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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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소년은 링 대륙의 서부왕국에서 지대가 낮은 고장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북쪽에서 트는 동을 바라봤다. 보이는 곳마다 구불구불한 푸른 언덕이 펼쳐졌고 일련의 골짜기와 봉우리가 마치 낙타의 등처럼 울퉁불퉁 이어졌다. 첫 태양의 타오르는 주홍 빛 서광은 아침 안개 속에 머물며 반짝반짝 빛났고 그 빛은 마법이 실린 듯 소년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살걸 뻔히 알면서도 오늘처럼 일찍 일어나 이렇게까지 멀리, 또 높이 언덕을 오른 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만은 상관없었다. 오늘만은 14년간 적용된 수많은 규칙과 집안일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특별한 날이었다. 오늘은 소년에게 운명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서부 왕국의 남부 주에 터를 잡은 맥클리오드 일가의 토르그린은 단순히 토르라고 불리는걸 좋아하며 4형제 중 막내지만 아버지의 총애를 가장 못 받았다. 그는 오늘에 대한 기대감에 뜬눈으로 밤을 셌다.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충혈된 눈으로 첫 태양이 솟아오르길 기다렸다. 오늘은 몇 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날이었다. 이런 날을 놓치면 결국 마을에 고립돼 평생 아버지의 양떼나 돌보며 남을 생을 보내는 불행한 운명을 마주할게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었다. 징병 선출일. 오늘은 왕의 군대가 각 주를 돌며 왕의 부대 지원자를 엄선하는 날이었다. 토르가 한평생 꿈꿔온 일이었다. 그에게 삶의 이유는 최상의 갑옷을 입고 엄선된 무기를 소지하는 왕의 최정예 전사, 실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14세부터 19세로 구성된 왕의 부대에 먼저 가입하지 않고서는 실버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귀족 외 출신이거나 명망 높은 전사의 자식이 아니라면 왕의 부대에 지원할 수조차 없었다. 단, 몇 년에 한번 시행되는 징병제에는 예외가 적용됐다. 왕의 부대에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실버부대가 나서 온 지방을 샅샅이 뒤졌다. 모두가 알다시피 극소수의 서민만이 선출됐으며 이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왕의 부대에 최종적으로 합류했다. 토르는 골똘하게 시야를 살피며 모든 움직임을 주시했다. 실버부대가 마을에 진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실버부대를 보고 싶었다. 양떼들이 그를 에워싸고 목청껏 울어대며 더 좋은 목초지인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가자고 조르고 있었지만 토르는 그 소음과 악취를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양떼나 돌보고 아버지와 형제들의 하인 노릇을 하며 가장 하대 받으면서도 제일 큰 짐 덩어리로 여겨졌던 삶을 견디게 해준 건 바로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거라는 다짐 덕분이었다. 그 언젠가, 실버부대가 이곳에 당도하면 지금까지 그를 하찮게 여겼던 모든 이들이 놀라게끔 보란 듯이 선출되리라 다짐했다. 신속하게 실버부대의 마차에 올라 그 동안의 삶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토르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심각하게 토르가 왕의 부대에 지원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토르가 무언가에 지원할 자격도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토르의 아버지는 토르 외의 세 명의 자식에게 모든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열 아홉 첫째 밑으로 줄줄이 연년생인 형제 셋에 토르만 이들과 세 살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 아마도 세 형제의 나이대가 비슷한 연유에서든지 토르와는 현저하게 대비되는 서로 닮은 생김새 때문이라던 지, 이 셋은 서로 붙어 다니며 토르의 존재조차 무시했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토르보다 키와 체격이 크고 힘이 세서, 작지 않은 체구의 토르지만 이들 옆에선 작아지고, 튼실한 그의 허벅지도 형제들의 참나무 통 같은 허벅지와 비교하면 비실해 보였다. 토르의 아버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머지 형제들이 훈련을 하는 동안 토르에게는 양떼를 돌보게 하고 무기를 손질하게 하며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아무도 언급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토르는 한평생 형제들의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결국엔 그들이 성취하는 업적을 지켜만 보게 될 것을. 아버지와 형제들의 생각대로라면 마을에 꼼짝없이 갇혀 가족들의 요구사항에 따라 잡일이나 하는 것이 바로 토르의 운명이었다. 불행히도 토르의 형제들은 역설적으로 토르에게 위협을 느꼈고 토르도 이를 감지했다. 형제들의 모든 시선에서, 몸짓에서 느껴졌다. 왜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형제들은 토르에게 두려움 혹은 질투심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토르의 생김새나 말투가 형제들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차림새마저 뚜렷이 차이 났다. 아버지는 토르를 제외한 자식들에게 보라색과 진홍색의 최고급 외투와 금으로 도금된 무기를 마련해준 반면 토르에게는 조잡한 넝마만 쥐어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토르는 가진 옷가지를 최대한 잘 활용했다. 허리부분에 장식 띠를 달아 긴 코트를 묶었고 여름이 다가오자 소매 부분을 잘라 양 팔에 통풍이 잘 되도록 손질했다. 그가 걸친 셔츠는 거친 마직 단벌바지와 잘 어울렸고 형편없는 가죽 부츠는 그의 정강이까지 덮어줬다. 형제들의 가죽신에 비하면 토르의 부츠는 가죽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전형적인 목동의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토르의 품행은 목동과 거리가 멀었다. 늠름한 자세와 자신만만해 보이는 하관, 기품이 넘치는 턱과 잿빛 눈동자가 마치 이주한 전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곧게 뻗은 갈색 머리는 귀 뒤로 구불거리며 흘렀고 머리카락 밑으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불빛 아래 빛을 뽐내는 잉어 같았다. 징병 참석조차 허락 받지 못한 토르와 달리 나머지 형제들은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푸짐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의 응원 속에 최고의 무기를 갖추고 징병에 지원할 예정이었다. 일전에 이에 대해 아버지께 문제를 제기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토르의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대화를 끝냈고 토르도 다신 언급하지 못했다. 너무 불공평했다. 토르는 더 이상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저 멀리서 왕실의 마차가 보이기 시작하면 집으로 곧장 달려가 아버지에 맞서 좋든 싫든 실버의 눈에 들도록 최선을 다 할 계획이었다. 나머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징병에 보란 듯이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럼 더 이상 아버지도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생각만으로도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태양이 하늘높이 떠올라 이제 막 떠오르는 두 번째 태양의 초록빛과 어우러져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 무렵 토르의 눈에 왕실의 마차가 들어왔다. 꼿꼿이 선 몸과 곤두선 머리카락에 짜릿함이 전해졌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말들이 이끄는 마차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마차의 바퀴가 공중으로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 뒤로 연이어 오는 마차가 보일 때마다 토르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두 개의 태양 아래 어슴푸레 빛나는 황금빛 마차 행렬은 마치 물위로 뛰어오른 물고기의 은빛 등처럼 보였다. 마차를 열 두 대까지 셌을 무렵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은 쿵쾅거리며 요동쳤고 난생 처음으로 양떼를 방치하고 뒤돌아 넘어질 듯 언덕 아래로 향했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 줄 때까지 그 무엇도 자신을 막지 못하리라 다짐했다. * 언덕 아래로 질주하며 가까스로 멈춰 숨을 쉬었고, 나무 사이를 가르다 나뭇가지에 여러 번 긁혔지만 전혀 문제될게 없었다. 숲 속 빈 터에 도달했을 때 시야에 들어온 마을은 백토로 지은 단층 집 초가지붕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고요한 곳이었다. 일찍부터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의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 올랐다. 지극히 전원적인 마을이었다. 왕국에서도 하루 종일 마차를 타야 올 수 있는 곳이었고 너무 외진 곳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링 대륙 변두리에 위치한 농촌이었고 고작해야 서부 왕국에 속한 일개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토르는 마을 광장을 향해 박차를 가했고 그의 뒤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놀란 닭들과 마을 개들은 달리는 토르를 비켜섰고, 마당의 끓는 가마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본 늙은 아낙이 토르를 다그쳤다. “천천히 가, 얘!” 아궁이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토르를 향해 늙은 아낙은 소리쳤다. 그러나 토르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집에 당도할 때까지 익숙한 그 길을 이리저리 돌아, 뛰고 또 뛰었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토르네 집도 별다른 장식 없이 앙상한 초가 지붕을 얹은 백토의 단층 주택이었다. 남들처럼 방 하나를 나눠, 아버지는 한쪽 벽면에서, 나머지 세 자식은 반대쪽 벽면에서 잠을 잤다. 다만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토르는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밀려나 집 뒤편에 마련된 작은 닭장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토르도 형제들과 함께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들의 체격이 커지자 자기네끼리 더욱 똘똘 뭉쳐 토르를 괴롭혔고, 더 이상 함께 잘 수 있는 여유공간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토르는 크게 상심했지만 그나마 이제는 자신만의 공간이 주어진 것에 만족했고 가능한 한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지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이러한 결정은 집안에서 토르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번 더 확인시켜줬다. 토르는 대문으로 달려들어갔다. “아버지!” 벅찬 숨을 멈추며 소리쳤다. “실버! 그들이 오고 있어요!” 아버지와 세 형제는 제일 좋은 옷을 갖춰 입고 아침 식사자리에 앉아있었다. 토르의 말에 이들은 벌떡 일어났다. 이내 어깨를 부딪히며 토르를 지나쳐 쏜살같이 대문 밖 길가로 뛰어나갔다. 토르도 곧장 이들을 따라 나갔다. 모두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첫째 드레이크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장 떡 벌어진 어깨, 다른 형제들과 같은 짧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 얇고 못마땅해 보이는 입술을 가진 그가 여느 때처럼 토르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없네” 언제나 드레이크의 편을 드는 한 살 터울 아래 둘째 드로스가 동조했다. “오고 있어요! 맹세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토르에게 몸을 돌려 토르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제가 봤어요.” “어떻게? 어디서?” 붙잡힌 토르는 주저했다. 토르가 왕의 부대를 볼 수 있는 곳이라 봐야 딱 한곳, 가장 높은 언덕이라는 걸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가장 높은 언덕에......올라갔어요……” “양떼를 몰고 말이냐? 양떼를 그렇게 멀리까지 끌고 가면 안된 다는걸 잘 알잖아.” “그렇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갈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는 성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당장 집으로 가서 네 형들 검을 가져오고 칼집도 깨끗이 닦아놔라. 그래야 왕의 부대가 당도하기 전에 형들이 제대로 갖춰 입지 않겠어.” 더 이상 토르에게 용무가 없어진 아버지는 나머지 자식들에게 가버렸다. 세 형제들은 길가에서 저 멀리 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우리가 뽑힐 수 있을까요?” 토르보다 세 살 많은, 토르의 세 형들 중 막내인 덜스가 물었다. “안 뽑는 게 어리석은 게지, 올해 부대원이 부족하다 들었다. 충원이 꼭 필요하다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이곳까지 뭐 하러 오겠어. 너희 셋 모두 똑바로 서서 턱을 치켜 세우고 가슴을 쫙 피거라. 실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말되 그렇다고 시선을 피하지도 마. 강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해. 나약해 보여서는 안돼. 왕의 부대에 합류하고 싶다면 스스로 이미 왕의 부대원인 냥 행동하거라.” “네, 아버지.” 세 형제가 자세를 바로 하며 동시에 대답했다. 아버지는 뒤돌아 토르를 노려봤다. “아직까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게냐? 어서 들어가!” 토르는 집으로 뛰어가 뒷마당에 있는 무기 창고로 갔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몇 년에 걸쳐 고생스럽게 일해 모은 돈으로 형들에게 선물한 검 세 자루를 꺼냈다. 모두 최상의 은으로 장식한 칼자루에 예술품이나 진배없는 귀한 물건들이었다. 칼 세 자루를 한꺼번에 들어 그 무게에 다시 한번 흠칫 놀래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토르는 재빨리 다시 집 밖 형들에게 뛰어가 각자의 검을 건네주고 아버지를 돌아봤다. “광을 안 냈잖아?” 드레이크가 불평했다. 아버지는 못마땅해하며 토르를 돌아봤지만 뭐라 말도 꺼내기 전에 토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부탁 드려요. 아버지께 상의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광을 내라고 했지 않았느냐” “부탁 드려요, 아버지!” 토르를 나무라며 노려보던 아버지였지만 끝내는 토르에게 용건을 물어봤다. “뭔데 그러냐?” 토르의 표정에서 간절함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저도 형들과 함께 왕의 부대에 지원하게 허락해주세요.” 형제들이 토르의 뒤에서 박장대소를 터트렸고 덕분에 토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인상을 더 찌푸렸다. “너도?” 토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제 열네 살이에요. 지원 연령이 됐다고요.” “열네 살부터 지원할 수는 있지.” 드레이크가 어깨너머로 얕보며 받아 쳤다. “네가 뽑힌다는 건, 가장 어린 사람을 뽑는다는 건데. 왕의 부대가 너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나를 놔두고 너를 뽑는다고?” “무례하기 짝이 없군, 넌 늘 그랬어.” 덜스가 거들었다. 토르는 뒤돌아 형제들을 마주했다. “형들에게 묻는 게 아니잖아요.” 이내 다시 돌아본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험악했다. “아버지, 부탁 드려요. 제게도 기회를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 뿐이에요. 비록 제가 어리긴 하지만 앞으로 차차 능력을 증명할게요.”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넌 전사가 될 인물이 못돼. 네 형제들과는 달라. 넌 그냥 목동으로 살면 된다. 네 인생은 모두 이곳, 내 옆에 있다. 넌 네 몫을 하고 네 형들은 형들의 몫을 하면 된다. 꿈은 분수에 맞게 꿔야지. 주어진 대로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하도록 하거라.” 토르는 눈 앞에서 모든 꿈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안돼,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시끄럽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분위기가 험해졌다. “네겐 더 할말 없다. 실버부대가 오고 있다. 저리 비키고, 그들이 당도하면 알아서 행동해.” 아버지는 앞으로 나서더니 토르가 무슨 거슬리는 물건이라도 되는 양 손으로 무심히 밀어버렸다. 아버지의 우람한 손바닥이 토르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마을에 요란한 소음이 일어났고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거리의 양쪽을 메웠다. 뿌연 먼지가 마차의 도래를 알리더니 얼마 후 천둥 소리 같은 엄청난 소음과 함께 여러 대의 마차가 각각 열두 필의 말에 이끌려 당도했다. 마치 불시에 습격하는 군대처럼 나타난 마차들이 정차한 곳은 토르의 집 근처였다. 말들은 주변을 의기양양하게 뛰어다니며 울어댔다. 뿌연 먼지가 가라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토르는 애타는 마음으로 실버들의 갑옷과 무기를 보기 위해 애를 썼다. 태어나 처음으로 실버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보게 되자 심장이 요동쳤다. 선두에서 말을 이끌던 실버대원 한 명이 말에서 내렸다. 실버가 왔다. 반짝이는 고리 갑옷에 긴 검을 허리에 찬 저자가, 다름아닌 실버였다. 30대의 나이에 덥수룩한 수염과 뺨에 보이는 여러 흉터, 전장에서 얻은 것 같은 휘어진 코는 진정 사내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토르는 지금껏 그렇게 큰 체구를 본 적이 없었다. 어깨는 남들보다 두 배나 넓었고 용모로만 보아도 그가 총 책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버 대원은 먼지가 가득한 땅에 발을 내디뎠다. 줄지어 서있는 소년들을 향해 걸을 때마다 그의 신발 뒤축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마을 곳곳에서 모인 소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차려 자세를 하고 있었다. 실버 대원이 되는 것이야말로 명예와 영예와 영광과 전장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토지, 명성, 재물은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최고의 신붓감과 최상의 토지, 빛나는 영광이 보장된 삶이었다. 가족 중에 실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실버가 되기 위한 첫 수순은 우선 왕의 부대에 선발되는 것이었다. 토르는 커다란 황금 마차들을 유심히 살폈고 그 안에 탈 수 있는 지원자들의 자리가 이제 몇 남지 않았다는 걸 이내 눈치챘다. 왕국의 영토가 매우 넓었기에 실버부대는 이미 그만큼 많은 마을들을 돌고 오는 길이었다. 징병이 예상보다 더 어렵고 치열할거란 현실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여기 모인 소년들이 모두 경쟁 상대였고 토르의 형들을 비롯한 웬만한 지원자들 모두 상당한 싸움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토르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실버 대원이 가능성이 있을만한 지원자를 찾아 조용히 걷는걸 보고 있자니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대원은 길 끝에서 시작해 천천히 원을 돌며 돌았다. 모두 토르가 잘 알고 있는 소년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에도 불구하고 왕의 부대에 선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 전사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이들에게는 징병이 두려울 뿐이었다. 토르는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야말로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더 선출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형들이 토르보다 나이가 많고 체구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토르가 징병에 지원할 권리조차 박탈하는 건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다. 순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실버 대원이 토르의 집 근처로 다가섰을 무렵 토르는 어느새 몸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실버 대원이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토르의 형제들 앞이었다. 대원은 형제들을 위아래로 살펴보고 흡족해 했다. 이내 형제 한 명의 칼집에 손을 뻗더니, 얼마나 단단한지를 시험이나 하듯 확 잡아 당겼다. 그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전장에서 검을 사용해본 경험이 없겠지, 맞는가?” 대원이 질문한 사람은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토르에게는 처음으로 드레이크가 긴장한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없습니다, 주군. 그러나 훈련은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훈련!” 대원은 크게 폭소하며 몸을 뒤로 돌렸고 면전에서 드레이크를 비웃는 나머지 실버대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드레이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드레이크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드레이크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난 적군들에게 훈련이나 하며 검을 휘둘러본 자네를 두려워하라고 말해야겠군!” 대원들은 다시 한번 웃어댔다. 실버 대원은 다음으로 토르의 다른 형제를 눈여겨봤다. “지원자 세 명이 형제였군.” 그는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쓸모 있겠군. 모두 체구가 좋고. 검증되진 않았지만 강해 보이고. 선발되려면 훈련이 많이 필요하긴 하겠군.” 대원은 잠시 망설였다.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대원은 고개를 움직여 마차의 뒤를 가리켰다. “올라타, 빨리. 마음 바뀌기 전에.” 환희에 가득 찬 세 형제는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토르의 시선에 덩달아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형제들이 선출되는걸 보고만 있자니 침울했다. 대원은 다음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토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주군!” 아버지가 토르를 노려봤다. 그러나 토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원은 가던 길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토르는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도 한번 봐주십시오, 주군.” 잠시 놀란 대원은 상대해줄 가치도 없다는 듯 토르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안 봤었나?” 대원은 토르에게 반문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대원들도 웃어댔다. 그러나 토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겐 전부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었다. “왕의 부대에 선발되고 싶습니다.” 대원은 토르에게 다가갔다. “지금 나이가?” 대원은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열네 살이 되긴 했나? “네, 주군. 2주 전에 생일이 지났습니다.” “2주 전이라고!” 대원은 폭소를 터트렸고 나머지 대원들도 한바탕 웃어댔다. “그렇다면 우리의 적들은 모두 자네를 보고 벌벌 떨겠군.” 토르는 가슴속에서 모멸감이 차 올랐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결코 이렇게 끝내버릴 수 없었다. 대원이 뒤돌아 걸어갔다. 그러나 토르는 그를 그렇게 보낼 순 없었다. 토르는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주군! 지금 큰 실수를 하시는 겁니다!” 대원이 다시 한번 멈춰 서서 몸을 돌리자, 사람들 속에서 탄성이 퍼져나갔다. 대원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미련한 것, 당장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는 토르의 어깨를 잡고 재촉했다. “싫어요!” 토르는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의 손을 떨쳐냈다. 대원은 다시 토르에게 다가왔고, 이에 아버지는 뒤로 물러섰다. “실버를 조롱하면 어떠한 처벌을 받는지 알고 있느냐?”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요동쳤지만 토르는 물러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용서해주십시오 주군,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토르의 아버지가 나섰다. “네게 묻지 않았다.” 대원은 위화감이 가득한 얼굴로 토르의 아버지가 나서는걸 막았다. 대원은 다시 토르에게 몸을 돌렸다. “대답해!” 토르는 말을 잃은 채 침을 삼켰다. 그가 예상한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다. “실버를 모욕하는 일은 왕을 모욕하는 일과 다름없다.” 토르는 기억을 더듬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즉 네게 채찍질 마흔 번의 형벌이 내려질 수 있다는 뜻이지.” “주군을 모욕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선발되고 싶었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일평생 꿈꿔온 일입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대원은 토르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천천히 인상을 풀었다. 침묵 끝에 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젊다. 그리고 당당하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야. 좀 더 성숙해지면 찾아오도록.” 이 말을 남긴 뒤, 대원은 다른 소년들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의기소침해진 토르는 떠나는 마차를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차는 처음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토르의 눈에 들어온 건 마차에 실려가는 세 형들이었다. 마차에 몸을 실은 그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토르에게 조롱을 퍼부었다. 그렇게 토르의 눈앞에서 형제들은 떠나갔다. 이곳에서 멀리, 보장된 삶을 향해.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리를 꽉 메웠던 마을 사람들은 볼거리가 사라지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네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머저리 같은 것아” 아버지는 순식간에 토르의 양 어깨를 움켜 쥐었다. “너로 인해 네 형들마저 잘못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느냐?” 이에 토르는 거칠게 손을 휘저어 아버지의 두 손을 치웠지만, 아버지는 다시 목덜미를 쥐고 손등으로 토르의 얼굴을 때렸다. 따끔함에 순간 토르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가서 양들을 데려와. 지금 당장! 그리고 오늘 식사는 꿈도 꾸지 말거라. 오늘 저녁은 굶어. 대신 오늘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곰곰이 반성하거라.” “아예 안 돌아오는 게 좋겠네요!” 토르는 집을 나와 재빨리 언덕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토르야!” 아버지가 큰소리로 외치자 거리에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이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쳐다봤다. 토르의 빠른 걸음은 점점 속도가 붙어 달리기로 이어졌다. 가능하다면 이 곳에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다. 토르는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단 하나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에 눈물 범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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