탄
19. 스피타만
20. 셀림
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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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보던 역사책에선 영웅들이 많이 등장한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세상 사람 모두가 입을 모아 '영웅'이라고 칭송한다. 나에게 외할아버지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 생긴 게 닮아서? 한번 보고 들은 건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수학이나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내가 뭘 하던 모두 다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외할아버지처럼 왕이 되지 않으면 되겠네? 이렇게 말했다간 어마마마께서 귀싸대기를 날리겠지만, 뭐 그치들 말에 따르면 사실이잖아? 내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면, 왕이 되면 안되는 것이지! 맞잖아?
외할아버지는 모압왕국과 상아제도들을 정복해서 서부를 얻으셨고, 골레얏 왕국과 주변 토후국들을 정복해서 남부를 얻으셨고, 마르카니아 접경너머 소국들을 복속해서 동부를 얻으셨고, 예니사라이, 니스, 에라르타(과거 쿠스리스크의 루테사나야라고 부르던 지역)를 얻으셨다.
20살도 되기 전에 아카샤족의 대왕 카라우와 역사적인 전투를 펼치고 마침내 대왕 카라우를 쓰러뜨렸다. 학자들은 외할아버지를 영웅이라고 칭했고, 시인들은 외할아버지의 일생을 칭송했다. 아카샤족은 다시 초원에 뿔뿔이 흩어졌지만 외할아버지와 하그리아를 경외한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25살에 이복형 라지한의 명으로 목이 베였다. 그렇다면 나도 25살이 되면 목이 잘려 죽는 건가? 내 삶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그림자인가? 언젠가 이런 고민을 아버지께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졸린 눈으로 대답해주셨다.
"너 나이 애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노는 게 최고야. 아직 9살 밖에 안된 애가 90살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하냐? 내가 9살 땐 살레굽 제국의 대~단하신 귀족 가문 도련님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보통 애들처럼 생각 없이 살아~ 안 그러면 20살도 되기 전에 정신이 망가져 버린다~"
내가 잘하던 것을 못하게 되고, 흥미를 느끼던 것에서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기혐오를 아버지는 이렇게 정리해주셨다. 어마마마도 아버지도 어린 나이에 큰 고생을 했던 분들이다.
나는 두 분에 비하면 호화롭게 살아온 인간이다. 그래서 내 삶이란 뭐지? 어마마마께선 나와 아르샨 형, 스피타만을 앉혀놓고 왕족의 의무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자로 태어난 우리 세 명은 세금을 바치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강하고 지혜로워야 한다고 말이다.
어마마마의 치세는 몹시 안정적이다. 어마마마 이후의 왕은 정말로 무능한 자만 아니라면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내가 욕심 낼 필요 없다. 왕으로서 의무를 수행하는 건 나보단 아르샨 형이나 동생 스피타만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의무와 권력에 얽매여 살고 싶지는 않다. 누르자한과 함께 서부속령에 있는 별궁에서 살고 싶다. 이스카는 노래를 부르고 누르자한은 춤을 추며 살고 싶다. 우리는 자유롭게 어떤 족쇄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왕실후계자로 의무를 다하거나 정치를 도우라면 할 수 있다.
어마마마께서 원하신다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내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자유로운 날개를 찢어야 할까? 16살, 어른이 된 뒤로는 어렸을 때 있었던 규제가 모두 풀렸다. 원 없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고 말을 타고 밖에 나가서 하루 외박 하고 들어오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마다 어마마마가 붙여준 스승들에게 수업과 훈련을 받을 필요도 없다. 나에게 주어진 짐들이 어깨에서 하나씩 내려진다. 인생에서 가장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게 된 건 16살 성인식 연회였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누르자한을 만나 결혼했다.
나의 누르자한, 나를 족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나의 희망. 연회에서 춤을 추는 누르자한은 누구보다 가장 빛나고 자유로웠다. 그녀는 나처럼 억압되어 있지 않다. 우아한 선율에 맞춰서 금빛 베일이 나풀거린다. 꽃과 술과 사람으로 가득 찬 연회장에서 유독 그녀만 보였다.
악사들이 발현악기를 연주한다. 금빛 고수머리를 흩날리는 무희는 음률에 맞춰 조화롭게 몸을 움직였다. 수학적인 황금비에 딱딱 맞아떨어진다. 금빛 무희는 모두를 매료할 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춤을 추었다. 어마마마께서 하사하신 황금보검보다 저 무희가 더 아름다웠다.
음악이 또 바뀌었다. 경쾌한 피리 선율에 맞춰 사람들이 연회장 한가운데에 모여 짝을 지어 춤을 춘다. 이스카도 일어나 장내로 들어갔다. 이스카와 같이 짝을 짓길 원하는 영애들이 눈길을 주었지만 이스카가 찾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금발의 무희는 혼자 벽에 기대 쉬고 있다. 다른 무희들은 왕궁관료들 옆에서 아양을 떨며 흥을 돋우고 있다. 동료 무희들이 참석하길 권했지만 누르자한은 응하지 않았다. 누르자한은 무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졌다. 춤으로 정신을 고양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왕궁의 연회에서 춤을 출 정도로 누르자한의 실력은 엄청났다. 어릴 때 부터 독하게 춤을 연습했다. 최고의 춤을 추기 위해 발가락에 굳은 살이 박힐 때까지 춤을 추었다. 그녀에게 춤이란 종교와 같다. 누르자한에게 춤은 영적인 의식이자 육체와 정신이 정순하게 조응되는 순간이다.
찰나의 시간 동안 가장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해 누르자한은 수천번의 동작을 연습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여 필멸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누르자한은 늙어서 노파가 될 때까지 계속 춤을 출 것이다. 적어도 이스카 왕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춤을 청하기 전까지 말이다.
이스카는 자신의 이름만 밝혔다. 하지만 누르자한은 그의 옷차림과 주변의 시선을 확인하고 이스카가 이번 연회의 주인공인 왕자님이란 것을 직감했다. 높으신 도련님이 무희에게 추근거리는 일은 흔하다. 대놓고 거절하면 크게 봉변을 당하기 때문에 적당히 맞춰줄 필요가 있다.
이스카는 매우 신난 얼굴이었다. 누르자한과 이스카는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누르자한은 공작새처럼 등을 펴고 팔과 발끝을 우아하게 움직였다. 빙그르르 돌며 누르자한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금빛 고수머리가 휘날리고 눈빛은 청옥석처럼 빛난다.
색색의 자수가 수 놓인 비단 휘장들이 나부낀다. 색색의 보석을 휘감은 여인들이 빙그르르 돈다. 색색의 비단신을 신은 사내들이 빙그르르 돈다. 장미향과 석류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악사들의 곡조는 절정을 이룬다. 누르자한은 등을 뒤로 꺾으며 혼신의 춤을 추었다.
곡이 바뀌었다. 남자들이 춤을 출 차례이다. 찰현악기 선율에 맞춰 남자들이 춤을 춘다. 그런데 이스카는 춤을 추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누르자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왕자께서 음악이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하셨나? 이스카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이스카 왕자의 움직임은 갯지렁이가 꿀렁거리는 것 같고 당나귀가 깡충깡충 뛰는 것 같았다. 여기서 웃으면 천한 무희가 고귀한 왕자님께 무례를 저질렀다며 처벌받을 수 있겠지만 누르자한은 뱃속 깊은 곳에서 튀어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이스카는 화들짝 놀랐다. 본인이 춤에 소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역시 전문가가 보기엔 심각할 정도로 형편없는 모양인가보다. 누르자한은 정말 세상이 떠나가라 웃었다. 고귀한 왕자님도 인간이긴 하구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이스카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웃기냐고 물어봤다. 누르자한은 차오르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왕자님은 왕자로 태어나셔서 진짜 다행이에요. 무희로 태어났다면 춤으로 밥벌이는 커녕 이렇게 춤못추는 고약한 녀석은 평생 처음 본다며 야단을 엄청 맞았을 거에요"
이스카는 침상에서 돌아누웠다. 누르자한은 곤히 자고 있었다. 누르자한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뒤부터 왕궁에서 주어진 왕자의 규율에서는 꽤 벗어난 것이다. 왕족의 배우자는 이웃나라의 왕족이거나 고귀한 가문의 자제를 들이는 게 왕실의 법이다.
어마마마의 배우자인 셀림 전하도 살레굽 제국의 황자님이다. 무희를 왕자비로 들이는 것을 어마마마께서 반대할 줄 알았지만 어마마마는 그냥 알았다고만 하셨다. 전에 아들을 때렸던 것이 마음에 남아있으신 것 같다. 나와 아버지와 누르자한은 사이가 좋다. 누르자한도 왕궁에서 적응을 잘한다.
누르자한이 왕궁시녀들에게 기죽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드세고 당찬 성격이 마음에 든다. 어마마마의 의중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유약한 성격의 며느리보단 자기처럼 강한 성미를 가진 며느리를 더 좋아하실 것이다.
이스카는 누르자한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앞으로 계속 함께 살고 싶다. 아르샨 형이나 스피타만 동생 중 누군가가 왕세자로 정해지면, 나는 아버지와 누르자한을 데리고 왕궁 밖에서 살 것이다. 아버지는 옛날 용병시절 무용담을 들려주고, 누르자한은 춤을 추고, 나는 악기를 연주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영원히,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