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화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중년 여자가 커다란 주택 뒷문에서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온다. 짧은 목으로 주위를 살피던 여자는 뒤뜰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달려 나간다. 여자는 야생풀이 억세게 자란 뒤뜰로 향한다.
내리쬐는 해와 비에 무성하게 자란 풀은 여자의 정강이에 닿을 정도였다. 여자는 이름 모를 야생풀을 헤쳐 나가며 달려갔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흐트러졌다.
중년 여자의 빠른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거친 숨을 힘겹게 내쉬고 있었다. 발길이 멈춘 곳 앞에는 낡은 건물 하나가 있었다. 짙은 갈색 벽에는 담쟁이넝쿨이 길게 늘어져 푸른 뒷산과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큰 창문에는 화살 모양 창살이 듬성듬성 박혀 있어 조금 음산한 느낌을 준다.
여자는 벅차오는 숨을 고르게 내신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내려가자 오크색의 나무문이 나왔다.
살집이 올라 손가락 끝마저도 통통한 중년 여자가 황급히 문고리를 돌린다.
“아가씨, 회장님이 오고 계십니다.”
여자의 주름진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함께 물감의 퀴퀴한 냄새가 여자를 반겼다.
지하실에는 빛바랜 말린 꽃과 아가씨가 그린 수채화 작품이 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정물화 위주로 그린 그림들은 바닥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었다. 창문으로 조각난 작은 빛이 들어오자 먼지들은 고요히 공중을 떠돌아다녔다.
협탁 위, 작은 화병에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같은 오렌지색의 캄파넬라 장미와, 화형이 동그랗게 말려 있는 마타도어 장미가 풍성하게 꽂혀 있었다.
지하실 구석에서 화병에 꽂힌 장미를 그리고 있던 아가씨는 유모의 말에 멈칫한다. 종이 위에 그려나가던 부드러운 선이 날카롭게 삐져나갔다.
“뭐? 벌써 오신단 말이에요?”
유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네.”
유모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왜 이렇게 또 빨리 오신대요? 이제 자유는 끝이네요.”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이 꽂혀 있던 이젤을 한쪽으로 치운다.
쏟아지는 빛을 받아 밝은 갈색 머리와 짙은 쌍꺼풀,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에는 얇은 혈관이 비쳐 보였다. 그럼에도 아가씨의 두 볼은 늘 생기가 가득해 약간 붉어 있었다. 누군가 수채화로 그린 듯 투명하고 맑은 얼굴이었다. 볼 중앙에서부터 얇게 퍼져나간 생기는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어서 준비하세요.”
유모는 불안한 듯 계속 뒤를 돌며 문을 바라보았다. 회장님이 아가씨가 화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알겠어요.”
유리는 손날에 묻은 흑연을 앞치마에 대충 닦는다. 걸치고 있던 앞치마를 대충 내던지고 지하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무판자를 덧대서 만든 계단은 그녀가 올라갈 때마다 살짝 삐거덕 거린다.
유리는 뒷문 쪽으로 달려간다. 달려가면서 하나로 묶은 머리를 풀자 지하실의 습기 냄새와 샴푸 냄새가 오묘하게 퍼져나간다.
“아가씨! 어디 갔다 오셨어요.”
주택 정문에 서 있는 청소를 도와주는 도우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가씨 유리에게 물었다.
“잠깐 정원 좀 살피고 있었어요.”
유리가 벅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유모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입이 가벼운 도우미들이 알게 된다면 금세 회장의 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큰 검은 대문을 통과한 검정색 세단은 흑표범처럼 날렵하게 잘 가꿔진 정원을 지나친다. 뒷좌석에 탄 회장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두껍고 뭉툭한 손은 튼실한 허벅지 위에 포개져 있었다. 검지에는 굵은 금반지가 껴져 있고 손목에는 묵직한 시계가 걸쳐 있었다. 회장은 한눈에 봐도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맹렬한 짐승이 사람이었다면 마치 회장처럼 생겼을 것 같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입가에 난 수염, 다부진 체격에 정장은 곧 찢겨나갈 듯 팽팽해져 있었다.
검은 세단이 정문을 지나가자 커다란 대문이 스르륵 닫히기 시작한다. 잘 맞물려진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저 묵직한 대문은 회장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열리는 일이 없었다. 주택은 커다란 감옥 같았다.
회장이 들어오자 주택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에 모두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회장 뒤에는 가방을 들고 있는 비서는 왜소한 체격에 은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힐끗하게 난 흰머리는 어류의 비늘같이 윤기가 돋아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유리는 회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한다. 밝은 갈색의 머리칼은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그래.”
회장은 고개를 푹 숙인 딸을 힐끗 보더니 방으로 걸어간다. 회장의 뒤를 따라 왜소한 비서가 따라 들어간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우미들은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재빨리 흩어져 자신의 업무를 시작한다.
유리는 부엌으로 향하는 유모의 팔을 잡는다.
“유모, 지하 화실에 갔다 와주세요.”
“네?”
“화실 창문을 닫고 문은 잠가주세요. 혹시나 아빠가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요.”
유리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 씹는다. 눈동자는 맥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네, 아가씨.”
“그럼 부탁할게요.”
유리는 몸을 돌려 계단 위로 올라가는 도중 회장실에서 서류봉투를 들고 나오는 김 비서와 눈이 마주친다.
‘방금 유모랑 한 얘기를 들었나?’
“안녕하세요. 김 비서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들어가 보시죠.”
“네.”
흰머리가 힐끗한 김 비서는 힘없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현관문으로 향한다. 그의 발걸음에서 지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는 그런 김 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유리는 커다란 짙은 갈색의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다. 언제 봐도 이곳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유리의 키를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문은 늘 주눅 들게 만든다. 금색으로 칠해져 있는 문고리를 열기 전 유리는 볼을 부풀린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문을 두드린다.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유리의 청아한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들어와라.”
낮은 굵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리자 어두운 방이 나왔다. 검붉은 암막 커튼에 금빛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벽지가 회장의 무서운 이미지를 더 증폭시켰다. 커다란 검은 책상에는 서류가 쌓아 올려 있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검붉은 암막 커튼을 쳐 늦은 저녁 같았다.
유리는 뒤돌아서서 문을 가볍게 닫고 서류를 살피고 있는 아빠의 정수리를 보며 말한다.
“이번에는 빨리 돌아오셨네요.”
“늦게 끝날 일도 아니지.”
그는 서류를 보다 유리를 힐끗 본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때문일까, 굴곡진 회장의 얼굴에 빛이 쐬어지자 눈 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또 저 눈빛이다. 신경질적인 눈빛. 유리는 애써 그 눈빛을 피하며 말한다.
“왜, 부르셨나요.”
“내일모레 라비에르 섬에 갈 거니 준비해라.”
늘 이렇게 통보를 하고 무작정 밀어붙인다.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유리의 가슴이 꽉 막혀온다.
“라비에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