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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Ⅱ(‘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 한참을 울다 지친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을 깨고 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승주야, 어서 속셈 선생님 구해. 방학 곧 끝나잖아.”   “... 하아.. 넌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그딴 게 중요해?”     승주는 이와중에도 자신보다 남 걱정을 하고 있는 미련스러운 시원에게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날카롭게 대꾸하고 말았다.   녀석은 늘 그랬다.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어서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그러다 다쳐도 혼자 떠안고 끙끙거리기만 할 뿐이다. 시원이 그 사건으로 선생님들에게 데이고 난 뒤, 자긴 앞으로 무서워서 사람을 못 믿겠다며 세상을 원망한다고 모질게 얘기했었지만 승주는 그런 시원의 말을 믿지 않았다. 냉정하고 사람 자체를 믿지 않는 자신과는 정반대로 시원은 천성이 손해를 보고도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바보 같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승주가 기억하는 시원의 첫 모습은 자신이 가진 걸 남들에게 충분히 나눠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달하던.. 사람들을 돕는 게 즐겁다는 이상한 아이였다.       돈이 행복의 척도였던 냉정한 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던 자유로운 영혼의 아버지가 어린 승주를 떠나고 난 뒤, 삭막한 집에 혼자 남아 정에 굶주린 채 살아 온 승주에게 세상은 그저 비정한 곳일 뿐이었다.   어머니가 늦게까지 학원 일에 매달리는 동안, 한창 엄마 정이 그리웠을 승주는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아주머니들과 정들라치면 까다로웠던 어머니의 요구를 맞추지 못해 일하는 사람이 자주 바뀌는 탓에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정을 주는 일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 여기며 성장해왔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나고부터 자신의 스트레스를 승주에게 풀며 '너는 절대 네 아버지처럼 살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주입시켰고, 승주의 성공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인정받는 이유인 양 아이를 다그치며 숨 막히게 굴어왔다.   여덟 살 무렵부터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승주였기에 남을 믿고 돕는다는 감정은 사치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어머니의 냉소적이고 차가운 성격을 닮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자기혐오에 빠져 사춘기를 지나왔던 승주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그리는데 재능을 보이자 '성공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림 따윈 아무 소용없는 무능한 재주일 뿐'이라며 끊임없이 공부만을 강요하던 엄마를 원망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 승주에게 손을 내밀어 준 친구가 바로 시원이다. 그녀는 당시 승주가 자기 자신으로 숨 쉬며 살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친구이자, 이반이라는 같은 고민을 함께 나누며 힘겨운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는데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다.   남을 돕는 일이라면 이상하리만치 발 벗고 나서는 시원이 쉽게 이해되지 않던 승주였지만, 그녀에게 동화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얼어붙었던 지난날의 상처가 조금씩 녹아들고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마음을 나누며 시원과 승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가 된 것이다.     승주는 시원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이 되어준 사람이자, 방황하며 살아가던 시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고마운 친구다.   승주 역시 12년 전 여름. 어머니가 풍으로 쓰러져 돌아가시고 갑자기 학원을 떠안게 되었을 때, 시원이 곁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껏 혼자 버텨내지 못했을 거다. 그랬기에 힘든 시간을 서로에게 기대 온 두 친구 사이엔 우정보다 깊은 가족애같은 감정이 존재했다.     “알겠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런 걱정하지 마.”   시원의 마음을 알기에 승주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대답했다.       시원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승주네서 자고 내일 가겠으니 걱정 마시라는 연락을 드리곤 오늘은 취해서 편히 잠들고 싶다며 두 번째 맥주 캔을 딴다.   승주는 시원이 술을 마시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심지어 담배까지 입에 물자 친구를 말려보지만, 이내 허망한 눈으로 '이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는 녀석에게 말문이 막혀버린 그녀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친구 앞에 마주 앉아 함께 술을 마셔주었다.   시원은 늘 그랬다. 평소에는 한 없이 이해심도 많고 착한 친구였지만, 이상한 부분에 꽂히면 그 고집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녀석의 그런 성격을 아는 승주였기에 그저 한풀이하듯 술을 마시며 뱉어내는 친구의 말들을 가만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밥은 먹은 거야? 안 먹었으면 차릴 테니까, 절대 빈속으로는 마시지 마.”   “아까 떡 조금 먹었어.”   “떡? 집에서?”   “아니, 다카포 다녀오는 길이거든. 니네 집으로 돌아오다가 웬 할머니가 짐을 너무 힘겹게 들고 가시기에 도와드렸더니, 떡을 주시더라고.”   “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게 눈에 들어 오냐?”   “그건 그거고... 나 죽는 거랑 다른 거지.”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기며 씁쓸하게 대답하는 시원의 표정을 보고 승주는 아차 싶다.       “내가 뭘 해주면 될까?”   “있지... 나도 처음엔 내가 죽는다는 게 믿기지도 않고, 화도 많이 났었어. 왜 하필 나인걸까 싶고. 나 그렇게 나쁘게 살지 않았는데 말이야... 며칠 울기만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가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내 인생 이대로 정리도 못하고 죽는 것보단 낫지 싶어서 그때부터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러니까 조금 나아지더라고. 근데, 나도 사람인지라 이대로 죽어버리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워. 그 동안 내가 뭘 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남는 건 후회뿐이더라...”     시원은 눈물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가슴에 딱 두 가지 남더라. 졸업하고 난 뒤에 내가 한창 마음 못 잡고 방황할 때, 가방 속에 숨겨뒀던 담배를 아버지한테 들킨 적이 있어. 그때 아버지가 나보고 너 왜 이렇게 사느냐고, 정신 못 차리고 사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시는데,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오신 엄마가 대뜸 밖에서 내 소문을 들었다며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보시는 거야. 예전에 왜... 우리 졸업하고 얼마 뒤에.. 학교 교감이랑 함노식 전부 잘리고 뒤숭숭할 때 말이야. 나는 부모님 속상해하실까 봐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었는데, 그날 동네 모임에 가셨다가 우연히 몇 년 전에 있었던 그 소문에 대한 얘기를 알게 되셨고,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어서 내 얘길 전부 듣고 오셨나봐.  엄마 얘기를 다 듣고서 한참을 아무말씀도 없으셨던 아버지가 내 눈을 빤히 보시면서,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그때 당시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시더라. 그리곤 그런 일 때문에 지금껏 이렇게 오랜 시간을 방황하며 허송세월하고 사는 거라면 내 심지가 약해 빠져서라며 보란 듯이 더 열심히 살지 못하는 내가, 당신보기에 부끄럽고 못난 자식이라며 역정을 내시더라고.. 난 그때 정말 막막한 내 미래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던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인해 너무 두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 내 고민을 고작 그따위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억누르고 있던 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지금도 후회해... 그날이었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날이.. 그날... 그 말을 하지 말 것을... 충격 받은 아버지랑 엄마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죽어가는 자식을 보며, 부모님이 자신들 때문이라고 자책하시는데... 흐흑... 내가 죽는다는 사실보다 그게 나를 더 힘들게 해...”     승주는 울먹이며 토해내듯 말을 이어가는 시원의 흔들리는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 주었다.     “그런데도 더 마음이 아픈 건 내가 아직도 진선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여러 사람 아프게 한 이 빌어먹을 감정을 죽는 순간까지도 놓지 못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너도 알지? 내가 그 앨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알지...”   “오늘 낮에 집에 가서 물건 정리하고, 이 상자도 다카포에 가서 전부 태워버리려고 했어. 근데 다카포가 없어졌더라. 그래서 결국 상자를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가져온 거야...”     시원은 취한 듯 약간 꼬인 발음을 하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오늘 오랜만에 상자를 열고 진선이의 편지들을 읽어봤어. 그렇게 잊어주려고 노력했었는데.. 그 애가 날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고만 생각해서, 나만 그 애 인생에서 빠져주면 진선이가 행복할 거라 여기며 내 마음 애써 참으며 눌러 온 건데... 오랜만에 다시 읽은 편지의 내용은... 하아... 그 애가 나한테 하고 싶어 했던 얘기는...  예전에 내가 생각하던, 꼭 그런 마음만은 아니었더라...   승주야, 왜 그런 거 있지? 어린 시절 읽은 어린왕자의 책 내용은 어른이 되어 읽어도 같은 내용임이 분명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 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이해되는 거.   저 편지들.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어봤거든. 근데... 그땐 내가 여유가 없어서 진선이의 마음을 너무 다그치고 삐뚤게만 몰아갔었나 봐. 당시엔 나도, 내 감정에 여유가 없어서... 그리고 너무나 지쳐있어서... 흐흑...   그 애 역시 두려워서 조심스레 표현할 수밖에 없던 마음이었을 텐데... 그 숨은 속뜻을.. 그때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알아버렸어. 하아... 정말 바보처럼, 난 왜 내 감정에만 빠져서 이렇게 평생을 후회하고 살아온 걸까...   졸업하고 돌아섰던 나한테 진선인 계속 자기 마음을 얘기하려 했는데, 난 제멋대로 그 애의 마음을 결정지어버리곤 들으려하지도 않았어. 그저 어린 아이가 투정하듯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너의 책임도 있다는 듯이 굴어버린 거야... 어리석게도 그때 나는 내 자신이 몹시 서러웠고, 그저 그 애에게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 너무나 아프다고 소리치고 싶은 그 한 가지 마음뿐이었나 봐... 멍청하게도 난 우리가 헤어진 이유를 그 애에게서만 찾고 있었던 거야. 진선이가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며 찾아왔는데도, 난 정말이지 끝까지 못난 모습으로 지수 얘기만 해댔어. 보란 듯이 나도 누군가를 사귀며 잘살고 있다고 허세를 부렸어. 하.. 그날의 초라한 내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그게 그 애의 기억 속에 남은 내 마지막 모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진선이의 진심을 너무 뒤늦게 알아버린 내 자신이 안타깝고 후회스러워... 하아..”   “그땐 너도 어렸고, 그런 감정.. 너에게도 처음이었잖아.”     승주는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지난 시간을 자책하는 시원을 위로했다.       “나, 진선이 한 번 더 보고 싶어. 요즘 따라 진선이가 너무 그립다, 승주야. 처음 그 앨 봤던 날이 아직도 생생해.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바보처럼 그 애를 그렇게 놓치지 않을 텐데... 나 있지... 말도 안 되는 기도라도 매일 빌고 또 빌어. 다시 한번만 더 나한테 기회를 달라고 말야...   승주야.. 너는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맘에 두고 있다는 그 사람에게 니 마음 꼭 고백해라. 그까짓 짧은 인생, 겨우 백 년도 못살고 가버리는 게 전부인데...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쳐버리면...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놓아버리게 되면.. 나처럼 잡지 못한 사랑을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지도 몰라. 거절당하더라도 지레 겁먹고 스스로 사랑을 포기하진 말아... 승주야, 용기 내서 고백해. 유리씨한테...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너라도 꼭 사랑을 이루길 바라...”         -   승주는 자신의 바람대로 술에 취해 깊이 잠든 시원을 침대에 뉘이고, 녀석이 아침에 먹을 수 있을 만한 죽을 쒀두고는 뒷정리를 마쳤다.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눠왔음에도 그 동안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시원의 마음속 깊은 곳의 아픔을 알게 된 승주는 잠든 시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을 준비하는 친구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녀는 진선을 보고 싶다는 시원의 간절함을 자신이 이뤄줄 수 있기를 바라며, 창고에 처박아 둬서 먼지가 가득 쌓인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어 당시 진선의 서클 선배였던 동창들의 연락처를 찾아 하나씩 메모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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