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도 함락 Updated at Sep 18, 2024, 19:45
강유영을 처음 만난 날, 임서훈은 식칼을 들고 주현과 같이 죽으러 갈 참이었다.
폭우 속에서 소녀는 검은 우산을 쓰고 진흙탕 속에 서 있었다.
등은 꼿꼿했고 치맛자락은 새것처럼 희었다. 공주처럼 도도했다.
"실례합니다. 황각로 어떻게 가나요?"
공주는 입술이 붉고 이가 하얬으며 목소리는 듣기 좋았고 아주 예의 바른 태도였다.
임서훈은 죽기 전에 착한 일을 한 번 하기로 결심했다.
"따라오세요."
*****
천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 임서훈은 강유영을 다시 만났다.
소녀는 어른이 되었고, 일거수일투족이 아름다워 마음을 뒤흔들었다.
도도함 마저 예전과 같았다.
"임 변호사님, 우리 아빠가 곧 죽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그 여자와 딸이 재산을 한 푼도 못 받게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 임서훈은 착한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강 아가씨, 제가 원하는 보수는..."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당신이에요."
*****
임서훈은 평생 두 번 무너졌다.
첫 번째는 어쩔 수 없이 위형의 아들이 되었을 때였다.
나중에 위형이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야 그는 해방되었다.
두 번째는 강유영을 만났을 때였다.
평생을 그녀에게 빠져 살았다.